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테스트

창21:1-19

오늘은 이삭과 관련된 사건을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번에 제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하여 부모와 고향을 떠난 결정적 동기는 아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구약성경은 언약의 족보가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나 부르다가 아브라함을 부른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이 계승되는 노아의 장자 셈의 9대 후손이었습니다.

창세기 11장 10절 이하에 셈의 후손들의 족보가 나옵니다. 26절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아브람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는데 나이 순서라면 당연히 아브람이 장자가 되겠죠, 그러나 중요도 순서에 따라 아브람이 장자가 아님에도 제일 먼저 기록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특히 나홀은 하란의 딸 밀가와 결혼했는데, 이걸 보면 하란이 나홀의 동생이 아니라 형일 가능성이 높고, 롯도 하란의 아들임을 고려하면 하란은 아브람보다 형일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지난 번에 데라와 아브라함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아버지 데라가 아직 살아있을 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났다고 봐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았다고 볼 때 그런 것인데, 만일 아브람이 장자가 아니고 하란이 장자이고 아브라함은 그 후 나중에 태어났다면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은 직후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기록 자료만 가지고는 어느 것이 맞는지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아브람이 장손이든 아니든 다른 형제들은 아들이든 딸이든 자식을 낳았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사라가 몸종을 남편에게 들여보낸 걸 생각하면 아브라함 부부는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겐 자식 낳지 못하는 것이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부부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고 했으니 만사 불구하고 하나님을 따라나서는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무슨 대단한 믿음으로 결단해서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간 건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지난 주에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들어와 애굽에 내려갔다가 많은 재물을 얻어 다시 헤브론으로 올라가 살고 있을 때 사해 동편 쪽에서 엘람 왕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사해주변 다섯 연합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사해연합군이 패하여 소돔에 살던 롯이 그돌라오엘 동맹군에 사로잡혀갔을 때 아브람이 가병을 데리고 최북단 단과 호바까지 쫓아가서 롯을 구출해온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위해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은 롯의 구출 사건이 있은 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롯의 구출 사건으로 아브라함이 예전과 달리 믿음의 사람답다고 생각할 즈음에 실망스런 일이 생겼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해 조바심을 내던 사라가 자기 몸종 애굽 여인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그 언약의 후손을 얻게 될 것으로 생각한 듯 보입니다. 몸종 하갈은 아들을 낳자 주인 사라를 무시했습니다. 사라는 이런 하갈 때문에 속이 상해 남편을 원망했습니다. 아내의 요청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몸종을 취해 아들을 낳은 것은 잘 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라를 안심시키고 좀 더 기다렸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사라의 몸종인 애굽 여인의 몸을 통해 언약의 후손을 보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하갈을 취한 것은 아브라함의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까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애굽 여인 하갈로부터 자식을 본 것으로 가정불화가 생기고 나중에 민족간의 갈등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믿음과 관련된 결정적 사건은 이삭의 출생과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다시 아브라함을 찾았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이 지난 후입니다. 그 중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1) 하갈과 이스마엘의 일로 아브라함을 책망하신 듯 보입니다.

책망은 하시더라도 아브라함에 대한 뜻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고, 사라에게는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이라며 둘 다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상대로 말씀하셨는데 여기선 사라에 대해서도 직접 언급하셨습니다. 그 동안 이름없는 조연의 역할에 불과했던 사라가 이젠 여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사라 없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수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열국의 아비와 열국의 어미가 된다는 말에 아브라함은 자신과 아내의 나이를 생각하며 웃었습니다. 100세나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아내도 90세니 이 나이에 무슨 자식을 낳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통해 언약의 후손이 태어날 것에 대해 사실 믿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몇 개월 후에 하나님이 다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소돔성에 대한 원성이 하늘에 닿아 시종 드는 두 천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실 확인 차 내려오셨다가 먼저 아브라함을 찾은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다시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라가 내년 이 때쯤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확인해주셨습니다. 이 때 90세인 사라는 이미 생리도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못하는 아브라함 부부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시며 틀림없이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뭔들 못하시랴 그렇게 말하기는 쉬워도 불가능한 일을 끝까지 믿기는 어렵습니다.  이젠 안 되는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체념하게 되죠. 아브라함 역시 자기 나이나 아내 나이를 생각할 때 이제 아들을 낳는 것은 틀렸다고 오랜 소망을 접은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체나이를 뛰어 넘어 하나님이 아들을 낳게 해주신다는 것까진 믿지 못한 것 같습니다. 86세 이전에 아브라함은 “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되리라(창15:4)”고 하신 여호와를 믿어 의롭다고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믿지 못했습니다. 생리도 끝난 아내가 아들을 낳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겠죠.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생리적으로 자식을 낳을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들을 낳게 하신 것 같습니다.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이제 다 틀렸다고 포기한 후 성사될 때 하나님이 해주셨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스카우트 되어 가면 하나님이 직장을 얻게 해주셨다고 생각하지 않겠죠. 자기 실력이 좋아서 그렇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성에게 인기 많고 골라서 결혼하면 하나님이 인도해주셨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잘 나가서 나쁠 건 없지만 그것만으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만사가 형통하면 믿음에는 좋은 게 아닙니다. 막지막에 가서 풀리는 게 믿음에는 더 도움이 됩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어야 더 좋습니다.

소돔이 멸망하는 사건이 있은 직후 헤브론에 살던 아브라함은 헤브론 남서 지역에 위치한 그랄로 이주했습니다. 그랄 지역은 당시 블레셋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초지나 농경지를 찾아 그랄로 내려 간 것 같습니다. 애굽에서 그런 것처럼 아브라함음 그랄 사람들에게도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소개했는데, 사라의 미모를 탐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 사라를 데려가는 일이 또 생겼습니다. 당시 사라는 90세 였는데도 젊은 여자들을 놔두고 사라를 탐낸 걸 보면 사라의 미모는 대단했나 봅니다. 애굽에서 교훈을 얻었을 법 한데, 당시 상황에선 괜찮은 안전책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이 때도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 사라를 취하지 못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끝으로 이삭의 출생과 번제를 드리는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끝까지 믿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말을 처음 들을 때는 어이가 없어서 웃던 사라가 아들을 낳고는 기뻐서 웃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들 낳지 못해 몸종을 남편의 침실로 들게 할 때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을 낳은 하갈이 안하 무인으로 굴 때는 후회도 막심했을 것입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고 드디어 자기 몸에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사라에게 세상에 이삭 밖엔 없었을 것입니다.

세월이 또 흘러 이삭이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려는 것이었습니다(창22:1). 다음 날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해 두 시종과 함께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삼일 째 되는 날 모리아산이 멀리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시종에겐 거기 머물게 하고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에게 지워 자기는 칼과 불을 들고 모리아산 정상을 향해 나갔습니다. 이 때 영문을 모르는 이삭은 아버지에게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떤 했을지 짐작도 안됩니다.

아들 이삭과 함께 나무를 펼쳐놓고 번제단을 만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결박해 단 나무 위에 놓고 제물을 잡듯 칼을 들었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는 걸 보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천사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느 수준인지 보시려는 테스트였지 정말 이삭으로 번제를 드리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테스트인줄 모르는 아브라함에겐 모든 게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은 하나님님이 죽은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순종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이 있다고 해도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순종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곳간에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배풀어준다고 하시는데도 아들을 바치는 것은 그만두고 십일조 드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잖습니까?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일어난 일 대부분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지만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순종만큼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을 무겁게 받들었는지 보여줍니다.

이 사건을 놓고 윤리나 도적적으로 접근하는 건 부질없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도 아닌 아브라함에게 단 헌 번 시험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을 통해 행함으로 그 믿음을 온전케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관점에서 볼 때 이삭의 순종은 어린양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 속에서 믿음을 배워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까지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일에 있어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일, 아들 이삭을 위해 며느리를 구하는 일, 후처 그두라를 얻어 여섯 자식을 더 낳은 일 등이 있는데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받았을 때 한 순간의 고백으로 이뤄집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를 통해 진실함 마음에서 나온 고백이면 반복할 필요 없이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것은 세상 떠날 때까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치며 계속됩니다. 우리 각자는 지금 믿음의 어느 단계를 통과하고 있을 것입니다. 멋지게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잘 하다 이번엔 넘어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과정일 뿐 끝은 아닙니다.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도 자고 하지도 말고 계속 믿음의 여행을 하면서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을 따라가는데 더 큰 믿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 더 큰 믿음을 구하지 말고 이미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살기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아브라함같이 믿음으로 양보하고 죽을 위험에도 책임을 다하고 아들까지 포기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도 아니니 아브라함 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인생을 통해 믿음을 배우고 또 훈련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