느헤미야의 기도

느헤미야1:1-11

오늘부터 몇 번에 걸쳐 느헤미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느헤미야서를 통해 그 어떤 교훈보다 느혜미야라는 인물을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은 느헤미야의 기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영적 지도자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기 주장이 강해집니다. 여러분들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간절하게 기도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기 바랍니다.

먼저 느혜미야가 활동한 시대적 배경을 보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 제 20년에 왕의 술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은 페르시아제국 메케네메스 왕조의 다섯번째 왕이었습니다(BC464-423).  캄비세스1세의 아들이 BC539년에 바벨론을 정복하고 바사(페르시아)제국을 세웠는데 ,이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고레스왕(BC559-529)입니다. 역대하36장 22절과 에스라1장 1절이하에 보면 고레스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직후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다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했습니다.

페르시아제국 왕조사에서는 고레스2(Cyrus the Great)세가 즉위한 BC559년부터 아케네메스 왕조가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그 후 고레스는 BC529년 원정길에서 전사하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2세(Kambyses II)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캄비세스2세가 BC522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돌아오던 중에 이집트 시와(Siwa)에서 사망하자 아케메네스 왕족이던 다리우스1세(Darius I, BC521-486)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다리우스1세를 이어 크세르크세스 1세(Xerxses I, BC486-466)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아하수에로왕과 동일인이라고 합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이 시기가 전성기였다고 합니다. 크세르크세스1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닥사스다 1세(Artaxerxses I, BC465-424)였습니다.

아닥사스다 1세가 통치할 때는 아케메네스왕조 말기로 왕족 내부에서 파벌이 형성되고 제국이 분열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크세르크세스 2세(Xerxses II)는 암살당했고 그 뒤를 이은 다리오2세(Darius II)도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 반란과 내분이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그리스도시국가인 스타르타와 아테네 사이에 소위 펠로폰네소스전쟁(BC460-404)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느헤미야가 왕께 나아가 훼파된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도록 조국 유대로 가게 허락해달라고 청하는 것은 반대파들에 의해 반역을 도모하려한다는 모함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왕께 나가 예루살렘성벽 재건을 위해 유다로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기 위해 느헤미야가 얼마나 고심하며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느헤미야는 왕의 술관원으로 있었습니다. 왕을 모실 때 느헤미야의 나이는 30세 전후로 추정됩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닥사스다왕 제20년, BC445년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BC405년 어간까지 활동했다고 하니 40여년 됩니다. 느헤미야가 70세 정도 살았다고 보면, 왕께 나갈 때 그의 나이는 30세 전후가 될 겁니다. 이 때는 조상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혀온지 140년이 흘렀을 때입니다. 느헤미야가 민족성이나 역사의식이 없는 가정에서 자랐다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도 남을 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니를 통해 예루살렘이 큰 환란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말을 듣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금식하고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 옛날 바벨론의 침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울며 통곡한 것은 에스라를 통해 재건되었던 성전과 성이 다시 유다인을 미워하는 적들에 의해 처참하게 공격을 받아 성전 재건도 중단된 최근에 일어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외국에 나가 살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을 잊고 살려고 해도 우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보일 겁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게 좋습니다 자기 뿌리를 부정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본문 5절에서 느헤미야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두 구절은 느헤미야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느헤미야는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 두가지 요소는 기도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때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할 겁니다. 첫째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둘째는 내가 부탁할 때 도와주려고  할 것인가.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수 없다면 부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할 수는 있지만 해줄 것 같지 않으면 기도가 안나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지만, 내 기도를 들어주실지 확신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마 주님 말씀대로 살지 않다가 도와달라고 하려니 그런 의심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두가지 기도요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수식어 이상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방 땅에 포로로 잡혀와 살게 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권세와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런 왕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하나님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말하자면 느헤미야에게 하나님은 능력도 있고 해주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생명을 걸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저도 가끔 두번째 요소에서 걸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불가능한 게 없다는 믿음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해주실까 이런 의심이 생깁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느헤미야도 이런 의심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느헤미야는 자기 감정이나 생각을 따라가지 않고 약속의 말씀으로 기도의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그는 먼저 조상이 범죄한 것을 마치 자기 죄라도 되는 것처럼 고백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옛적에 주의 종 모세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기억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8,9절). 그 약속은 다름 아니라 범죄해서 심판받고 열방에 흩어지게 되었더라도 그 흩어진 곳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느헤미야의 상황에 딱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쳔과 소망(Hopeful)이라는 사람이 절망이라는 거인(Giant Despair)에게 붙잡혀 의혹의 성(Doubting Castle) 지하실에 던져져 낙심하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 때 크리스쳔이 자신의 품 속에 ‘약속’이라는 열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꺼내 시험해보니 그 열쇠로 의혹의 성을 빠져나가는 모든 통로의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의심이 생길 때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이길 수 있습니다.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심과 싸우려면 또 다른 의심이 생길 뿐입니다. 또 주관적인 감정에 따라 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기 쉽습니다.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고 긍휼을 배푸신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내 기도를 들어주실까 의심이 생기는 이유는 불순종 때문입니다. 평소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고 맘대로 하고선 지금 와서 도와달라고 기도하려니 맘이 편치 않고 양심이 방해합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이 듣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여기서 고백의 필요성이 나옵니다. 느헤미야도 하나님께 간구하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자기 죄처럼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보면 감동적입니다. 그는 조상의 죄를 자기 죄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나와 나의 아비집이 범죄하여”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남탓을 하고 나는 잘못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인들도 교인 중에 죄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비난하고 정죄하고 그럽니다.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나의 죄로 여기고 눈물로 회개하고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난 잘못 없어요 이런 사람보다 자기가 죄인인 것처럼 회개하며 감싸주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교회의 잘못을 비판하는 대신에 나의 죄로 고백하는 그런 교인이 됩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나 교회 잘못을 나와 상관없는 듯 비판한 것을 반성합니다.

기도가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화가 난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가 “어찌하여 애굽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가 화를 내서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고 하십니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출32:12)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출32:14). 하나님은 믿고 기도할 때 응답해주십니다. 어려운 일이 생겼다고 낙망하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 나가 말씀 붙잡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입게 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