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속을 멀리하자

레위기18:3-4

오늘은 세상 풍속을 주제로 말씀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 이 말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 용어는 안디옥사람들이 예수 믿는 제자들에게 붙여준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믿는 사람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는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표현보다 “저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늘 고민해야 합니다.

원래 교회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에 오염되지 말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묶어서 말하니 개인적 책임을 못느끼는 것 같은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세속적인 문화를 따라 살지 말고 주님 말씀대로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은 산 속에 세워진 반면에 교회는 도시 한 복판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속세를 버리고 산으로 도피해 나홀로 거룩해지려는 방식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같은 영향을 줘야 합니다.

레위기 18장 3-4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 땅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따르지 말고 주의 법도를 따르고 주의 규례를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언급하며 ‘그들을 본받지 말라”(마6:8)고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12:2)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주류적인 주변 문화를 따르지 말고 시대를 초월하는 주의 법도와 규례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연어 때가 산란기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걸 본적이 있습니까? 연어가 흘러가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면 편하긴 하겠지만 그 끝은 결국 허망하게 죽음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자기 시대의 세속적인 문화에 타협하고 그 문화를 즐기며 살게 되면 그 끝은 하망한 죽음 밖에 남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죽을 힘을 다해 세상의 문화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인 존 스토트는 '제자도'에서 다원주의, 물질주의, 윤리적 상대주의, 외모 지상주의 같은 것을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세상 풍조라고 지적했습니다. 이것들이 어떻게 기독교신앙을 위협하는지 아십니까?

다원주의는 기독교가 최종적이며 유일한 진리라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다른 종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나름 진리이며 구원의 길이 있으니 서로 다른 종교를 피차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죄인이 구원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다원주의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데, 그러면 독선적이다, 배타적이다 이런 비난을 듣고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물질주의는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질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질주의가 독교신앙에 해가 되는 것은 재물을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중심이 되고 있는 현대 사회는 개인은 물론 국가 간에도 정의와 평화와 같은 가치보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 더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에서 중국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는 속셈은 북한을 자기 편에 두는 게 이득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상대주의 역시 기독교신앙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인정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결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성윤리 영역에서 상대주의가 잘 드러납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유대-기독교사회에서는 결혼은 이성간에 일부일처제이며 성관계는 결혼한 부부 사이에 허용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윤리와 도덕성에 근거해 간통죄가 성립되고 혼전관계가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속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일부 교회에서조차 동성간의 결혼을 용인하고 교인들의 혼전 동거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외모에 몰두하는 사회현상 또한 기독교신앙의 가치를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전에는 연예계에 종사하는 일부 사람들이 외모에 신경을 쓰고 성형수술을 하던 것이 이젠 거의 모든 젊은이들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취업에 유리하다고 성형수술을 받는 남성들까지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잘 생긴 것보다 마음이 청결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봅니다. 멋진 남성, 이쁜 여자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리합니다. 반면에 못생긴 사람들은 가진 재능도 저평가됩니다. 외모 때문에 자존감이 낮아지고 불만이 쌓여 신앙생활에도 방해가 됩니다.   

어느 시대, 어디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풍속과 생활방식이 존재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려면 사람들이 만든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주님이 기뻐하는 생활방식을 따라 살기로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치를 왜곡시키는 세상문화를 버리고 주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제자들의 생활방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 문화의 지배아래 불신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길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를 살든 제자라면 스승이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은 사람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타락한 후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과 참된 인간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인간성의 회복 곧 성화의 구원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닮는 것입니다.“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의심해선 안됩니다. 그건 겸손이 아니라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본받아야 할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순종, 겸손, 섬김, 사명을 위한 헌신 등을 본받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을 보면,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강조되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종의 형상, 곧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하나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종의 마음을 가지고 죽기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0:28). 마지막 밤을 보내신 다락방의 저녁 식사 도중에는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노라”(요13: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적어도 목자나 집사나 목회자는 교회는 물론 세상에서 다른 사람 위에 서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본받는 제자의 생활상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실 때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이 연장선에서 예수님은 따르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주님의 명령을 받들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 차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제자들처럼, 우리도 복음을 들고 다른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안디옥과 터기와 에베소와 고린도와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중국 내지 깊숙히 들어갔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한국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한반도로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무례하게 쳐들어가야 합니다. 마이클 램지 주교는 “우리가 나가서 회의자들의 회의 속으로, 질문자들의 질문 속으로, 길 잃은 이들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우리 신앙에 대해 말하고 그 신앙을 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세상을 겁내고 교회당 안에서만 머문다면, 세상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는 맛일 잃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하려는 사람들은 고난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고난을 겁내면 주님을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핍박과 고난은 필수과목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부모, 형제로부터, 배우자나 자녀로부터, 직장 상사나 동료로부터 핍박이나 비난을 받고 고난이 오면 의를 위해 견뎌내길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닥쳐오는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도록 만드시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고난은 육체의 욕망과 세상의 자랑을 버리고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주님을 닮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주님을 닮기 위해 노력했지만, 육체의 욕망과 세상 유혹에 무너져 좌절한 적이 있을지 모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 주님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것인데, 그것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어떤 노력보다 먼저 예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예수님처럼 살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윌리엄 템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햄릿이나 리어 왕 같은 희곡을 주고 그런 희곡을 써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세익스피어는 할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게 예수님의 삶과 같은 삶을 보여주고 그렇게 살라고 하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살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익스피어의 재능이 내 속에 들어온다면, 나도 그처럼 희곡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온다면 나도 그분처럼 살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 땅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가나안 땅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오직 주의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도 한국 땅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미국 땅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게 제자의 삶입니다. 물질중심의 자유분방한 미국 땅의 풍속을 따라 살면서 진실된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미국 땅에서 살더라도 주의 법도와 규례를 따라 살기 바랍니다.

세상 풍속을 멀리하고 주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주님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성교제가 자유분방한 사람은 거룩한 생활을 하기 어렵습니다. 외모에 집착하면 예수님을 닮는 성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멀리하고 주야로 주의 말씀을 묵상하며 매일 매일 성령의 감동을 받도록 힘쓰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돈 밖에 모르고 성적으로 문란하게 사는 사람들 속에서도 거룩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늘푸른교회 교우여러분, 세상 풍조를 탓하며 오염되지 않도록 여러분 자신을 잘 지켜내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