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1:18-31

오늘은 “십자가의 도”를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십자가의 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도를 거리끼는 것(a stumbling block)으로 생각하며 표적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십자가의 도를 수준 낮은 미련한 소리 쯤으로 취급하며 인간의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1. 십자가의 도
그럼 먼저 ‘십자가의 도’가 뭔지 알아보겠습니다. NIV 성경에는 십자가의 도가 “the message of the cross”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1장 2,16절에서 말하는 “복음(the gospel)”과 같은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5절을 보면 다윗의 혈통에서 출생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후에 다시 부활했습니다. 이 부활로 인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게 증명되었고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 세상에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할 사람들을 불러서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게 만드십니다. 나사렛 청년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것은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구세주 메시야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미련한 이야기 쯤으로 들리는 이 십자가의 도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깨닫고 보니 지성인들이 무식한 소리로 여기는 십자가의 대속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죄인이 구원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죽지 않고도 구원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라면 그 죽음은 만용이나 과용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참 딱한 분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걸 놔 두고 독생자 아들을 괜히 죽였다는 거 아닙니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적어도 이 방법 밖엔 없을 때 죽음은 정당하고도 값진 것입니다. 자식을 살릴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는데 아버지가 자식을 구한답시고 죽었다면 그건 감동이 아니라 비난받을 일입니다. 그건 생명을 경시한 행동입니다. 생명을 구할 때만 생명을 버리는 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석금으로 해결할 수 있거나, 권력으로 사면할 수 있거나, 사회봉사로 해결될 수 있었다면 단언컨데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죽기 직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하신 걸 기억하십니까? 예수님도 죽는 게 좋아서, 요즘 철 없는 애들이 소위 “죽음놀이”라는 걸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게 아닙니다.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 대신 죽는 것 밖엔 없었기에, 생명을 생명으로 대신해야 했기에 예수님이 죽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그 다음 십자가의 도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의 도,즉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것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죽여 놓고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이걸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고 말하는가 하는 겁니다. 사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제일 혈안이 되었던 건 사단이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나타나자 바싹 긴장했습니다. 하나님께 반역하다 세상으로 쫓겨나 죄인들 위에 왕노릇하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요한일서3장 8절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단도 예수님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고 짐작했던 듯합니다. 마태복음8장 29절을 보면,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멸망시킬 지 그건 몰랐습니다.

사단의 첫번째 전략은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미끼로 예수를 자기 권세 아래 두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략은 사람들을 통해 이미 효과가 검증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전부 여기에 넘어가서 사단의 종노릇하는 중이었습니다. 사단은 인간인 예수님에게도 이 미끼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넘어가지 않은 겁니다. 그러자 사단은 이제 남은 건 하나 죽이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지키기에 여념없는 제사장과 서기관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원해서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사단은 자기가 이기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죽은 자가 뭘하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뭔가하면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원래 죽음의 권세는 죄인에게만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기에 한 번 죽으면 스스로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본래 자기 죄가 없이 죽었습니다. 따라서 사망의 권세가 예수를 계속 죽음에 가둬둘 수 있는 권한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사단에게 니가 죄없는 예수를 죽였는데 그 죽음으로 인간의 죄값을 대신하겠다고 선언해버렸습니다.

사단이 하나님께 물고 늘어진 건 공의였습니다. 자신이 반란 죄로 처벌을 받은 것처럼 인간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처벌을 해야한다고 우겼습니다. 하나님도 이 논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주가 이랬다 저랬다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사단의 주장대로 자신은 처벌하고 인간은 무조건 봐준다면 이건 하나님이 불의한 것이라고 참소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인간도 반드시 처벌한다고 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던 것인데… 사단이 그만 무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인 대가로 그만 인간의 죄값을 물고 늘어질 수 없게 된 겁니다. 예수를 죽일 때만해도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바로 이게 하나님의 수가 사단보다 높았다는 겁니다.

3. 구원으로의 초청
이렇게 하나님은 죄로 멸망할 인간이 구원얻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으시고 이제 사람들을 불러서 구원얻도록 하고 있습니다. 24,27절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18절에 “구원을 얻는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24절을 보면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those whom God has called) 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내가 믿고 안 믿는 것도 내가 안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 나온 것도 내가 맘 먹고 나온 것이고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내가 안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예수 믿게 불렀다고 말합니다. 죽어라고 교회가는 걸 거부하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게 뭡니까” 멸망해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인 나를 하나님이 예수믿어 구원얻으라고 불러 주신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죄로 죽어 잠들어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잠든 나를 불러 깨워서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을 믿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멸망할 사람에겐 미련하게 보이고 말도 안되고 그래서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얻는 것이냐? 다른 종교로도 구원얻을 수 있는 게 아니냐? 지혜있는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할 때 아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얻을 수 있다고 예수님 아니면 안된다고 이런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엔 성경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보다 세상의 학문과 철학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이기는 현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18세기 문예부흥 이후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회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이성이 강조되고 과학적 지식이 발달하면서 역사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계속되고 있는 진화의 정점에 있는 동물일 뿐입니다. 더 이상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신은 없습니다.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 갈 뿐입니다. 죽은 후에 갈 천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천국은 다름 아닌 우리가 만들어갈 지상의 낙원일 뿐입니다. 예수는 다른 인간보다 신에 대한 의식으로 충만하여 본받을 만한 사람이긴 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이란 건 가당치도 않습니다.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건 독선적이고 무식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성경에 기록된 예수에 대한 증거보다 과학과 철학의 주장을 더 신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성경의 교리를 공부하고 붙드는 것보다 감성적 만족을 주는 메시지에 열광하며 몰려듭니다. 전통적 복음을 설교하는 목사보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목사가 인기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도 우리 시대에 맞게 구원의 방법을 바꿨을까요?

꼭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도 구원 얻을 길을 여기 저기에 만드신 것입니까? 가톨릭교회는 예수만 아니라도 구원얻을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무신론자라도 양심적으로 살고 선행을 하면 구원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후회하던 사단은 이제 와선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도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는 건 예수님이 죽을 필요가 없었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을 죽게 하신 하나님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는 단지 엠블램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없을 때 어떤 결과가 올 지 생각해보면 십자가의 도가 구원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죄값을 치루지 않았기에 사망의 권세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미 지은 죄는 어쩌고 앞으로 잘하겠다고 해서 될 일입니까? 새출발도 과거를 정리해야 가능한 게 아닙니까? 감옥에 사형수들끼리 모여서 앞으로 잘하면 된다고 하는 격입니다. 누가 형을 집행하는데 죄수끼리 OK 싸인을 냅니까?

인간이 구원얻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도 밖엔 없습니다. 그래서 이게 인간에게 유일한 복음인 것입니다. 이젠 여러분이 이 십자가의 도를 붙잡고 있는지 살펴보길 바랍니다. 망망대해에서 구명보트를 붙잡고 있는 심정으로 평생동안 이 십자가의 도를 붙잡고 살기 바랍니다. 만일 아직 아니라면 지금 붙잡으세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밧줄에 메달린 보트를 던져줄 때 필사적으로 붙잡는게 본능입니다. 살려는 본능을 거부하지 마세요. 지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주저하지말고 하나님께 고백하세요.

하나님 앞에선 흔들리는 100번의 감정보다 단 한번의 의지적인 고백이 더 효력을 발휘할 겁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마음으로 믿을 때 의롭다함을 얻고 입으로 고백할 때 구원의 보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은 다 몰라도 2000년 동안 발전해온 기독교 신학은 다 몰라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시며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 부활하셨다는 말은 이해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IQ와 상관없이 학력과 상관 없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