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

창세기12:1-9

오늘은 아브라함의 소명과 순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중심인물은 아브라함이지만 사실 주인공은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신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도 아브라함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듣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이전에도 에녹과 노아처럼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말할 때 에녹이나 노아를 먼저 말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대표적인 인물로 제시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불신자로 시작해서 자기 인생을 걸기까지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삶을 통해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웁시다.

아브라함의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벨탑 사건으로 노아 후손들이 흩어진 후 대략 200년쯤 지났을 때 태어났습니다. 창세기 11장 10절 이하에 셈 후손의 족보가 나오는데, 아브라함은 셈의 9대 후손입니다(26절). 제가 지난 주에 바벨탑 사건은 창세기10장 25절에 근거해서 벨렉이 태어날 때 쯤이라고 했는데, 벨렉부터 아브라함까지 족보 연대를 더해보니 191년이 됩니다. 족보 연대 정확성은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참고하는 정도입니다.

그 다음 아브라함이 태어나 자란 곳은 28절에 갈대아 우르로 나옵니다. 스데반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 때 하나님이 나타나 그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행7장 2-4절).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우르(Ur)는 메소포타미아 남쪽 지역에 위치한 수메르 문화의 중심도시였답니다. 전에도 한 번 사진 자료를 보여드렸는데 고고학자들은 발굴 유물에 근거해서 우르를 아브라함 당시에 가장 발달한 도시 문화를 가진 살기 좋은 곳으로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우르에 살 때 그를 찾아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불러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귀로 들을 수 있게 말씀한 것인지, 말씀이 심령 속에 내적으로 임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이르시되 히브리어 ‘아마르’는 ‘말하다, 이야기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본토 친척 집은 아브라함이 태어나 자란 갈대아 우르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할 때 목적지를 먼저 알려주진 않으신 것 같습니다.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미래 완료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분명하게 지시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은 모두 다 알고 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다렸다 때가 되면 직전에 보여주십니다. 순종은 미리 알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다 정해 놓으셨겠지만 적당한 때가 될 때까지는 침묵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앞일이나 늘푸른교회의 앞 일을 정해 놓으셨겠지만 때가 되기 전까진 우리는 모르죠. 때가 되어야 윤곽이 드러날 겁니다. 미리 알려 달라고 해도 침묵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하나님 믿고 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본토친척을 떠나라고 하신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그 당시 우르는 가장 발달한 도시 문화를 가지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곳이라 어디보다 살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잘 사는 게 목적이면 떠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갈등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굳이 고향을 떠나라고 했겠습니까? 그것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우상숭배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도움 없이도 먹고 사는데 어렵지 않다면 사람들은 힘들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있다면 더욱 그렇겠죠. 신앙생활은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 하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말에 유혹을 받았을까요? 유혹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큰 민족이 되는 것이나 이름이 창대하게 되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한 걸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제안에 넘어갔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는데, 그는 그 때까지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무엇보다 자식 얻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입니다. 그 정도 나이 먹으면 세상에 귀한 게 별로 없고 자식 낳고 손주보고 그런 게 인생의 낙이죠. 조카 롯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동생들도 자식 낳고 딸 낳고 사는데 아브라함은 장자로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큰 민족 되게 해준다는 말이 유혹이 되죠. 큰 민족 되게 하려면 우선 자식부터 낳게 해줘야 할 게 아닙니까?

저는 이번에 설교 준비하면서 든 생각인데 아브라함이 75세가 될 때까지도 자식을 낳지 못한 게 그냥 그렇게 된 게 아니고 하나님 계획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가 되면 이걸 가지고 아브라함을 불러내려고 태를 막으신 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많은 자식을 낳았고 자손이 번성했다면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는 제안이 먹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식도 많고 손자들도 많았다면 그냥 놔둬도 큰 민족이 될 게 아닙니까? 왜 고향 떠나 고생한답니까?

아들 갖는 게 소원인 아브라함 부부에게 하나님은 아들 하나 뿐 아니라 너 후손으로 큰 민족이 되게 해줄 건데 내 말대로 할래? 이렇게 한 건 아닐까요?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뭐 그렇게 장한 믿음이라고 할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것은 인간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 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믿음의 조상이니 뭐니 하면서 추앙을 받더라도 하나님 아니면 그런 아브라함이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이 다 만들어주신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4절에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였다고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으니 중년에 해당합니다. 동기가 무엇이든 하나님 약속을 믿고서 그 나이에 고향 떠난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습니다. 11장 32절을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하란을 떠난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 데라의 나이를 참고하면 하란을 떠날 때 데라는 살아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데라는 70세에 아브라함을 낳고(11:26), 205세까지 살았다고 합니다(32절). 아브라함이 75세일 때 데라는 145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후에도 데라는 60년을 더 살았겠죠.

헤어지는 것은 아버지 데라에게도 아들 아브라함에게도 힘든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때때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사람은 안주하고 싶은 본능이 있죠. 기반을 잘 다졌다면 이젠 좀 편하게 살고 싶지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떠나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엔 그런 사람들을 세상에서 잠시 누리는 영화보다 영원한 본향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약 480km랍니다. 당시 여행로를 볼 때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시리아를 거쳐서 다메섹을 통과해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가축을 몰고 다니는 것도 고생이었을 겁니다. 아버지 데라가 동행하지 않은 것은 아마 데라가 하란을 떠나기 싫어했기 때문일 겁니다. 하란은 메소포타미아 서쪽 끝으로 거긴 그래도 고향땅에 속하지만 하란을 넘으면 타국이 됩니다.

아브라함 일행이 가나안에 들어가 처음 머문 곳은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였습니다. 모레는 본다는 뜻을 가진 라아에서 파생된 말로 종교적 의미에서 ‘가르치는 자’라는 뜻으로 예언자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엘론’은 ‘강하다’는 뜻을 가진 ‘울’에서 파생된 말로 상수리나무처럼 재질이 강하고 병충해도 잘 견디는 나무를 가리킨답니다. 옛날 마을에 당산 나무 같은 것이 있던 것처럼 아마 그런 종교적 신탁을 받던 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역 사람이라면 그 나무가 어디 있는지 아니까 지명처럼 쓰일 수도 있었겠죠.

모레 상수리나무 있는 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로부터 가나안 땅이라는 말이 유래했습니다. 가나안은 함의 네 번째 아들로 가나안 사람은 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가나안 후손들이 살고 있는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겠다고 7절에 약속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감사하다고 단을 쌓고 제사를 올렸지만, 가나안 사람에겐 날벼락이죠. 그런데 여기엔 사연이 있었습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어 먹고 취해 장막에서 벌거벗고 자는 걸 둘째 아들 함이 보고 그걸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겉옷을 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덮어드렸습니다. 나중에 세 아들이 한 일을 알고 나서 아버지 노아는 함에게 노하여 함의 아들 가나안이 그 형제들의 종이 되기 원한다고 저주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왜 가나안이 동네 북이냐 하는 겁니다.

가나안은 함의 막내 아들이고 그 위로 형이 셋이나 더 있는데 가나안이 저주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연일까요? 문제는 가나안 후손들이 장차 아브라함 후손이 얻어야 할 땅에 가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후손들이 그곳에 가서 산 것도 섭리의 결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후손들이 죄다 얻어 맞고 죽고 그랬습니다. 하나님도 명분이 있어야 하니까 가나안 후손들이 우상을 섬기며 부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렇게 하셨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에게서 뭔가 믿음에 교훈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선 그런게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소명과 가나안 진입 직후의 이야기에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하나님이 뜻하신 계획이 있고  하나님은 그 계획에 동참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시며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을 사는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나 부르다가 아브라함이 얻어 걸린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셈의 후손이라는 것부터가 선택된 것입니다. 노아는 세 아들 중에, 셈이 장자이기도 하지만, 영적 차원에서도 셈을 축복했습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로 지칭하고, 야벳에 대해서는 셈의 장막에서 창대하게 되라고 했습니다. 셈을 중심에 세운 것입니다. 그런 섭리 속에서 아브라함이 셈의 후손 중에 태어났고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는데 불러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이 먼저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까지는 아브라함에게 본받을 것은 이기적인 동기든 아니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다는 것 밖엔 없습니다. 오늘 교훈은 순종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과정에서 창대한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