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명분을 지키자

창25:27-34

우리가 살다 가야할 세상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돈과 개인적 성공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매일 돈과 성공의 갈등 속에 삽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천국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어느새 돈을 벌고 성공하고 싶은 욕망에 밀려납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며 저는 이 시간 ‘장자의 명분을 지키자’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주중에 에서와 야곱에 관해 기록된 성경을 읽으며 시대는 달라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도 사람도 같기 때문입니다. 장자 명분에 대해 에서와 야곱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면서 우리가 믿음에 대해 어떤 마음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 깨닫기를 바랍니다.

저는 인생이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 속에 살다간다고 믿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그것이 좀더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기도하고 숨어 있기도 합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창25장 2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임신한 리브가에게“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에서와 야곱을 가리킵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복중의 태아를 놓고 그들의 인생을 말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복중의 에서와 야곱이 어떤 인생을 살게 될 지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아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이 그렇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주권자의 선언 같은 것입니다. 말씀하시니 하늘과 땅이 창조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 중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사명을 갖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사명을 누가 주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런 선언문을 낭독할 사람이 있다면 아마 에서겠죠. “나는 동생 야곱을 섬겨야할 역사적 사명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때가 되어 두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와 이름을 얻었습니다. 먼저 나온 아이는 온 몸이 붉고 털이 많아서 에서라고 불렸고 동생은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해서 야곱이라고 불렸습니다. 그 당시에도 좋은 이름도 많이 있을 터인데 생긴대로 태어나는 모양을 보고 강아지 이름 짓듯  자식이름을 ‘붉은놈’,  ‘움켜쥔놈’ 이렇게 불렀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상징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하니 거의 동시 나온 거지만 그래도 순서가 있어 에서에게 장자명분이 주어졌습니다. 뭐든 출생으로 얻는게 쉽습니다. 시민권만 해도 그렇죠. 나중에 노력해서 얻으려면 몇 배 힘이 듭니다. 출생할 때 얻지 못한 것은 없는대로 사는 것도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 어디 그렇습니까? 피터지게 싸워서라도 갖고 싶은 건 갖아야 만족하죠. 그래서 세상은 항상 시끄럽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세상 질서를 따라 동생인 야곱이 에서를 섬기고 살면 형제간 싸울 일도 없었을 겁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에서가 야곱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를 형으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 9장 11절에 나와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 이해됩니까? 형이 동생을 섬기게 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만일 야곱이 장자로 태어났다면 출생순서에 따라 아버지의 축복을 계승한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작은아들로 태어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 자란 후에 하나님의 계획을 말했다면 사람들은 야곱에게 뭔가 좋은 점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를 영적 가장으로 삼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택함받은 근거가 세상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셈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두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미리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연극이나 드라마를 보면 이미 작가의 머리 속에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와 역할이 대충 정해져있습니다. 재치있는 배우들이 애드립을 하고 또 극본과 다르게 연기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계속 벗어나게 연기하면 아웃당하겠죠. 하나님의 무대에선 사람들에게는 얼만큼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내 맘대로 산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게 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또 생사화복, 심지어 앉고 일어서는 것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믿음으로 갖고 살다가도 “이게 뭐야, 하나님이 정말 살아서 역사하시는 거야?’ 이런 의심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살라고 강조합니다. 다 알 수 있다면 왜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 끝부분까지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지만, 에서는 에서처럼 야곱은 야곱처럼 살았던 것이 두 사람의 자유의지의 선택이라기 보다 왠지 각자 그렇게 살도록 의도되어 있는 것 처럼 생각됩니다. 그런데도 잘못하는 것은 순전히 지가 잘못한 것 처럼 두들겨 맞는게 또 인생입니다. 가롯 유다보세요. 누군가 배신자가 있어서 예수님은 팔려가 죽음을 당하고 그래야 죄인들이 구원얻는 길이 열립니다. 드라마라면 악역도 잘하면 인기를 얻고 상도 받지만 실제 인생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태어나지 않는게 나았을 사람으로 매도되고 맙니다. 그래서 생각이 드는 것은 세상에서 악역을 하다 가는 사람들은 어떤 선악을 행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은혜밖에 있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인본주의자들이 들으면 맞아 죽을 말이죠? 이 벽을 넘지 못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적잖습니다. 여러분은 넘어 섰습니까?

다시 에서와 야곱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어느날 에서가 하루 종일 사냥하다 지치고 배고픈 상태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 때 야곱은 팟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배고픈 에서는 팟죽 냄새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팟죽 한 그릇 달라고 했습니다. 에서가 사정하기 하기 전에 “형, 배고프지, 얼른 이리와 팟죽 먹어봐, 내가 형줄라고 끓였어” 이렇게 나와야 형제죠. 그런데 움켜쥐고 태어난 야곱 답게  딜을 합니다. “형 팟죽 먹고 싶지? 그러면 장자 명분을 내게 넘겨” 그 순간 에서의 머리 속엔 “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 명분이 무슨 소용이냐 ”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너나 가져라” 야곱은 도장찍듯이 형에게 맹세까지 시켰습니다.

에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장손으로 태어난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 장자명분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가 있는지 깨달았을 때는 늦었습니다. 장자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통해 계승받을 자격과 권리를 부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원통한 일이었지만, 누굴 탓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공부하라는 겁니다. 에서가 늘푸른교회 다니며 성경공부했다면 축복권을 그렇게 날려버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팟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에서를 “망령된 자”(godless)(히12:16)라고 표현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장자의 명분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알았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에게서 배웠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리브가가 임신했을 때 하나님께 들은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의 장자 명분을 얻어내 하나님의 복이 자기에게 임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형이 사냥을 갔다 돌아올 때면 늘 배고파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봤을 것입니다. 등치 큰 사람일수록 배고픈 것을 더 못견디죠. 1박 2일 강호동을 보세요. 음식을 앞에 두고 게임을 할 때 눈이 돌아갑니다. 에서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내 생각엔 우연이 아니라 치밀한 작전으로 야곱이 형의 장자 명분을 얻어낸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야곱이 더 비열하죠. 동생이 배고픈 형에게 먹을 것을 이용해 형이 가진 명분을 가로채버린 것은 비난받을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적 관점에서 평가하지 않습니다. 장자명분을 우습게 생각하고 팟죽 한 그릇에 넘겨 준 에서를 망령된 사람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에서는 사기당하고 파산당하고도 동정받지 못한 셈입니다. 이처럼 가치를 몰라서 생명 같은 하나님의 복을 차버리면 동정은 커녕 망령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런 사람으로 그런 위치로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흘러갑니다. 장자인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에게 장자명분을 넘겨준 순간 하나님의 복이 에서를 피해 야곱에게 흘러갔습니다. 장자명분은 오늘날 믿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장자명분을 소홀이 여긴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하면 믿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뭐라고 해야합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주시는 복을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님을 통해 완성시켜주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받는 복이 뭡니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아닙니까? 믿음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자격과 권리를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우습게 하는 사람은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팟죽 한 그릇에 팔아먹은 것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망령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 망령된 자들이 없습니까? 에서가 팟죽 한 그릇에 하나님의 복을 걷어 찬 것처럼 살지 않습니까? 믿음이 귀한 것을 모르고 걷어 차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장자명분이 있어야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믿음이 있어야 예수 안에 약속한 모든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그 어떤 보화보다 더 가치가 있고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갑니다. 부자가 되더라도 권력을 잡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더라도 길어야 20년 정도 누리다가 그것으로 끝입니다. 영원한 것은 하나님 나라 뿐입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정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박해시대에 성도들은 죽음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여러분도 재물과 성공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끝가지 믿음을 지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받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