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예배를 경계하자

이사야1:10-20

오늘부터 이사야서 강해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같은 메시지를 듣더라도 성령께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어떤 사람에겐 책망과 회개가 되고, 어떤 사람에겐 격려와 위로가 되고, 어떤 사람에겐 갱신과 회복으로, 어떤 사람에겐 결단과 헌신의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먼저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시대, 그 다음 야곱과 그 아들들이 애굽에 내려가 노예로 지낸 430년, 그 다음 모세의 인도아래 애굽을 탈출해 광야에서 보낸 40년, 그 다음 여호수아의 인솔아래 가나안을 정복하고 12지파가 땅을 분배 받아 정착한 사사시대, 그런 다음 왕정시대로 이어집니다.

왕정시대는 다시 초대왕 사울부터(BC1050-BC1010), 다윗왕(BC1010년경-BC970), 솔로몬왕(BC970-BC930)까지 통일왕국시대에 이어  솔로몬이 죽은 후(BC930년경)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한  남왕국 유다와 르호보암이 왕으로 추대된 북왕국 이스라엘, 이렇게 둘로 분열된 왕국시대로 이어집니다. 둘로 분열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열왕기 본문으로 설교할 때 설명하겠습니다(왕상11:26절 이하). 웃시야왕, 요담왕, 아하스왕 히스기야 왕은 모두 분열된 후 유다 왕들입니다.

1장 1절에 선지자 이사야는 남왕국 유다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한 것으로 나옵니다. 웃시야는 유다 10대 왕으로 BC791-739년까지 52년 동안 재위했고 선정을 펼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왕하15:1-7). 요담은 11대 왕으로 BC747-731년까지 16년간 재위했고 정직한 왕으로 평가받지만 산당을 다 제거하지는 못한 아쉬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왕하15:32-36). 웃시야와 요담의 통치연대가 겹치는 9년(BC747-739)은 왕자 요담이 섭정했기 때문입니다(왕하15:5). 그 다음 12대 아하스는 BC731-716년까지 16년 간 통치하는 동안 여호와 앞에 정직하지 못하고 자녀를 불사르는 이방인들의 우상의식을 용인하는 등 악한 왕으로 평가되었습니다(왕하16:1-20). 13대 히스기야왕은 BC715-687년까지 29년 재위했고 우상척결에 힘쓰고 전 후 그런 왕이 없을 정도로 여호와를 의지했다고 평가 받았습니다(왕하18-20장).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한 기간은 웃시야왕 말기부터 히스기야왕까지 BC 740년경부터  BC690 전후였습니다. 그 당시 국제정세는 유다왕국에게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앗수르의 디그랏빌레셀 3세(BC745-727)는 강력한 세력으로 지중해 쪽으로 서진정책을 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랍의 여러 왕들과 북왕국 이스라엘은 유다도 앗수르를 상대로 연합전선에 참여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왕 아하스는 그 제안을 거부하고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앗수르는 유다를 지원해 북왕국 이스라엘 쳐 BC722년에 멸망시켰습니다.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이 오히려 유다를 더 위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런 혼란스런 국제정세 속에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 선지자 이사야의 개인적 프로필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 이름이 아모스인데(사1:1),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왕이나 제사장 등 고위층 지도자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고 해서 고위 가문 출신이거나 왕족, 특히 9대왕 아마샤의 조카, 또는 웃시야왕의 사촌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결혼해서(사8:3)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을 모두 상징적으로 지었습니다. 첫째 ‘스알야숩’(7:3)은 “남는 자가 돌아오리라” 는 뜻이고, 둘째 ‘마헬살랄하스바스’(8:3)는“파멸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1장은 이사야서 전체 내용을 포괄하는 서론적인 부분입니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한 죄가 뭔지 지적하고 그 때문에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탄식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한 가닥 희망을 선포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남은 자들은 죄악을 버리고 주께 돌아와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죄 때문에 전쟁의 고통을 받고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가는  수난을 당하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잘못을 깨닫고 죄악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사람은 구원 얻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죄와 심판, 회개와 구원은 이사야 뿐 아니라 아모스, 호세아, 미가, 요엘 등 선지자들의 공통된 메시지였습니다. 죄와 심판, 회개와 구원은 오늘 우리도 듣고 삶에 적용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은혜와 믿음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서, 적당히 죄가운데 살아도 괜찮은 것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용납할 수 없으신 것은 이사야 시대나 지금 우리 시대나 동일합니다. 일제 식민통치의 억압과 6.25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살아온 우리 부모 세대들은 굶주림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잘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애쓴 결과 이제 먹고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한국기독교는 눈부실 정도로 급성장해 세계가 주목할 정도였습니다. 대표적인 교회가 여의도 순복음교회였습니다. 의지할 곳 없이 절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전처럼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위기를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2,3절을 보면,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와 나귀만도 못하다고 책망했습니다. 소와 나귀도 먹이를 주는 주인은 알아보고 잘 따르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을 먹이고 길러준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택하여 특별히 자기 백성으로 삼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육신의 욕망에 따라 부정하게 죄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을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동물 농장을 보면 특정한 장소를 떠나지 않고 몇 개월째 주위를 배회하는 버려진 개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작은 흰둥이가 사람들도 별로 살지 않는 외진 사거리 도로 안으로 들어와 지나가는 차들을 쳐다보다 따라가기를 반복하는 걸 봤습니다. 사연인즉 주인이 차에 태워 그곳에서 그 개를 버린 것 같다는 것입니다. 흰둥이는 주인이 자신을 버린 줄은 모르고 주인이 자기를 찾아올까 싶어 매일 그곳을 찾아와 차에 치일 위험에도 불구하고 애타게 주인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다가오면 도망갑니다.

애완동물, 특히 개를 길러본 분은 알겠지만, 사랑을 준 만큼 주인을 따릅니다. 주인의 시중을 다 들어주는 개도 봤습니다. 화단에 물을 주려면 지가 가서 수도꼭지를 틀고 다 끝났다고 하면 닫습니다 주인이 들에서 일하고 나오면 땀 딱으라고 수건을 갖다 주고 물병도 들고 와서 먹으라고 합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전등도 켜고 TV 리모콘도 갖다주고 전화기도 갖다 주고 라면 봉지도 가져다 주고 심지어는 커피 포트 물도 가서 끓이고 방안에 어지러진 휴지는 분리수거까지 하는 걸 봤습니다. 주인이 기뻐하는 줄 알고 몸 바쳐 다하는 겁니다. 개가 주인을 지키려고 사투를 벌인 이야기는 들었어도 개가 주인을 배신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10절 이하에서 이사야가 지적하는 이스라엘의 잘못은 거짓된 예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수양, 수송아지, 어린 양, 수염소 제물을 들고 성전에 나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월삭과 안식일과 정한 절기를 지키고 대회로 모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제물이 하나도 기쁘지 않으시다며 헛된 제물이라고 하셨고, 헛되이 마당만 밣을 뿐이라고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하나님을 실망시켰습니까? 13,15절에 언급된 것처럼, 손에 피가 가득한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짓고 제사지내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종교적 습관이 돼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죄 용서의 수단으로 악용했습니다. 속죄제사로 처벌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습관적으로 죄 가운데 살면서 제사로 용서받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내가 기뻐하지 않는다”,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 “내가 듣지 않겠다”는 표현으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씻고 깨끗케 하며 악행을 그치고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사람을 도와주고 고아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과부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이웃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일깨워주는 메시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든 나와 가족만 생각하며 살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면 안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누구든 도와줘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종교와 삶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상숭배는 종교와 삶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몰렉을 섬기는 자들은 자식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만일 몰렉이 의로움을 아는 신이라면 어찌 이런 부도덕한 짓을 용인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알을 숭배하는 남성들은 바알신전의 여사제들과 방탕한 짓을 하며 물질의 복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바알이 제대로 된 신이면 어찌 이런 부도덕한 짓을 종교적 제의 행위라는 이름으로 자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실 몰렉이든 바알이든 배후에서 사단이 그런 사악한 짓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방 종교, 우상숭배의 배후엔 악령이 있다는 걸 기억하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이사야의 예언이 주는 교훈은 거짓된 예배자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거짓과 탐욕과 부정한 마음으로 살면서 형식적으로 주일에 별 생각없이 나와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견딜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저 세상 속에서 우리 삶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상과 죄악을 버리고 선행과 공의를 구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삽시다. 하나님은 상심한 사람을 위로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여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는 복을 누리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