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와 교회 공동체가 직면한 첫번 째 위기

사도행전 4장-안나실 목자

오늘은 이어 사도행전 4장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 늘푸른 교회에 주셨다고 믿어지는 것을 여러분들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크게 3부분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고난의 시작
 
  3장 후반부에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사건을 통해 베드로는 수 많은 백성들 앞에서 설교했고, 그 말씀 앞에 회개하고 돌아온 남자의 수만도 오 천 명에 달했습니다. 1-2 명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도 기뻐서 춤 출 지경인데 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베드로의 눈 앞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2010년 회개와 부흥이라는 주제로 열린 수양회에서의 기도회 장면을 그려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때 많게 잡아 50명이라고 해도 그것의 100배이니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현장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회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찔림을 받았지만 회개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더 악한 마음을 품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누군가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에게 고자질 했습니다. 아마 예수님과 똑 같이 행하는 자가 나타났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 걸음에 달려 와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들먹이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사도들이 전하는 것을 그들에게는 몹시 불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하나님의 일을 한 자들에게 부딪힌 첫 번째 고난이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교회에 대한 박해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하고 설교한 후 회심한 자들이 삼 천 명,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던 중에 만난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웠으며, 그 일을 계기로 설교하여 회개한 사람들이 오 천명. 이 엄청난 일을 해 낸 베드로와 요한이 갑자기 들이닥친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옥 중에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였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의 대가가 칭찬과 보상이 아니라 핍박과 고난이고, 또 내가 가진 것 드려 열심히 양을 돌보고 섬겼는데 돌아오는 것은 오해와 조롱과 비난이라 여겨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의 마음을 품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5천 명이 넘는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으니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서명 운동을 하고 항소장을 내면 혹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밤을 보내진 않았을까요?
  오늘날의 상황으로 바꾸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또 교회를 열심히 섬겼는데 사업이 망하고, 진로가 막히고, 질병을 앓게 되거나 재해로 인해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좀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여러분 주변에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당하는 고난을 볼 때 솔직히 어떤 마음이 듭니까?
갑작스럽게 체포된 베드로와 요한의 심경에 대해 성경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날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선 베드로의 모습으로 보아 그는 이날 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원망한 것으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며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하신 말씀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 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께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들이라 여겨집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 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그들은 너희가 내 이름을 믿는다고 해서 이런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요15:18-2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렇나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요16:1-3)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요21:18)
  이런 말씀들이 베드로의 마음에 울림이 되어 들려왔을 때 그는 자신의 고난이 바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며, 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런 고난을 당케 될 것을 아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 하라고, 근심하지 말고 평안 하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좀 더 일찍 자신이 주님과 함께 있을 때 깨닫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깨닫게 하시니 남은 삶 동안에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세상이 주님을 죽음으로 가두었으나 하나님께 다시 살리심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죽는 날까지 이것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겠노라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베드로와 요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감옥 안이 어둠이었을까요? 빛이었을까요? 지옥이었을까요? 천국이었을까요?

 2. 긴장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응

  한 편 성전의 솔로문의 행각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두 사도가 만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40 여 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도 걸어보지도 못했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어나 걷게 하고는 그렇게 하신 분이 바로 너희가 죽인 예수요, 그 분을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 들은 유대의 온 종교 지도자들과 관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얼마나 긴장했으면 그들을 일단 잡아 일단 옥에 가두는 일부터 했을까요? 그리고 그 밤에 그들은 어떤 상태로 지냈을까요? 아마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 땀이 흐르고,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았을까요?
 “분명 예수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그래서 더 이상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릴 자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에 모두 뿔뿔이 흩어졌는데…… 우리가 죽였던 바로 그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외치는 저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저러는 것인가? 혹시 정말로 예수란 자가 살아났을까?“ 이런 저런 생각하느라 아마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을 것입니다.
  5절~7절에 보니 다음 날 유대 사회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를 처결하는 산헤드린 공회가 열렸는데 모든 관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심지어는 대제사장의 가문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 많은 눈들이 두 사도들에게 집중되었고 모두 다 한 마디씩 내 뱉고 있는 그 현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긴장감이 흐르고, 두 사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예의주시하고 있는 그들 앞에 선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혹여 아주 잠깐이라도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고픈 생각으로 갈등하지는 않았을까요?
  드디어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절에 보니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이 귀에 들리는 순간 베드로와 요한이 했을 법한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들은 한 순간에 사라졌다고 보아야 맞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이 가장 나약해 지려고 하는 순간에 성령이 그들을 사로 잡았습니다. 보잘 것 없는 계집종의 한 마디 말에도 무너져 내렸던 소심한 베드로를 성령님은 공회의 자리를 가득 메운 수 많은 정치인들,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당당하게 하셨습니다. 본래 정규적인 성서 교육을 받지 못해 논리나 체계적으로 말할 줄 모르는 베드로의 입을 여셨습니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행한 죄악과 그들이 죽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사실과 바로 그 예수님이 40 여 년이나 걷지 못했던 이 병자를 낫게 하셨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는 일을 베드로와 요한 뿐 아니라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 앞에서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와 똑같이 사도들을 심문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종교 지도자들의 계획은 빗나갔습니다. 13-14절에 보니 종교 지도자들이 베드로가 원래 배우지 못한 그저 평범한 사람인줄로만 알았는데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도리어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 있게 막힘 없이 말하는 것과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있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그들을 추궁하거나 구속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더 당당하게 12절에“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선포하자 그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다시는 예수를 말하지 말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속이지도 말고, 병자를 낫게 하는 신적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왔다고 절대로 말 하지 말라” 명하고 놓아 주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은 19절에서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예수님의 정죄 심판 후 첫 케이스였으니 사도들은 몹시 긴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수 많은 관중이 지켜 보는 가운데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람들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강한 의식, 즉 하나님 존전 의식이 있었고, 진리와 비 진리 사이에서 전혀 갈등하지 않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결국 사도들은 놓임을 받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40년 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도, 수 많은 백성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를 증거할 수 있었던 것도, 옥에 갇혔을 때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기도와 찬양을 드릴 수 있었던 것도, 다음 날 수 많은 정치인들, 영향력 있는 고관 대작들,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기탄 없이 담대하고 힘 있게 예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 것, 이 모두가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베드로와 요한은 바울의 고백처럼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는’(고전1:27)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본문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정죄 심판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두 사도의 심문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상황은 비슷한데 판결은 정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빌라도는 무죄라고 판단했고, 배성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편에 서서 유죄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에 대해서 관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유죄라고 했고, 백성들은 무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심문을 하고 판결을 할 수 있는 힘과 권세를 가진 그들은 똑 같이 백성들의 동요가 두려워 그들의 생각과 판단대로 판결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똑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한 경우였지만 결과는 달랐습니다. 무엇의 차이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인도하심이 그 주된 이유이겠으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굳이 찾아 본다면 ‘대중의 힘’에 근거해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 대중이 어떤 믿음, 어떤 생각,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같은 일에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많은 사람들 속에는 분명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목청 높여 소리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앞장 서지는 못했지만 주변에서 완강하게 주장하니 ‘아마도 그렇겠지, 혹시, 그럼 그렇지, 그럴 수도 있을 거야’ 등의 추측을 난무케 하는 갖가지 언어로 부화뇌동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 또 그 모임이 와해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성령의 능력을 받아 더 강성해지고, 예수님처럼 병자를 낫게 하고, 말 못하고 배운 것 없다고 보여지는 어부였던 베드로가 선포하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이상하게도 자신들의 마음을 찌르는 칼과 같이 느껴져 예수님의 죽음도, 부활도, 성령 강림도, 제자들의 증인 사역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재판 때나 사도들의 재판 때에 참석한 백성은 똑 같았지만 그들의 믿음과 가치관은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를 경험한 백성들은 예수님 때처럼 ‘큰 소리’ 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회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공동체의 힘은 실로 놀랍습니다. 그 가운데 거짓 믿음을 갖고 있는 자가 많으면 공동체는 진리를 외면하고 자신들의 소욕을 따르는 어둠의 권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반면 그 공동체 속에 참 믿음-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가 많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동참할 뿐 아니라 그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을 누리게 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늘푸른 교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원망이 많은 자들이 많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는 자들, 그리고 성령 충만을 기대하며 기도하고 기다리는 기도의 사람들이 많습니까?

 3. 현명하게 대처한 교회 공동체
사도들의 석방! 오늘날의 경우라면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치유 사역을 한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위협’의 경고 차원에서 풀려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중국에서, 그리고 공산 국가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베드로의 설교로 교회 공동체의 크기는 엄청 커졌습니다. 뭔가 일을 꾸며도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만큼의 사이즈가 되었습니다.
  아마 그들 중에 누군가는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따지고 보면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이니 이 참에 유대 정부를 상대로 무죄 항소와 명예 훼손으로 고발하고 대항하자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누군가는 이 번에는 무사히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 났지만 그들은 예수님도 처형시킬 수 있었던 자들이니 만약 다음에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면 그 때는 사도들뿐 아니라 우리까지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을 것이라 불안해 했을 지도 모릅니다. 또 목숨이 붙어 있어야 전도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을 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임은 당분간 안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지라도 우리라면 분명 누군가가 이런 목소리를 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석방되어 돌아온 두 사도가 자신들에게 위협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공동체에 고했을 때 그들은 분개하기 보다 24절에 보니 도리어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가로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대 주재’ 는 헬라어로 ‘데스포테스’ 인데 당시 노예가 왕이나 주인을 부를 때 사용하던 존칭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 주재’라고 고백한 것은 이 모든 일련의 사건과 상황들이 어쩌다 발생한 것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만유의 주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즉각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정부와 종교 지도자들을 상대로 싸우지도 않았고,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29-30)
  그들은 위험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더 담대하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 이름으로 성령의 권능을 행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존귀하였을까요? 얼마든지 하나님을 향하여 분개하고 얼굴색을 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겠노라 마음을 굳게 하고 공동체를 떠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기도했으니 아마 하나님께서도 감동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시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31)
  한자어 ‘위기’는 위험할 ‘위’와 기회 ‘기’ 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사도들이 직면한 위험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었고, 복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위기와 고난을 통해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영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처음 베드로의 설교로 회심하여 형성된 교회 공동체에서는 2장 44절에서 ‘함께 있어’ 물건을 통용하던 단계에서 4장 32절에서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할 뿐 아니라 제 재물을 조금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 단계로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늘푸른 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우리 늘푸른 교회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을 더해 가는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아니 갈망합니다. 한 순간의 성령 체험으로 만족해 하지 않고 초대 교회 공동체처럼 매 순간마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는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역동적인 교회를 꿈 꾸어 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영광만이 나타나기를 갈망하여 간구하는 영이 살아 숨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함께 더욱 기도합시다. 더욱 성령의 능력을 사모합시다. 더욱 은혜의 자리에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