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기독교적 이해

창세기3: 14-21  
죽음의 기독교적 이해 

오늘은  창세기3장 14절에서 19절 말씀에 근거하여 ‘죽음’을 주제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모든 종교는 죽음을 중심주제로 다룹니다. 종교의 기능 중에 하나가 사람이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죽음은 아무리 부자나 권력자라도 결국 무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기에 죽음을 생각할 때 세상을 사는 동안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 교훈도 얻게 됩니다. 

종교마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독특합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시작이 죄 때문이라고 봅니다. 본래 인간은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잇는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아담과 이브가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신 선악과를 따먹어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중에 19절에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언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그 후로도 800년을 살다가 930세에 죽었다고 나옵니다.  최초의 죽음은  형 가인에게 살해된 아벨이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한 점은 죽음으로 인생이 소멸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세계가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선 사람이 죽을 때 예수 믿고 죄 용서받아 구원 얻은 사람은 주님 품에서 안식하다가 주님 재림하실 때 부활하여 계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된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고, 예수를 믿지 아니하여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생전에 지은 죄의 형벌로 지옥에 들어가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죽음으로 인간이 육신은 물론 의식도 소멸되고 없어지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인데 죽음이 뭐가 나쁜 것이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고 만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죽은 다음 지옥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지 알고 나면 죽음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느껴질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죽음의 형벌이 축복으로 바뀝니다. 이 세상 삶의 수고와 고통을 끝내고 고난도 슬픔도 질병도 없는 영생복락의 천국으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살만하기는 해도 인생은 고통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병들고 죽어가는 걸 지켜봐야 합니다. 실연의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실직, 사업의 실패, 부도가 나고  돈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어떤 나라는 먹고 살기도 힘들어 홈리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종교 때문에 박해를 받고 독재자의 억압 속에 제대로 말도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죽음은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인식으로 인도해주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에겐 축복입니다. 

죽음에 대한 기독교신앙의 특징 중에 또 하나는 사후심판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하셨을 때는 아담도 그냥 흙으로 돌아가 소멸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죽은 다음 사후 세계가 있고, 사후 심판이 있어 천국과 지옥으로 갈려 영원한 복을 누리는 자와 영원한 고통을 받는 자로 나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담에게 아무런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후 심판과 천국과 지옥의 개념은 신약에 와서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초기엔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생각하고 이 세상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기들 생각과 달리 이 세상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주로 말씀하시고, 결정적으로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는 것을 보면서 관심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사후심판은 곧 믿음의 심판입니다.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율법 아래서 의인은 한 사람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합니다(롬3:10,23). 누가 더 의로우냐 이런 걸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길 외에 다른 의롭다함을 얻는 길을 만드셨는데,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롬3:21,22). 

천국 행인지 지옥 행인지 선언은 사후에 이루어지지만, 결정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가 아닌가에 따라 살아 있는 동안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천국인지 지옥인지 이미 결정된 상태로 죽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전도할 때 예수 믿는 것을 미루게 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믿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당장 믿으라고 권면하는 게 좋습니다. 나중에 복음을 더 분명하게 깨달아 한 번 더 신앙고백 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좀 부족해 보여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하게 하는 게 구원에 한 걸음 더 나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믿을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믿어야지 이러다가 뜻 밖에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거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신앙고백 없어 그냥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믿고 구원받을 수 있었던 사람인데, 세상 일을 먼저 챙기다가 지옥 가는 것은 전도할 사명이 주어진 우리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좀더 적극적으로 예수 믿으라고 해야 합니다. 전도가 어렵다고 해도 일년에 수 십 명씩 전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분들의 공통된 특징은 지옥에 대한 믿음이 확실하고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지옥 가지 않게 하려고 몸부림치는 전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상의 재물과 즐기는 인생에 몰두하면서 지옥이 어딨냐는 식으로 무시합니다. 나사로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와 같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는 재물을 의지하고 인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요즘도 궁전 같은 집에 살면서 주말이면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벌이고 여름에도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 놀고 겨울엔 자가용비행기를 타고 따뜻한 나라에 마련해둔 별장으로 가서 보내고 수시로 세계 여행을 다니며 인생을 즐기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게 되면 예수 믿는 사람도 그 생활방식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주말이면 노는 친구들이 들끓고 수시로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 어떻게 주일마다 교회를 나가 예배하고 또 무슨 직분을 맡아서 교회를 섬기겠습니까?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고 보니 자기 생각과 달리 사후세계가 있었습니다. 죽었는데도 의식이 살아 있고 불속에서 고통을 느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 저기 불길이 타오르고 저 멀리 조상 아브라함이 보이고 생전에 자기 집 문 밖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부자는 갈증으로  타들어가는 입을 벌려 겨우 “나사로를 보내 물 한 방울만 내 입에 떨어뜨려 주세요” 아브라함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너와 우리 사이는 넘을 수 없는 구렁이 있어 여기서 그곳으로 갈 수도 없고 그곳에서 올 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부자는 고통 속에 아직  살아있는 자기 형제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 자기 처럼 지옥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다 소용없는 짓이라고 대답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서 지옥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터넷에 떠도는 Youtube 동영상엔 천국, 또는 지옥을 보고 왔다고 증거하는 사람들이 아마 100여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저도 몇 번 그런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끔찍한 느낌은 들지만 허무맹랑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그래서 천국이나 지옥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걸 보고 없던 믿음이 생길 것 같진 않았습니다. 믿음은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생겨납니다. 믿음이 생겨나야 믿을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믿을 마음을 주셔서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형벌로 위장한 축복이기 때문에 두려워 할 게 없습니다. 죽음은 고통스런 세상의 삶을 끝내고 고통과 슬픔 없는 천국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저도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니 참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구나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힘들다고 느낀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왜냐면 범죄한 후 인생이 땀흘리며 힘들게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고,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 자식 낳아 키우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게 운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걸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도 인생의 고통은 피해가지 못합니다.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하면 쉽게 취직해서 좀 여유있게 살만큼 벌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현실은 대학 들어가는 것도 어렵고, 힘들게 공부하고 나오면 취업은 더 어렵고, 운 좋게 직장을 구해도 월급 받아보면 항상 부족해서 고마운 분들께 선물하나 사는 것도 맘대로 못할 정도입니다. 그런 직장도 구하지 못해서 청년실업자가 넘쳐나고 또 50대면 벌써 물러가라고 압박을 받고 퇴직하고도 노후 준비가 안돼 허드렛일자리라도 찾아다녀야 하고 이게 인생입니다. 이쯤 되면 몸은 여기 저기 아프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오래 사는 게 꼭 좋은 건 아닙니다. 

과학이 발달해 수명을 배 이상 늘릴 수 있다고 해도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에겐 좋은 일이 되겠으나 대다수 사람에겐 그림의 떡에 불과하고 노령화 사회의 문제를 심화시킬 것입니다. 지금도 노동할 수 없는 노령화 인구 증가가 복지사회에 타격을 줄거라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자연수명이 연장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습니까? 자연수명이 80세에서 100세 , 120세  이렇게 증가하면 고정 수입 없이 20년 살기도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20년이 아니라 5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합니다. 국가 사회보장제도가 이들을 커버하려면 얼마나 많은 재정을 더 부담해야 합니까? 이 추가비용을 어떻게 조달합니까? 대부분 나라의 사회보장제도가 붕괴될 겁니다. 사회는 빈부 격차가 더욱 심화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살기 힘든 세상이 될 것이고 노년층 자살율도 늘어날 것이고 지금보다 더 살기 나쁜 세상이 될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보다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게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브를 유혹해 범죄하게 만든 뱀을 저주해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고 여자와 원수가 되어 여자의 후손이 머리를 상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여기서 뱀은 사탄이고 흙을 먹는다는 것은 죄로 죽어 흙으로 돌아간 지옥의 영혼들을 의미하고,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봅니다. 그래서 사탄과 예수님은 서로 원수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인데, 그러자면 사망의 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부터 먼저 멸망시켜야 합니다. 요한일서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는 구절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든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유혹하다 실패하자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며 운명하실 때까지만 해도 마귀는 자기가 승리했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죽은자의 영혼을 지배하던 사단의 권세는 깨지고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를 위임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음부를 지배하던 권세가 예수님의 권세 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최후심판과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요한 계시록에 묵시문학의 형태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계시록 19장에 백마를 탄 심판주가 등장하는데  옷과 다리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이런 이름이 쓰여진 예수님이십니다.  그 후 순교자들의 무리가 첫째로 부활하여 주와 함께 천년 동안 다스립니다. 그 다음 20장에 천년왕국이 끝난 직후 마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 영원토록 감금되고  이어서 최후심판정이 열리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영혼들이 마귀가 감금된 불과 유황못에 던져지는데 그걸 두번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런 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 영원토록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진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의 재림, 믿는 자들의 부활, 최후심판, 사탄의 영원한 감금,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의 구원시간표에 따라 앞으로 이루어질 사건들입니다.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때와 시기를 묻는 제자들에게 그것은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도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대신 종말 직전에 일어날 징조들을  언급하셨습니다. 그 중에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며, 배교와 극심한 기독교의 박해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중에 일부는 성취되었고 일부는 미래의 예언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생전에 주님이 오실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곧 다시 오겠다고 하신지 2000년이 지났기 때문에 내일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늦었으면 늦었지 이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심정으로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예고 없이 갑자기 오시더라도 항상 맞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