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는 은혜의 결과

사도행전2:37-41

  교인 중에도 율법아래 사는 사람과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 아래 사는사람들은 행동을 통해 남에게 잘보이고 인정받는 걸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며 자신에 대한 평가나 대접에 별로 만족하지 않고 불평합니다. 반면에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은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자기 능력이나 노력한 것보다 늘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자기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마쓰시다 전기의 마쓰시다 고노스케(파나소닉)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늘 마지막 면접은  자신이 직접 주관했는데, 매번 같은 그의 면접 질문 중에 하나가 “당신이 이 회사에 올 정도로 탁월하게 준비된 것이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자기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물었답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는 사람을 뽑겠습니까? 고노스케 회장은 운이 좋았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만 신입사원을 뽑았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매번 이런 식으로 면접을 하니 어느 기자가 회장의 면접 스타일을 눈치채고 그 이유를 물었답니다. 회장이 하는 말이,
“운이 좋았다고 말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렇게 성공한 것이 내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 덕분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 있고 회사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긍정적 자세로 극복해 나갑니다. 반대로 자기 노력으로 되었다는 사람들은 항상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일을 해서 정기적으로 회사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고노스케 회장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운’이라고 말했지만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면 ‘은혜’라는 말과 통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 하나님께 빚진 심정으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 때 자신도 행복하고 또 도움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능력이 안돼서 그런 줄은 생각하지 않고 환경을 탓하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설령 똑똑해도 쓰임받질 못합니다. 따라서 진짜 인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동통신회사 KTF 조서환 부사장이 있습니다. 그는 소위 ‘아이디어맨’으로 유명한데, 처음 입사한 애경에서 “하나로 삼푸’(샴푸+린스+트리트먼트) 히트시켰고, 치약에 ‘2080’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죠? 그분이 최근엔 3세대 이동통신 브랜드 ‘Show’ 마켓팅을 담당했는데  WCDMA(제3세대 이동통신 시스템)시장에서 점유율 1위 기록했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분이 23세 때 육군소위로 임관해 수류탄 사고로 오른 손을 잃었대요. 당시 사귀는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손이 이 지경이라 알리지도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여자 친구가 문병을 왔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답니다. 막상 얼굴을 보자 말할 용기가 안나 30분을 머뭇거리다 어렵게 “아직도 나 사랑해?” 물었답니다. 그러자 여자 친구가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두 번 끄덕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날아갈 듯이 기뻤고 세상을 다 얻은 듯 했답니다.
 
  여자 친구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병원 근처로 이사 와서 아침 저녁으로 식사를 챙겨주고 간호했습니다. 비록 한 손을 잃었지만 그런 시간들이 무척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도 잠깐, 어떻게 알았는지 여자 친구 아버지가 찾아온 겁니다.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고 무조건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딸이 그럴 수 없다고 하자 아버지는 극단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너, 저놈 아내 할래, 아니면 내 딸 할래?” 여자 친구가 아버지에게 뭐라 답했을 것 같습니까?

  “아버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 않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잖아요. 만약 아버지가 사고로 한 쪽 팔을 잃었다면, 어머니가 어떤 태도를 보이기 원하세요? 한 쪽 팔 없는 남자와 살 수 없다고 집 나가 재혼하길 원하세요? 아니면 ‘나는 당신의 팔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체를 사랑했어요’ 그러며 곁에 있어주길 원하세요?” 그러자 대답이 궁색해진 아버지는 식식거리며 그냥 갔답니다. 그 광경을 옆에서 보고 있던 조서환씨의 마음 속에 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 때 여자 친구에게 빚진 마음을 갖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결심하기를 ‘내 평생 이 여자 하나만은 행복하게 해주겠다!” 그러고나서 영문학과에 가기로 결심하고 병실에서 편입 시험 공부를 하는데 영어 문장을 세 번 정도 읽기만 해도 외워졌답니다.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줘야겠다’는 일념으로 공부하니 집중력이 생긴 겁니다. 사랑에 빗진 마음으로 이 여자를 위해 내 남은 인생을 다 던지겠다고 공부를 하니 안될 게 없었던 겁니다.

  역시 의리보다 더 강한 게 사랑에 빚진 마음입니다. “ 헌신하라!” 외쳐도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선 기대할 게 없습니다. 얼마 동안은 해보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헌신은 사랑에 빚진 마음에서 나와야 평생할 수 있습니다. 넘치는 사랑을 배풀어준 사람을 위해 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방탕하게 살아온 자신의 과거를 용서받은 마리아는 예수님께 빚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옥합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억지로 할 땐 아깝지만 사랑에 빚진 마음으로 섬기는 건 쉽습니다.

  본래 교회는 주님께 사랑의 빚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아까울 게 없는 사람들이 서로 위해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을 지 살 지 모르고 뛰어드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사도행전 2,3장의 초대 예루살렘교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행2:44), 날마다 모여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떡을 떼며 기도하고 감옥에 잡아 넣는데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고 전도하고 다녔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예수님께 빚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교인보고 “헌신해라, 충성해라. 교회 위해 일해라” 해봐야 불평만 할 뿐 별로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에 빗진 심정이 솟아나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빚진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옵니다. 홀어머니 모시고 사는 처지를 생각해 친구가 뒤짚어 쓰고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에 간 친구를 생각할 때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대신 죽어준다면 또 어떻겠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고백은 바로 나 대신 죽어준 예수님께 평생 빗진 마음으로 살겠다는 고백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회개도 감사도 헌신도 나옵니다. 우리가 십자가로 나간다는 건 죄를 깨닫는 것이고 통곡하는 것이고 수치와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닫기 전엔 빚진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말씀드렸습니다. 뱀의 유혹을 받은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결국 아담은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죄인이 되어 그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죄는 아담과 이브 부부에게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부터 출생한 가인과 아벨과 셋과 그 후손들 모두 죄인의 특성을 타고났습니다. 그게 뭔지 알려면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자녀들의 마음씨와 행동을 관찰해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 구절은 우리 인간을 박살내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좀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폼잡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용모도 내세우고, 학벌도 내세우고, 집안도 내세우고, 재산도 내세우며 “난 너와는 수준이 다른 사람이니 미리 알아서 해야지!” 뭐 이런 마음이 좀 있습니까? 제가 서울 목동에 있는 교회에 있을 때입니다. 교인들 중에 대학교수, 의사, 연구원장, 소장, 사장, 정치인들 뭐 이런 사람들이 좀 있었습니다. 왠지 수준이 다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1,2년 지내며 그들이 생각하는 것, 살아가는 것, 인간관계, 신앙생활하는 것 보니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럴듯한 타이들을 가지고 있을 뿐 인간됨의 수준은 죄다 마찬가지라 술, 담배, 부부싸움, 도박, 부동산 투기, 남 무시하고 끼리끼리 노는 것 까지 다 똑같습디다. 우리는 어떨 것 같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는 첫걸음이 뭔지 아세요? 자신이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라는 걸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엔 인간이 세상의 온갖 죄악을 뒤짚어쓰고 다니는 괴물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전 첨에 성경을 읽으면서 막 화가 났습니다. 아니 인간을 이렇게 말해도 되는가? 결국 나를 욕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고발 속에서 내 모습을 하나 하나 보이더라구요. 그게 남 이야기가 아니고 다 나를 말하는 거예요.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걸 인정하게 되니까 그 담엔 너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죄를 인정했는데 형벌을 부정할 순 없잖아요. 그래서 또 맘이 편칠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받을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걸 깨닫고 믿고 나니 얼마나 좋던지요. 그 때부터 누군가 제 맘 속에 “예수님이 널 위해 죽기까지 하셨는데 그게 아깝냐? 뭘 못한다고 하느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 같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엉망진창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절망하는 경험이 있어야 됩니다. 배고파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밥을 줘야 고맙죠. 밥이 생명인 줄 알죠. 배부른 아이에게 먹이려니 투정만 부리잖아요. 무식한 방법이긴 한데 밥 안먹고 투정부리는 아이에겐 간식도 끊고 하루쯤 그냥 놔두면 고쳐집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니 용서의 감격이 없는 겁니다. 예수 안 믿으면 죽는 줄 알아야 제발 믿게 해달라고 밤새워 매달릴 건데 죄로 죽어야하는 걸 모르니 절박함이 안 생기는 겁니다.

  지금 죄 죽음 심판 이런 말씀이 귀에 안 들어올지 모르나 죽음을 문턱에 두면 이야기가 달라질 겁니다. 지금 여러분은 마음만 먹으면 무슨 고백이든 못할게 없고 못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 한마디 하는 게 어려울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예수 믿으라고 그렇게 말해도 안듣고 다음에 교회 나간다고 버티던 어느 청년이 있었는데 교통사고 나서 머리를 다쳐 말한마디 못하고 누워있는 걸 심방간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렇다 세상 떠났죠.

  본문에 보면 베드로 사도께서 유대인들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무슨 말을 했는데 마음이 찔려 어떡허면 존냐고 숨넘어가듯 다급해졌습니까? 요약하면 베드로는 니들은 하나님이 보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천하에 쳐죽일 놈들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 혼자 잘난 줄알던 천하의 유대인들이 그만 겁먹고 엎드렸습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제가 “너 나쁜 놈이야!” 이런 말할 “예 그렇습니다. 목사님! 제가 어쩌면 좋을까요?” 그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성령의 감동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머리 들고 “뭐 목사면 다야. 내가 설교들으러 왔나?” 그런 그대는 아직 멀었습니다.  회개해야 예수님도 믿고 성령도 받고 그렇게 됩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형편없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며 통회하는 마음도 없고 인정하려 들지도 않으니 죄 사함을 경험못해 감동도 없고 빚진 마음도 안 생기고 더더욱 성령체험은 말할 것도 없는 겁니다. 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뭡니까? 요한은 회개의 침례를 배풀었습니다. 괜히 물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침례는 회개하는 마음의 고백이요 삶의 바꾸겠다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다시는 훔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사기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불효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속이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겉과 속이 다르게 살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허세부리며 교만떨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부정비리를 저지르지 않겠다, 옛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여버리는 게 침례입니다. 옛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인 후 물 밖으로 나와야하는데 숨막힌다고 얼른 나와서 그런지 옛 사람이 그냥 살아 있는 체로 예수믿는다고 해버리니 겉은 예수 속은 옛 사람의 죄악이 섞여서 요상한 교인들이 되는 거 아닙니까?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들을 때 마음이 편하면 회개한 사람이고 화가 나면 죄를 숨기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한 사람은 죄를 철저하게 자각하고 회개하고 또 멀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용서받은 걸 내세우며 과거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오는 진실된 삶이 없다면 십자가의 속죄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밀양>영화에 아이를 죽이고 교도소에서 복역하는 유괴범이 등장합니다. 그는 신애라는 여주공인의 아들을 납치해 죽였습니다. 어느 날 신애가 예수 믿고 주변의 위로받아 마음이 바뀌어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에 교도소를 방문합니다. 신애는 그 유괴범에게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당신을 용서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유괴범은 “아 그러십니까? 사실은 나도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러며 신애 앞에서 웃습니다. 더나가 유괴범은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줄 몰랐습니다. 이런 평안을 진작 누렸어야 하는데 과거엔 몰랐다는 게 억울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신애는 속이 뒤집혔습니다. ‘세상에 이런 놈이 다 있나! 내 마음은 아직도 이렇게 고통이 남아 있는데 누가 용서해주었단 말인가? 내가 용서를 안 해 주었는데 먼저 용서를 받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피해를 입힌 사람이 이렇게 뻔뻔스러운 모습으로 나와서야 되겠는가?

  영화는 생각 없는 약국 여인과 함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꼭 이 유괴범 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동안 얼마나 나쁜 짓하며 몸 쓸 인생을 살았는지 제대로 반성도 없이 예수 믿고 다 용서받았다고 제 좋은 대로 갖다 붙입니다. 자기 때문에 실연당한 사람, 사기 당한 사람, 자식잃은 사람, 파산당한 사람들이 어떤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 살아가는 지 돌아볼 마음도 없이 예수 안에서 평안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걸 볼 때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어쩜 세상 사람들 눈에 값싼 은혜를 내세우는 기독교인들이 유괴범처럼 보일 지 모릅니다. “너희들은 참 편리하구나! 나쁜 짓 다하고 예수 믿으면 그만이고, 다 용서 받았다고 잊어버리고”
죄의 용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죄인이 아무리 뉘우친다고 이미지은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회개가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의 깊이를 자각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도 깊어지고 믿음이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죄를 붙잡고 뿌리를 뽑는 처절한 몸부림이 없었다면 속죄의 은혜 또한 싸구려가 되기 쉽습니다. 철저한 반성과 회개가 없으면 또 다시 죄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전에 서방파 보스라는 사람이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간증하는 걸 들었습니다. 앞으로는 교회다니며 선교를 위해 여생을 보낼 생각이란 말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신문을 보니 교도소 안에서 수하들을 조종해 또 무슨 폭력을 휘두르고 범죄행위를 범해 보석이 취소되고 다시 재판을 받는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뭐가 문젭니까? 철저한 회개 없는 신앙고백은 위선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자각하는 깊이만큼 은혜도 깊어집니다. 얼마나 나쁜 놈인줄 알아야 용서해주는 분의 사랑의 깊이가 느껴질 게 아닙니까?

  저는 여러분이 사랑에 빚진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섬기길 바랍니다. 그 빚진 마음은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뭣 때문에 나의 죄 때문에. 그래서 철저한 죄의 자각과 회개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콩이 맷돌 속에서 가루가 되듯 하나님 말씀 앞에 철저하게 옛 사람이 깨뜨려지는 경험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