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하게 살려면 고난을 각오해야

딤후3:10-17

바울 사도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를 격려하는 말씀 중에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돈과 쾌락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으로 사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괜한 비난을 듣고 때때로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저는 교우 여러분에게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려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바울 사도의 인생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1절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자신이 당한 핍박과 고난에 대해 언급한 후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위해 고생하는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해 그렇게 말씀했는데, 실제로 바울은 경건하게 살려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바울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을 처음 보았을 때 바울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으로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 넘겨주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와 믿게 된 후부터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세주라고 전하고 다녔습니다.

바울은 11절에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핍박받은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이 지역은 바울 사도께서 일차 선교여행 때 방문한 지역으로  지금의 터키 중남부지역입니다. 사도행전13장과 14장에는 바울이 일차전도여행 기간동안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여행하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고 예수믿어 죄 사함을 얻고 구원얻도록 전도하자 일부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듣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심으로 바울의 말을 반박하며 비방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쫓아내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이고니온에서는 유대인이 두 사도를 돌로 치려고 달려들어 루스드라로 도피했는데, 거기까지 따라와서 결국 바울을 돌로 쳐서 바울이 실신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내갔습니다(14:19). 그 당시에도 사람 사는 곳이니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법이 있었겠지만, 바울은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엔 세상에서 복받고 성공에 도움이 될까 싶어 교회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경건하게,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오히려 박해를 받고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박해받고 고난이 따르더라도, 인생이 더 힘들어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 말씀 붙잡고 가겠습니까?

바울이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 다니며 선교할 때는 AD46년 전후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5년 정도 지났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인들은 물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허락한 로마 당국 역시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용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4장 16절을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며 전도하고 다니자 잡아다 옥에 가두고 돌로 쳐 죽이고 원형 경기장에 넣어 사자의 밥이 되게 했습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붙잡여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3차 전도여행 기간 중인(AD53-58) AD54년에 네로가 로마 황제가 되었습니다. 네로는 64년 로마 대화제를 그리스도인의 소행으로 몰아 대대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성경학자들은 디모데후서가 AD66년 혹은 67년 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데, 바울이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한 것은 당시의 박해받는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쿼바디스'입니다. 영화 속에서 베드로는 극심한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납니다. 로마를 탈출하던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묻습니다. 그러자 그리스도는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련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죽어가는 양들을 놔두고 박해를 피해 살기 위해 도망가는 자기의 비겁함을 참회하고 로마로 돌아와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는 네로 시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확장되자 2세기 이후 박해는 더 심해졌습니다.  박해가 절정에 이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는 칙령을 발표하여(303)  교인의 집회를  금지하고, 교회를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고 신자로부터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자유민의 경우 법의 보호마저 박탈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독교 교세가 줄어들지 않고  확장되자 로마는 정책을 바꿀 수 밖에 없었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했고(밀라노 칙령), 392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Theodosius,  재위 379-95)는 기독교를 국교로 승격시켰습니다.  그 후 중세 1000년 동안 로마 기독교는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종교가 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성경을 읽어야 그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극심한 박해를 받는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황제를 섬길 수 없었습니다. 황제 또한 자신을 부정하는 그리스도인을 눈감아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로마 당국의 박해를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육체적 고통을 당하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아직도 일부 국가에서는 기독교가 국가의 감시와 박해를 받으며 기독교신앙의 자유가 매우 제한되어 있는 게 사실입니다. Paul Marshall박사에 따르면 전 세계 2억명의 그리스도인이 국가의 압제 아래 매일 비밀 경찰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맘껏 누리고 있습니다. 부모 형제들의 반대로 교회다니는 데 눈치가 보이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예수 믿는다고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지는 않습니다. 일단 이 정도의 자유를 누리며 신앙생활할 수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것만도 큰 복이며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받게 될 핍박’같은 것은 상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 각오해야할 고난은 무엇입니까?

바울 당시에는 황제가 우상의 자리에 앉아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혔습니다. 지금은 개인의 야망과 성공이 우상의 자리에 앉아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핍니다. 로마가 지배하던 바울 당시 유대사회엔 일부 종교지도자들과 세리들 외에 일반 국민들은 개인적 야망이나 성공 같은 건 꿈꿀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날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 누구라도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재산을 축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높은 자리와 재물로 상징되는 개인적 성공의 유혹도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에겐 부모 형제도, 가문도, 직장도, 조국도, 심지어는 교회나 하나님 나라 보다도 오직 개인적 성공의 우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바울 시대에 경건하게 살려는 성도들은 로마 당국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경건하게 살려는 현대의 성도들은 물질중심의 세상 속에서 출세와 재물을 인생 성공의 지표로 삼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한편으로 유혹을 받고 한편으로 조롱과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고분 고분 순종하며 시키는대로 열심히 종노릇하면 세상에서 힘있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개인적 야망을 이룰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믿는다고 옳고 그른 방법을 따지고 회식자리를 피하고 눈에 거슬리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기 쉽습니다.

13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고 그러면서 또 남에게 속기도 하고 그렇게 산다고 말합니다. 미국 사회라고 다르지 않겠지만, 한국사회 역시 속이고 속는 일이 일상생활이 된 것 같습니다. 고위공직자 인사청문회를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 중에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최근에도 총리, 장관, 경찰청장 후보자 중에 자녀교육이나 투기목적의 위장전입 의혹이 제기되어 시끄럽습니다.

한국이나 미국같이 교회가 국가의 박해를 받지 않고 세상의 출세와 재물을 성공의 지표로 삼고 그것을 얻기 위해 부정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주님말씀과 양심을 따라 살면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황제를 숭배하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 시대에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황제를 거부해 핍박을 받았습니다. 같은 이치로 개인적 야망과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되면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되심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높은 자리와 물질로 대표되는 성공의 야망을 포기하는 상실감을 견뎌야 합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재물을 많이 모으는 것을 성공한 인생의 지표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기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정부에서 일하든 사기업에서 일하든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며 승진하려면 먹고 잠자는 시간 빼 놓고 보스에게 충성하며 직장에 인생을 바쳐야 합니다. 비상시엔 휴일도 반납합니다. 주일도 없어지는 거죠. 직분을 맡아 교회에 봉사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학생 때는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고, 직장을 얻은 후에도 퇴직하기까지는 거의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충성한 대가로 그나마 성공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직위와 돈입니다.   

User가 주도하는 소비자시대의 교회는 방향을 잃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세상의 성공을 원하기 때문에 설교도 세상의 성공을 약속해주는 메시지로 차고 넘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꼭 가난하고 고생하며 살아야 경건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 남을 도울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보다 세상에서 자기 인생의 성공을 더 열망하면 주님을 따르기 어렵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통을 분담하는 대신에 세상에 충성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재물을 모으려는 욕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번은 어떤 서기관이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 돈을 사랑하고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주님을 따라가기 편해집니다. 그렇잖으면 예수 믿는 게 기쁘지 않고 불평만 생깁니다. 소용없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기 위해 불이익을 당하고 다소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더라도 그것이 은혜와 복임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