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

요한일서 3장 14절 ~ 18절 -김재범 목자

요한일서의 특징적 주제는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것과 같이 사랑입니다. 요한일서는 요한이 노인이 된  AD90년 경에 쓰여졌는데요, 이 때에는 이미 교회와 회당이 완전히 분리 되었고 믿음, 행위에 대한 논쟁도,  어느정도 다 정리가 된 상태였습니다.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 있던 한 사건을 통한 계기로 이 서신을 쓰게 되는데, 이 때 당시에 에베소 교회에는 잘못된 가르침, 거짓 교훈이 들어오게 됨으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또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분별하는 특징들에 대해서, 다시 쉽게 말하자면,  진짜 그리스도인과  가짜 그리스도인을 구분짓는 특징들을 자세하게 전할 목적으로 요한일서를 쓰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해 “사랑”이 생명을 얻은 자의 가장 큰 특징이라는 것이지요. 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지나친 구절인데, 생각해 보면 볼수록 큰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살아있는 것과 사랑이 어떠한 관계이길래, 이런 말씀을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일까요? 릭 워렌 목사님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를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고 결국 우리 삶의 목적은 사랑을 하는것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이 우리 생명의 이유라는 거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요한은 진짜 그리스도인, 거듭난 그리스도인, 생명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요? 사랑을 하는 사람이 생명을 얻은 자 라고 하기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가족들을 “사랑”을 하고, 돈을 “사랑”하고, 명예/성공을 “사랑”하는것 같이 보이는데 말이죠. 사도 요한은 다음 구절에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사도 요한이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랑은 그냥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사랑이 아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특별한 사랑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대표하는, 이 요한일서 3:16장의 brother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요한복음3: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이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 구절을 묵상할때, 하나님의 사랑은 참 이해할수 없이 크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이 성경 구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되어 있지만 저는 이 세상이 하나님이 사랑하실만큼 아름답고 선하지 못한것으로 알고 있기때문에, 하나님이 그저 큰 관용과 이해할수 없는 사랑으로 우릴 사랑스럽게 보시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우리 딸 엘리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데요, 항상 엘리가 사랑스럽게 보이는건 아니예요. 말 안듣고 때쓰고, 특히 아침 7시면 정확하게 일어나서 엄만 손도 안대고 저만 깨워서 우유달라고 아침부터 놀아달라고 하면.. 저도 좀 그래요. 하지만 전 어디까지나 부족한 인간이고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떨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때쓰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정해놓으신 것만 골라서 하고, 아무것도 잘 모르면서 매일 세상것만 쫒아다니고, 이래도 하나님께선 이쁘고 사랑스럽게 보이실까요? 아니죠. 부모의 인간적인 지혜로도, 아이가 올바르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걱정되고 눈쌀이 찌푸려지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안목으로 우리의 철도없고 겁도 없는 모습을 보시면 그 안타까움과 탄식함이 얼마나 크실지 상상할수도 없습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하나님은 남편을 두고 다른 사람들과 바람을 피우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십니다. 남편을 배신하고 곁을 떠나 바람피는 부인을 몇번이나 부르고, 다시 추스려주고, 사랑해 주는 남편과 같은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어 있을때에 (심지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하게 반박하고 저버렸을 때에도)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배푸시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지금 저희가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이 돈/명예를 사랑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랑을 그리스어는 네가지로 표현합니다. 가족간의, 혈육간에 사랑을 표현한 스토르게, 친구간의 우정 혹은 애정을 표현한 필리아, 이성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에로스, 그리고 비이기적인 사랑, 원칙에 근거한 사랑을 표현한 아가페. 지금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 즉 아가페 사랑입니다. 좀전에 제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셔다“ 라고 하니까 왠지 어감이 이상하죠? 그냥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라고 하는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말이죠.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신것이 맞습니다. 저희가 아가페 사랑을 제일 쉽게 이해할수 있는 통로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통해서 인데요, (물론 이것도 불완전한 인간과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차이때문에 부족함이 많은 예제이긴 하지만)  제가 부모의 삶을 비추어 보아도 아가페 사랑은 선택하는것 입니다. 제가 만약 엘리가 나에게 사랑스러운 짓을 할때만, 내가 보기에 올바른 행동을 할때만 사랑해주고 이뻐했다면, 엘리는 아마도 두 얼굴을 가진 아빠가 많이 당황스러울것 입니다. 아마 아침마다 얜 도대체 누구야? 이랬겠죠. 하지만 내가 어렵고 힘들때에도 사랑을 배풀기로, 답답하고 안타까워도 참고 기다려주기로  부모들은 선택하는것 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교회에서, 목장에서나 사회에서 내가 대하기 힘들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들이 생기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에게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도와주세요”.  그런데 이제 그것이 약간은 잘못된 기도 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랑을 배푸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이것도 어느정도는 현대 사회 미디아에서의 팽배한 stereo type인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제 작은 경험을 보아도 그렇고, 성경에 나와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읽어도 아가페 사랑이란 그저 마냥 즐겁고,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르는 숭고한 희생과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아가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사랑이란 겁니다.
 
근데 제 말에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어디 가셔서 또 “재범형제가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고통받으면서 사랑하라고 명하신데” 이런식으로 얘기하시면 곤란합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고픈 요지는, 우리는 너무 많은 부분에서 사랑의 좋은 면, 아름다운 부분에만 집중을 하는데, 사랑을 하기 위해서, 특히 아가페 사랑과 같이 내리붓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분명히 요구된다는 겁니다.모든 부모님들은 이 말에 공감을 하리라 생각이 들고요,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께서는 더더욱 공감 하시리라 생각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이 명하신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할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의 희생할 것과 수고할 각오를 다지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으로 유명한데요, 그 장을 보면, 4절부터 10절까지 사랑에 대해 그 유명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말씀이 나오고, 11절에 보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라고 나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사랑을 대할때도 이와 같이 어린아이때와, 장성한 때가 다를수있겠구나 느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을 때에는 어렵고 힘든 일은 피해가고 내가 사랑 받는 것에만 집중하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다른 사람도 돌아볼줄 알고, 사랑을 주기 위해선 수고와 노력을 각오하고 마다하지 않는 것 처럼요. 목자 여러분들, 힘드시죠? 원래 그런 겁니다. 찬양팀 형제/자매분들, 힘드시죠? 원래 그런거에요. 그게 조건없이 주는 자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감당해 낼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시 쉽게 말하면, 우린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아가페적인 사랑의 수고와 희생을 감당해 낼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선 먼저 그 사랑이 의미하는 수고를 인정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더욱 순종할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올바른 자세인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감사한 것은요, 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계속 힘들고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저희가 계속 훈련하면 할수록, 성령님께 의지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쉬워지고 더욱 기뻐질수 있다는 겁니다. Letters from a skeptic 이라는 책에 보면, 인간의 속성에 대해 통찰력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The more we choose something, the harder it is to choose otherwise, until we finally are solidified – eternalized – in our decision. The momentum of our character becomes unstoppable. We create our character with our decisions, and our character, in turn, exercise more and more influence on the decisions we make.”

자, 우리가 모두 백지와 같은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칩시다. 우리가 하는 결정들 하나하나가 내 인격과 품성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줍니다. 마치 언덕위의 눈덩이를 조금씩 조금씩 일정한 방향으로 미는것 처럼요. 이런식으로 오랜 기간을 한 방식, 내 생각대로 결정을 내리다 보면, 그 결정들이 나 인격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리고, 그것들이 앞으로의 결정을 내리는데 더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거죠. 마치 눈덩이가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가속력이 점점 붙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내가 그 방향을 바꾸고 싶어도 바꿀수 없게 되는것 처럼 말이죠. 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에 이런 말이 있죠? 키운정이 낳은 정보다 크다. 사실, 뭐.. 제가 엘리를 낳진 않았죠. 엄마가 이런 표현을 써야 더 적절한것 같긴 하지만, 제가 엘리를 그간 키워왔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지금 제가 엘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처음 엘리를 병원에서 데려왔을때 보다 더 큽니다. 워낙 그간 엘리가 많이 자라고 이제 저와 의사소통도 하고 같이 놀기도 하고 뭐 이런 점들도 다 영향이 있긴 하겠습니다만, 제가 엘리에게 그간 돌봐주고 놀아주고 사랑해준 점에 있어서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는것 한가지는 엘리를 돌보고 사랑을 배푸는것이 이젠 제 인격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적응할 시간도 필요하고 제 의지로 하는 일들이 많았다면 이제는 그것이 나에게 숨쉬는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그것들이 나에게 기쁨을 주는 일로 승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사는것도 이와 똑같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아가페 사랑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배푸는것이 힘든 이유는, (그리고 어떤 때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것 만으로도 부담 만땅이죠), 우린 지금까지 평생을 비아가페적 사랑을 더 많이 해 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눈덩이가 구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가속력붙은 눈덩이를 막아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 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서 성령님의 은혜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전에 없던 부담이 생깁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내가 좀 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야 하는데. 내가 좀 더 참아야 하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눈덩이가 계속 나아가지 못하도록 브레이크를 걸어 주시는 거죠. 그리고 여기에 우리가 성령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으로 선택하고 결정해 나아가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이 눈덩이를 반대 방향으로 구를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물리에서도 관성(inertia)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이 때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 라는 거죠.  하지만, 이 방향조절을 하는 부분만 지나고 나면 여기에도 가속력이 붙습니다. 우리가 이 훈련을 계속하는동안 성령님께서는 그 가속력에 배를 가하셔서, 눈덩이가 계속 그 방향으로 더 빠르고 쉽게 굴러가게 하십니다. 내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을 배풀고, 나에게 실수한 사람에게도 너그럽게 용서해주고, 나와 상관없이 지내던 사람들의 어려움 때문에 고민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도 돌봐주고, 내 것들을 아낌없이 나누고,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도 행하도록 하실것입니다; 바로 원수도 사랑하고, 형제를 위해 목숨도 버릴수 있는 아가페 사랑을 말이죠.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여러분은 이 구절을 읽으시면서 어떠한 생각이 드시나요?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아멘! 이 저절로 나오시나요? 전 이 구절을 읽으면 부담이 많이 됩니다. 제가 집에서 혼자 읽을때도 부담 되는데 이 구절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자니 정말 부담 충만입니다. 물론 아직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방향조절이 되지 않아서 그런것이지요. 사랑하는 늘푸른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주님이 우리에게 최고로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아가페 사랑을 배풀라고 하신것은 그 사랑이 우리의 삶속에 가장 큰 축복이요, 상금이요, 기쁨이 되는줄 아시기에 명하신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사랑을 주는 입장 말고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요.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사랑하고, 필요할때, 어려울때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고 도와줄 사람들이 늘푸른교회 곳곳에 널려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그 얼마나 든든하고,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실만한 사랑이 아닙니까? 오늘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아가페 사랑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아갈때, 그것은 우리의 인격과 품성을 실천으로 옮긴만큼 그 방향으로 발전시킬 것입니다. 하루의 실천으로 내가 당장 하나님께서 말씀하신것처럼, 내 원수를 사랑할수는 없겠지만, 내가 그 사랑 배풀기를 쉬지않고 훈련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우리 인격 그 자체가 되어버릴것 입니다. 그리고 이 때가 이르면,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게 되겠지요. 

사랑하는 늘푸른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다 같이 마음을 모아서 이렇게 하나님앞에 사랑의 통로로 쓰임받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축복을 누리고 기뻐하는것도 좋지만,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받고 가야 주님께서 “잘 했다 착한 아들아”, “잘 했다 착한 딸아”하며 기뻐 맞아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함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더욱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에 충실한 형제/자매가 되어, 주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도 하나님 말씀의 열매를 풍성히 누리는, 아름다운 늘푸른교회, 아가페 사랑이 흘러가는 늘푸른교회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