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누구기에 이런 일이?

마가5:35-41

지난 주일 ‘믿음은 어떻게 생겨나는가?’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고 했습니다. 언제 이런 믿음을 얻게 될 지 모르니까 실망하지 말고 계속 복음서를 읽으며 교회 나와 설교를 듣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어지는 날이 올 겁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어 바다를 잠잠케 하셨다는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도대체 누군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 외에도 마태복음8장과 누가복음8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8:24-27, 눅8:23-25). 세 복음서 기자들이 모두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이 사건에 주목한 것은 예수가 도대체 누군가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가 도대체 누군가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쉽게 믿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출신은 보잘 것이 없었더라도, 그가 하는 말이나 예지력이 보통 사람과 달리 특별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랍비나 선지자 쯤으로 생각하고 따라다녔습니다. 12제자들도 처음엔 예수를 랍비라고 생각하고 따랐습니다. 그 당시 랍비는 율법교사로 제자들을 받아 가르치며 살았습니다. 옛날 서당의 훈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랍비들은 자기 권위로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랍비들은 자기 제자들에게 구약의 율법과 선지서들을 읽고 그 뜻을 해석해주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고 다니는 예수를 갈릴리에서 온 떠돌이 랍비 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랍비에겐 누구나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에게선 보통 랍비들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먼저 그의 가르침이 보통 랍비들에게 볼 없는 위엄과 권세를 느꼈습니다(마1:22). 그것은 예수의 말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방식에 있어서도 보통 랍비 처럼 단순한 해석자가 아니라 예수는 마치 자신이 율법을 선언하는 권세를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런 어법으로 말씀했습니다. 당시에 어떤 랍비도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랍비는 전달자일 뿐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 권위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수의 말씀에서 위엄과 권세를 느낀다고 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실제로 예수와 함께 한 제자들도 처음부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 2년 후반기에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예수는 귀신을 쫓아내고 문둥병, 중풍병, 손 마른 사람 등 많은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제자들은 그 때마다 현장에서 목격했을 것입니다. 전해 듣는 것과 현장에서 목격하고 받는 감명은 크게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어 바다위의 풍랑을 잠재우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는 입장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더라도 그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할 때 받는 그런 감동과 경외감 같은 것은 없습니다. 현장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면 예수님을 전혀 다르게 보지 않겠습니까? 거친 풍랑으로 바닷물이 넘쳐 배에 가득해 배가 침몰할 위험한 상황입니다. 제자들 사이에 죽음의 공포가 밀려와 동요가 일어납니다. 그 때 주무시던 예수님이 일어나 바람을 꾸짖어 풍랑이 소멸되고 위기를 넘깁니다. 배 안에 있던 제자들을 비로소 안도의 숨을 몰아쉽니다. 그 때 예수님을 바라보던 제자들은 저마다 속으로 “예수가 뉘기에 바람과 바라도 순종하는 것인가?”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말만 듣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만 골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본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며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는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자기를 믿으면 죽어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허황된 말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행하는 표적들이었습니다. 귀신을 몰아내고, 병자들을 고치고, 바람을 잠재우고, 바다 위를 걸어오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마침내는 자신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있었고 그걸 현장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역사적 현장에서 표적을 목격하는 것이 믿음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표적을 본다고 믿음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장에서 목격했어도 예수를 부인하고 믿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누군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가 누구길레 세상 모든 사람이 할 수 없는 그런 이적을 일으켰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이적을 행했다면 그는 인간 이상의 존재라고 봐야 합니다. 표적이 거짓이라고 입증할 수 없다면 예수를 신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정직한 태도입니다.

고대 경영대학 김인수 교수의 간증문을 인터넷에서 읽어봤습니다. 그는 기독교 배경이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친구 따라 근처 교회를 나가기 시작해 5학년까지 다니다 그만 뒀답니다. 체신고등학교에 들어가 1,2학년 때 서울에서 고학하면서 외롭고 고생스런 마음을 달래려 다시 교회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합리적 사고에 눈 뜨기 시작한 그에게 신앙이 미신스럽고 광신적으로 보이고 교회의 부조리와 교인들의 위선에 거부감을 느껴 다시 그만 두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치 못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말단 공무윈이 되었습니다. 그 때가 1960년 이었는데, 같은 직장에 다니는 친구가 영어로 성경공부하는 대학생 모임에 가보자고 권했습니다. 몇 번 거절하다가 영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에 나갔는데, 15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유창한 영어로 토의하며 성경을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고 열심히 나가 영어를 공부했답니다. 그 모임이 나중에 조이선교회가 되었답니다.

영어를 공부하려고 열심히 나가긴 했지만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설교를 들을 때,  “그럴듯한 이야기야, 그러나 저런 것은 마음이 약하고 자기문제를 처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 나 같이 의지가 강하고 자기 일을 분명히 처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답니다. 그런데 회원들 중 세 사람이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속으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 세 사람중의 하나 (김수지)가 지금의 그의 아내가 되었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그의 마음 속에 의문의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명문대학을 다니며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대부분의 회원들이 결코 어리석고 심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바보스럽게 예수를 믿을까?” 그들은 그가 옛날 교회에서 보았던 위선적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가치가 분명히 바르게 서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신앙과 삶은 청년 김인수가 기독교에 대해 다시 알아보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 친구들이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을 모르고 살아왔는지를 분명히 정리해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는 누구에게 물어보기가 싫었답니다. 스스로 기독교의 진리가 담겼다는 성경을 통해 직접 찾아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때 그는 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시간 사이의 휴식시간에도 성경을 읽었답니다. “하나님, 정말 당신이 계십니까? 일단 당신이 계신다고 가정을 하고 성경을 읽겠습니다. 참으로 당신이 계시면 내게 나타나 주십시요”라고 기도하고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예전 주일학교 다닐 때에도 성경을 읽어보려 한 적이 있었지만, 한번도 그 지루한 마태복음 1장을 넘겨 본 적이 없었답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생소한 긴 이름들의 나열은 성경읽기를 그만두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훈련소에서 마태복음 1장을 끝내고 2장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읽기가 거듭되면서 점점 신앙적 부분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어려웠던 것 중 하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었답니다. 오랫동안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의 상대적 개념에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으로 보게 되자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어려웠던 것은 2천년전 유대 땅에서 태어난 목수의 아들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이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났듯이 나타나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3개월 만에 신약성경을 처음으로 독파했습니다. 두 번째는 2개월 만에 읽었습니다. 첫 1년 반 동안에 아마 30번 정도는 읽은 것으로 기억한답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8일만에 읽어내기도 했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천천히 공부를 하면 새로 배우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이 비슷하기 때문에 머리에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는데 비해, 단시일 내에 엄청나게 읽게 되니 공부가 많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윤리도덕적 가르침에 마음이 끌려 그런 구절에 밑줄을 쳤습니다. 여러번 읽으면서 물음표를 쳤던 부분에 대한 해답을 다른 구절에서 발견하고 물음표를 지워나갔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받지 않고 혼자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깨닫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인수 교수는 누가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혼자 성경을 읽다가 그 말씀의 약속이 사실임을 믿고 받아드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접하는자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선언한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같이, 그는 첫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둘째 하나님을 자기 중심에 받아 드렸습니다.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그는 기적을 보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말씀의 약속을 받아드려서 믿게 된 것을 감사한답니다. 왜냐하면 믿음에 의심이 생길 때마다 내게 확신 주었던 성경말씀으로 돌아가서 그 구절을 읽음으로써 그 때의 감격을 다시 재생시킬 수 있고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다시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만약 기적을 보고 믿게 되었다면 그 기적을 다시 재생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탄이 만약에 “그 기적은 사실이 아니라 환상이었다고” 속삭인다면 방어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Time지는 개신교회에서 교황을 선출한다면 당연히 존 스토트 목사가 되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John R.W. Stott 목사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에서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주장이 진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말에 따르면, 기독교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주장은 의외로  '자기 중심성'이 강했습니다. 겸손을 가장 큰 미덕으로 내세우며 겸손하신 분이 자기 중심적인 것은 모순이며 얼른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다   
    -  나를 본 것은 하나님은 본 것이다.
    -  나는 구약 성경의 예언을 성취했다.
    -  나는하나님의 아들이다. 생명의 떡이요 포도나무이다.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런 주장은 참이거나 거짓 중의 하나인데, 스토트 목사님 생각에, 성경적 사실로 볼 때 참인 것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토트목사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유는 예수님의 주장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 영문과 교수이자 시인, 문학비평가요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C.S. 루이스 역시 지독한 회의론자였다가 예수를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담은 전기 <루이스와 잭>(조지 세이어 지음/홍종락 옮김/홍성사) 을 보면, 철저하게 무신론자였던 C.S. 루이스가 다시 기독교로 회심하는 과정은 7년여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그는 같은 학교의 동료였던 고전학 교수 웰든의 고백을 듣고 충격을 받았답니다. 루이스가 아는 웰든은 '모든 신조와 단정적인 주장을 비웃는 냉소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웰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는 것을 듣고 그는 믿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루이스는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미치광이거나 거짓말쟁이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국 루이스는 예수의 말을 부정할 근거를 찾지 못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루이스는 회심 후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회심한 그 해부터 기독교 신앙의 전도자가 되었고 뛰어난 기독교 소설가와 대중 신학자로 여생을 마쳤습니다.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안 믿어지는 걸 억지로 믿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면 믿겠다는 마음이 있는 분들은 먼저 예수가 누군가부터 살펴봐야 할 겁니다. 생명이 걸려 있고 영생이 걸려 있는 문제이나 남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는 말에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청년 김인수처럼 직접 복음서를 수십번이라도 읽어보면 어떻겠습니까? 읽으면서 예수가 무엇을 말하는지, 예수가 거짓말쟁이 사기꾼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직접 한 번 대면해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