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힘은 어디서(9/8/19)

베드로전서1:2-12 / 세상을 이기는 힘은 어디서

오늘은 ‘그리스도이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이런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지난 주일 야외예배에서 베드로서신의 시대적 배경은 네로의 박해가 시작될 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우리는 생명을 내 놓고 신앙을 지킨다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저도 자유롭게 교회다닐 수 있기 때문에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박해에 대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때문에 힘들고 수고하는 것을 연상해보는 정도입니다.

박해와 고난이 없고 세상 편한 때에 예수 믿고 사는 게 참 다행이지만, 세상과 짝하며 기복적인 신앙에 빠질 위험도 크다는 걸 유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살 때보다 가나안에 정착해 보다 풍족한 환경에서 살면서 물질의 복을 준다는 바알 우상에 빠져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돈이면 뭐든 다 할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겐 믿음을 위협하는 것이 재물의 욕심과 유혹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2절에는 기독교신앙의 핵심적 요소인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 그리고 택하심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구원의 과정과 관련된 것입니다. 구원얻는 것이 얻어 걸리는 복권같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때가 되었을 때 성령을 통해 구원얻을 사람이 복음을 깨닫고 예수 믿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은 그런 과정을 통해 구원얻어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3절부터 5절에는 영생의 소망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가 거듭나서 산소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정치적 야합과 거짓 선동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선동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총독에게 요구하게 했고, 총독 빌라도는 죽임을 당할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달아 죽게했습니다.

그런데 부활로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부활없이 죽음으로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증거했더라도 설득력이 없었을 겁니다. 아니 제자들 조차도 회의에 빠져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의 이름은 역사에서도 사라졌을 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행2:36).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처음 증거한 것은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때였습니다. 천사는 밤에도 밖에서 양을 돌보던 목자들에게 “뭐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 크리스토스의 음역으로 그 뜻은 기름부음받은자(메시야) 곧 구세주(Saviour)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메시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구세주 메시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메시야 탄생 예언 몇 곳을 예로 들면,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사야53장 4,5절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한 것이라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듭나 산 소망이 있게”(3절)라는 구절도 우리가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산 소망은 천국의 소망, 영생의 소망인데, 이 소망은 거듭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누구든 “천국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할 수는 있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소용없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영의 신령한 몸이 필요한데, 거듭나야 먼저 가신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거듭나야 천국간다는 것은 요한복음3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 잘 나옵니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는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거듭나는 영적 체험이 있었다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냐고 그렇게 엉뚱한 말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거듭나는 것이 성령으로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줍니다. 누구든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면 성령이 그 사람 안으로 들어와 거하시고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영적 교제도 회복되는데 이것을 거듭난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특징을 감안해서 여러분이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 모두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 다음6절부터 9절에는 시험의 연단과 믿음의 목표인 구원이 나옵니다. 베드로사도는 당시 성도들이 박해로 인해 근심하는 걸 알고, 박해의 고난이 믿음을 더 강하게 만들어 실패없이 구원얻게 해줄 거라고 위로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유롭지만, 지금도 많은 나라에선 예수 믿는다고 박해받고 있습니다. 자료보니 북한, 중국, 인도, 네팔, 이슬람권의 중앙아시아 지역 나라들 대부분이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박해의 시련을 믿음을 연단하는 기회로 사용해서 택한 자녀들이 진실된 믿음으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게 해주신답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믿고 거듭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지금 거듭난 사람도 다 믿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믿어지지 않더라도 구세주의 복음을 깨닫고 믿는 날이 올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복음을 깨닫고 믿어지게 해주십니다. 믿어져서 믿는 것을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고 합니다. 눈으로 예수님을 보고 안보고 그런 게 믿음에 결정적 요인은 아닙니다.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고 안 보고도 믿는 자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서신 수신자 대부분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믿음의 목표는 영혼의 구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영혼의 구원은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구원얻고 천국가려고 예수믿는다고 말하면 유치하고 이기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신앙의 일차적 목표는 영혼구원에 있습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도 사회개혁과 정의 구현에 힘쓰는 건 당연한 책무지만, 사회를 개혁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면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과 성공과 권세에 대한 욕망과 이런 것들을 얻으려고 저지르는 비리에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세상 물정을 안다면, 10불을 얻기 위해 100불을 버리지는 않을 겁니다. 영혼의 구원과 천국의 영생보다 더 귀하고 값진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천하를 얻고도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마16:26) 영혼의 구원은 육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믿습니까?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한 주 동안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기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영혼이 잘 되고 몸이 건강하고 범사에 모든 일이 주 안에서 잘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