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생명의 문

빌립보서1:20,21

기독교는 영생을 얻는 길을 제시해주는 생명의 종교지만, 생명에 이르는 길은 죽음입니다. 오늘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 대해 다섯번째 주제, ‘죽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과 죽음이 어떤 관계가 있고 죽음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언젠간 죽습니다. 히브리서9장 27절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사람에게 죽음을 정했습니까? 넌 크리스쳔은 자연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정답은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에게 “네가 (선악과를 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고 경고하셨는데, 이브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서 남편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아담에게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인생이 끝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창3:19). 이렇게 해서 죽음이 사람에게 작정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왜 죽어야 하며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려주는 것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이 없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또한 죽음은 무엇이고 죽은 후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제대로 알 길이 없습니다. 동물이 그런 것처럼 인간도 시간이 흐르면서 세포가 노화되고 기능이 저하되어 결국은 병으로 죽는데 그걸 자연의 이치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인간도 그렇게 죽는게 뭐 당연하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지금은 우리가 살아 있지만,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 가족 중에도 부모 형제 절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도 나이가 드니까 언젠가 죽겠지 그런 생각은 하지만  죽음이 눈 앞에 닥친 것처럼 그렇게 실감나진 않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정서상으로 문제가 없다면, 심각하게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죽음을 넘어서는 믿음을 가지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삶과 죽음은 생물학적 생명과 죽음은 물론, 그것을 넘어 영적인 생명과 죽음까지 이야기 합니다. 이 세상에서 육체적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죽음은 또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통로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갖게 되면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 누가 일찍 세상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당장 볼 수 없어서 슬픈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람을 불행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둠이 왜 무서운지 아십니까? NAVER 지식 검색창에 물어보니 예측이 안돼 대비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알면 안무서운데 몰라서 무서운 것과 같은 이치죠. 밤길 가다 옆집 오빠를 만나면 반갑죠. 아니까. 그러나 어둠 속에 모르는 남자가 따라오면 어떨까요? 긴장이 되고 두려움이 몰려올 겁니다. 여러분 해본 적 있는지 모르는데, 밤에 우물을 들여다 보면 되게 무섭습니다. 안보이는데 뭔가 나올거 같거든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도 죽은 다음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모르기 때문일까요? 죽음이 언제 나에게 올 것인지 예측도 안되고 죽은 후엔 어떤 상태인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대비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때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이건 담력을 키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안 무서운 척하면 더 고통스럽다는 것 알죠? . 죽음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걸 깨닫게 되면 죽음의 공포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 사도는 죽음을 한국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이사가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살고 죽는 것이 더 중요한 게 아니라, 반드시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여드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죽음도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이런 생각,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죽음을 통해 생명이 역사하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생명이 역사하는 것은 단지 구원 뿐 아니라 구원이후의 제자의 삶, 복음증거현장, 박해와 순교에서 더욱 잘 드러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안 있는 구원의 관점에서 자기 인생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죽음을 통해 구원을얻는다고 믿은 것처럼 고난과 박해를 통해 영광이 주어진다고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었고 바울이 따라간 길이며 또한 오늘 우리들이 가야할 길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얻으리라”(막8:34-35)고 말씀하셨습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주님은 그에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 ([나를 따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매일 매일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가지 않으면 생명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따라가느라 수고하고 고난당한 게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유익한 일입니다.그 수고와 고난이 있어 주님의 제자라 불릴 수 있고 또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지금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고하며 고난받고 있다면, 기뻐하기 바랍니다. 우리보다 앞서 주님을 따른 사람들은 이보다 더 수고하고 고생하며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이정도 고생하지 않은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 생명을 내 놓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침례요한은 참수형을 당했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섬기려고 재산을 내놓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바나바는 밭을 팔아 내놓고 자신은 선교하러 다녔습니다. 명문대학을 나오고도 주님을 섬기려고 좋은 직장을 포기하고 교회 근처에서 직장 얻어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이 목자로서 양을 섬기기 위해 시간과 돈을 쓰고, 가난한 이웃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처를 제공해준 적이 있다면 그게 상급으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을 어려워하는 이유는 자신을 과보호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넌크리스챤이 아니라 교인들이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들만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 노후 대비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몰두하면 교회를 섬기기도 어렵고 이웃을 돌아볼 여유도 없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전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것이 되고 맙니다.

제자도와 관련해서 감동을 주는 책이나 인물을 보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 얼마나 뛰어난 학자냐 이런 게 아니고, 어떻게 살았느냐 그런 겁니다. 1945년 이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에 처형당한 본 회퍼가 종종 인용됩니다. 그는 죽음을 당할 지도 모르는 상황을 알면서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도망가지 않고 결국 순교당했습니다. 그 분이 뛰어난 학자임에 틀림없지만 그 지식 때문이 아니라 그 삶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이야기 할 때 종종 모델로 제시되곤 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누가 성경을 더 많이 아느냐 이런 것은 제게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더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고 있는가 그래서 교우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떨어진 죽음은 언젠가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성경에 “맨 마지막에 멸망받을 원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언젠가는 죽음도 소멸되는 날이 올 겁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사망을 이기셨지만 죽음이 아직까지는 사람들 위에 왕노릇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죽음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은 여전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적 진리를 보여주는데 비유만큼 적당한게 없을 겁니다. 바울은 씨와 싹, 혹은 열매의 관계로 죽음과 생명의 원리를 일깨워줬습니다. 한 알의 씨가 떨어져 썩을 때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썩는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한 알의 씨가 썩고 죽어서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곧바로 생명으로 연결되어 싹이 나고 열매가 맺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식물에 의도하신 솜씨입니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새생명을 덧입혀주십니다. 죽음은 새 생명이 꽃을 피우는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새생명의 열매인 영원한 삶이 펼쳐질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창조 세계 전체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는 것(롬8:18-25)’, 더 이상 고통을 받는 것도 애통한 일도 없고, 미모 때문에, 집안 때문에 , 학벌 때문에 자존심상할 일 없이 지극히 자애로우신 아버지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그 나라를 우리는 죽음을 통과한 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죽음을 묵상하기엔 너무 젊은 게 사실입니다. 심리적으로 아직 죽음이 그렇게까지 절실하게 다가오진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갈수록 죽음의 때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기후환경변화로 인해 생명을 앗아가는 자연재해가 빈번해지고, 인간이 만든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와 비행기의 사고 또한 젊은 사람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만듭니다. 아직 인간이 다 정복하지 못한 질병 또한 생명을 위협합니다. 사람은 꼭 늙어서 죽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둠 속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것처럼 죽음을 두려워하기만 하지 말고, 믿음으로 대비합시다.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는 너무 늦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믿음의 경지는 사람이 자기 인격으로 이뤄내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이뤄지는 하나님의 은혜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의 경지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88세에 The Radical Disciple을 쓰면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말하길 “죽음이 멀지 않은 지금, 나는 죽음을 통한 생명이라는 역설을 통해 격려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죄를 이겨내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매일 죽어야 합니다. 죽은 시체는 반응할 수 없습니다. 혈기가 솟구치고 화가 치밀어 오르고 충동적인 욕망에 시달린다면,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강한 의지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죽어야 잠잠해집니다. 죽어야 야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죽어야 교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영원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매일 죽는 것, 그것이 바로 제자도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육체적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죽음의 문을 열고 아버지 품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수고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지금은 주님을 위해 이 땅에 좀더 머물려 수고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얼마를 더 살든지, 얼마나 빨리 죽게 되든지 부끄러운 죄악은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드리는 일에 집중합시다. 이 한가지에 집중하기에도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한정된 인생을 사는 동안 무엇을 하면서 주님을 높여드릴 것인지는 하나님께 묻어보며 성령의 인도를 구하기 바랍니다. 죽어야 한다면 죽는 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입니다.

교우 여러분, 언제 죽음이 우리 앞에 닥쳐올지 모릅니다. 건강하다고 반드시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몸이 약하고 병든 사람이 더 조심하며 오래 살기도 합니다. 지금 사는 동안 죽음의 실체를 깨닫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살기 바랍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죄와 질병으로 망가진 육체와 영혼이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 가끔은 죽음을 생각하며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주님 앞에 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