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는 교회

디모데전서1:3-7

오늘은 바울 사도께서 믿음으로 낳은 아들 청년 사역자 디모데에게 주신 교훈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디모데에게 강조한 것은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진실한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변론을 피하고 사랑으로 서로 섬길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바울의 가르침을 본받아 무익한 논쟁보다 서로 감싸주며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먼저 5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사랑을 강조합니다. 사랑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다음 몇 구절을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13:1-2).

사랑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교회, 사랑이 식어진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장 추합니다. 아무리 바른 말을 하더라도 그 중심에 사랑이 없다면 주님 보실 때 위선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가장 많이 말하는 목사, 목자, 장로, 집사 순으로 위선자가 많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들은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사랑을 가장 많이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수고도 더 해야죠. 그래야 본전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옥한음 목사님이 교회 이름을 ‘사랑의 교회’로 지을 때 많이 망서렸다고 합니다. ‘사랑의 교회’라고 하면 적어도 다른 교회보다 더 사랑이 넘쳐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다른 교회 수준으로 사랑하는 교회면 이름에 부끄럽고 또 사랑이 부족하게 되면 비난을 받게 될 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랑의 교회라고 한 것은 교회는 사랑이 가장 중요하고 또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길 염원했기 때문이랍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가 사랑을 많이 말하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모임보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도 사실 사랑을 많이 말하는 것에 비해 볼 때 본전이겠죠.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예수님이 핵심적인 가르침이 또한 사랑이기 때문에 교회가 사랑이 없다면 교회가 아닌 게 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된 표징을 하나만 든다면 사랑을 베푸는 삶이라고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닐 겁니다. 사랑을 베풀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랑이라고 해서 다 사랑이 아니고 깨끗한 마음과 바른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그런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이기적으로 왜곡된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는 부모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에게 의지하며 힘들게 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배하려는 연인들도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나친 희생을 강조하는 목사도 있고, 대가 없는 봉사만 기대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더러운 마음에서 위선적인 사랑도 있습니다. 고아원 운영하면서 고아들을 학대하고 정부지원금으로 빼돌리다 걸린 원장이 있습니다. 바지 사장을 내세워 불법유흥업소를 운영하다 걸린 경찰도 있습니다. 사회복지업무를 담당하면서 공금을 빼돌리다 걸린 공무원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나쁜 짓을 하기 때문에 더 비난을 받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자 속은 부정한 이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선악을 분별하는 기능을 하며 자신에게 검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갓난 아이가 길 가에 버려진 것을 보고 외면하고 돌아서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갓난 아기도 한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에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 양심 때문에 우리는 자기 인격 수준보다 훨씬 더 잘하게 되고 사랑을 베풀게 됩니다. 가끔 차를 차고 가다가 길거리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칠 때, 내가 사랑을 말하면서 저 사람들을 외면하고 가는 건 잘못인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건네 주기도 합니다.

끝으로 교회에서 사랑을 말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어떻게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13장 4-7절에는 사랑의 다양한 측면이 설명되어있습니다. 바울은 오래 참아 주는 것, 친절하게 대하는 것, 시기하지 않는 것, 자랑하지 않는 것, 잘난 체 하지 않는 것, 무례하지 않는 것,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 화내지 않는 것, 나쁘게 하지 않는 것, 믿어주는 것 등이 모두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당시에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보다는 변두리로 밀려난 인생들이 더 많았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까지는 가난한 서민들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귀족과 부자들도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드물긴 해도 세상적 기준으로 성공하고 잘 사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시작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곳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교인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시기심도 납니다. 가진 게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시기하지도 말고 잘난척 하지도 말도록 가르치라고 한 겁니다. 그게 남을 위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인수가 적고, 그런 중에도 대학생이 많아 아직은 서로 크게 수준차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런 중에도 장년부에선 남편, 혹은 아내의 수입이나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함께 어울리는 데 다소 불편함을 느낄 지 모릅니다. 보통 생활방식의 차이는 인격수준이 아니라 소득수준에 따라 달라집니다. 소득이 비슷한 사람들이 비슷한 생활방식, 혹은 문화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소득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편합니다. 세상에선 이런 기준으로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렇게 하면 주님을 몸을 세워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소득이 높은 교인은 낮은 교인들을 배려해주고 낮은 교인은 높은 교인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함께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배려하며 살려면 무엇보다 교인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갓난 아기는 수준이 맞지 않습니다. 아기를 키우는 동안 고상하게 문화를 즐기며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든 수준이 맞지 않아 함께 살 수 없다고 자기 자식을 멀리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서로 어울리며 사는 게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교회가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우리 늘푸른교회만 사랑의 수고와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사랑의 다양한 면을 말했는데,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몸의 수고와 함께 물질의 나눔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며 예루살렘교회 감독이었던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해습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2:15-17)

바울도 진실한 믿음에서 사랑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있는데 사랑은 없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수고가 따릅니다. 손해를 봐야 합니다.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는 것도 나중에 어떤 보상을 받게 될지라도 당장은 손해 보는 것이죠. 자식을 낳아 대학까지 보내는데 한국에선 3억 전후가 든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식 낳고 키우잖습니까?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는 사랑의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부모, 형/오빠, 누나/언니가 자식과 동생들을 위해 수고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그런 위치에 있는 저와 목자들은 당연히 감당할 수고입니다.

어려운 가족을 돕는 것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교회도 가족이면 교인들이 서로 돕는 것 역시 사랑의 다양한 측면 중에 하나입니다. 신명기15장 10,11절을 보면, 하나님은 가난한 형제에게 반드시 구제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을 공경하고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교회 안 밖에 어려운 사람을 보면 힘껏 도와주세요. 여러분과 자녀들이 복 받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