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졌을 때가 일어설 기회다

누가22:54-65

오늘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기회가 된다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베드로 사도께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13장 36-38절을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는 내용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묻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가 지금은 나를 따라 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내가 지금은 어찌 따를 수 없다고 하십니까? 주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이렇게 각오를 내비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사실을 말하자면, 베드로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장면이 바뀌어 대제사장 관사의 뜰에서 예수님이 심문 받습니다. 여기에 베드로오 다른 제자도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는 다른 제자의 도움으로 대제사장의 관사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 하녀 하나가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라고 일러바치자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릅니다”라고 부인합니다. 그 후로도 베드로는 두 번이나 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시점은 예수님과 3년을 동거동락한 후입니다. 그 동안 베드로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이적과 표적들도 보았고,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백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바다 위로 뛰어 들어 걷기도 했습니다. 제자중에서도 베드로는 믿음과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장담까지 한 직후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새벽 닭울음 소리를 듣고 세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 통곡하며 슬프게 울었다고 합니다. 그 때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얼마나 허망하고 수치스런 순간입니까? 절망과 좌절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죽더라도 주님을 따를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쉽게 주님을 모른다고 할 줄은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약한 존재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 밑에서 제자훈련 몇 년 받았다고 해서 다 된 게 아닙니다.

우리보다 한 세기 전 남아프리카 출신 기도의 사람이었던 Andrew Murray(1828-1917)는 Absolute Surrender 라는 책에서 베드로의 실패를 보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이 들고 위로가 된다고 쓰고 있습니다. 왜냐면 부족함과 실패로 가득했던 베드로의 성품을 볼 때,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를 죽음을 넘어까지 주님을 따라간 제자로 다시 세워주신 것을 볼 때 우리도 베드로 처럼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가 세번 부인하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미리 예방해주실 수도 있었지만 그냥 놔 두셨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하고 부끄러움에 빠져 절망할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일으켜 세워주시고 또 양을 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은혜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실패하고 좌절하며 낮아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인간은 교만하고 높아지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이렇게라도 실패하고 낮아져야 자기를 비우고 주님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수치와 절망감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수제자로서의 체면도 말이 아니겠죠. 마가복음 9장 34절을 보면,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논쟁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 베드로도 자기가 제일 큰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큰 자가 되려는 욕망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세상은 포기했어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젠 큰 자는 커녕 가장 작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자아는 칭찬받을 때가 아니라 죄에 빠져 나락에 떨어져 실패했을 때 깨집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백하여 주님으로부터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구나 이런 칭찬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마16:16이하).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걸으라 하소서” 그러고 물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수준이 다르죠. 그런 베드로가 해가 미칠까 두려워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잡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자아가 부정되지 않으면 속 마음은 자기 이익을 생각합니다.

요한복음13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지금은 나를 따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지금은 안 된다는 겁니까? 아직은 죽음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로 예수님과 3년을 동거하며 지냈지만 아직 베드로는 자아가 살아 있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마음 상태로는 손해보는 일, 고난 당하는 일, 죽어야 하는 일은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자기 영광을 포기하는 길입니다. 가족과 친구와 세상으로부터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고 손해보고, 고난당하고 희생하고 마침내 죽어야 하는 길이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주님처럼 손해보고 고난당하고 그럴 겁니다. 목회자 자녀들이 부모에게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하여 자기들 의지와 상관없이 피해를 입고 희생을 강요당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자주 이사 다니느라 제 자녀들이 친구가 없다고 하고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고 교회에서도 속터놓고 이야기 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게 되는 길입니다.

육의 본성인 우리 자아가 살아 있으면 죄성과 욕망 때문에 마귀의 지배아래 살게 됩니다. 자기를 섬긴다는 측면에서 육의 본성과 마귀는 한 통속입니다.. 본래 마귀는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였습니다. 천사장 루시퍼는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자기를 높이려고 대적하는 자 사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쫓겨나 지옥의 마귀가 된 것입니다.

이브와 아담의 경우도 봅시다. 결국 자기를 더 높이려는 욕망에 굴복해 하나님께 죄를 범했고, 그들의 후손인 우리들도 ‘자아를 높이고 싶어하는’ 죄성을 물려 받고 말았습니다. 이 죄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죽이고 성령의 지배아래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는 한 예수 믿고 교회 다닌다고 해도 결국 자기 중심적이고 끊임없이 자기를 높이려는 시도를 하면서 하나님 보다 자기를 섬기다 끝나는 게 인생입니다. 일부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넘어지는 이유가 바로 자기를 높이려는 욕망을 죽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돌아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온 베드로는 이전과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까? 겉으로만 보면 실패한 제자죠. 하지만 속을 보면 그 실패가 자아를 부정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진정한 제자로 거듭나게 해준 겁니다. 주님도 그걸 기대하고 실패하도록 놔두셨다가 다시 일으킨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같으면 실패하고 어떻게 될지 두려워 미리 막았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회복된 것은 사실 주님의 의지가 작동한 측면도 있습니다.

믿음의 길에서 실족했을 때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 실족한 사람을 너무 다그치고 몰아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실패하고 좌절하면서 자아가 깨지는 겁니다. 우리는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의지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경우들을 종종 봅니다. 주님도 이걸 기대하고 계신 겁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도 자아가 깨져야 합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상태로 교회 다니면 평생 자기 중심적으로 종교생활만 열심히 하는 것이지 정말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지 못합니다. 때때로 진정한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결국은 자아의 욕심을 따라갑니다.

아직 미혼인 교우들은 여러분 한 사람의 자아만 부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결혼한 부부들은 배우자의 자아까지 부정되어야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배우자 한 쪽이 믿음이 좋아도 다른 쪽이 자아가 살아 있어서 이 정도 이상은 안 된다고 거부하면 더 헌신하기 어렵습니다. 더 나가려고 할 때마다 갈등이 생기고 부부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에 믿음의 수준을 낮은 쪽에 맞춰 살 게 될 겁니다. 그래서 지금 미혼들은 반드시 주님께 헌신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기도하며 찾기 바랍니다. 이미 결혼한 사람은 자기 영혼처럼 배우자의 믿음과 헌신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배우자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함께 받을 그릇이니 서로 믿음을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게 좋습니다.

연약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맙시다. 바로 이 순간이 우리 자아가 깨지도 중심축이 나에게서 주님께로 옮겨지는 때입니다. 어디서 실패했는지 돌아보면서 나를 내려 놓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기 바랍니다. 내 자아가 철저하게 깨져 소멸되어야 나를 주장하지 않고 언제라도 주님 뜻에 맞춰 살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아의 노력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나를 비우고 그 빈 자리에 주님이 주인이 되시고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 비로소 하늘의 소망 가운데 즐겁게 주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추구하고 자기를 높이려는 본성을 가진 자아는 주님과 교회에 올인하는 것을 손해보는 어리섞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따라가면서도 계속 뒤를 바라보고, 이 정도 이상은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처럼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로 교회 다닐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그만 두지도 못하고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지도 못하고 그래서 예수 믿는 게 힘듭니다. 예수 믿는 게 힘든 이유는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해결책은 십자가에서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 노력이 아닙니다. 은혜로, 믿음으로, 성령으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기 바랍니다. 죽여달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주 앞에 엎드리기 바랍니다. 살아 있는 자아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제발 도와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기 바랍니다. 이 위선적인 자아 때문에, 이 부도덕한 자아 때문에 말하기도 부끄러운 죄로 넘어져 수치를 당하는 것을 자신에 대해 통곡하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눈물로 침상을 적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즐겁게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