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삶(5/19/19)

살전4:1-12 / 거룩한 삶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아 가는 시대의 문화와 지역의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스마트폰이 생활을 바꿔놨다고 합니다. 뉴스에서 전철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보니까 모두 폰을 들여다보며 주변 사람에겐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봤습니다. 스마트폰이 처음 발명된 때가 1992년이라고 합니다.  IBM사가 1992년에 설계하여(IBM 사이먼) 1993년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스마트폰 나온지 30년도 안됐는데 스마트폰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외부 환경에 지배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과 비교해보면 많은 부분이 새롭게 달라진 것도 사실입니다. 인생의 목적과 가치관이 달라진 사람도 있고, 취미생활과 습관을 고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은 후에도 예수 믿기 전에 살던 세상 환경과 문화는 그대로이고 고치고 버리겠다고 결심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옛 사람의 잔재가 적잖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거의 30년째 고치려고 해도 잘 안되는 게 있으니까 성결의 과정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계속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4장의 주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거룩한 삶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행하느냐는 것은 곧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적 가치과 지역적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산다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도 그 도시 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데살로니가는 BC 315년 경 마게도냐 왕 카산더(Cassander)가 성을 재건하고 부근에 있는 몇 개의 작은 도시와 촌락을 합하여 그의 아내 데살로니가(마게도냐 왕 빌립 2세의 딸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의붓 누이) 이름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는 교통요지의 항구도시로 급성장했는데, BC168년 로마가 마게도냐를 정복한 후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행정구역 중 하나가 되었고, 해군기지도 생겼습니다.  BC146년에는 총독이 거주하는 지역이 돼 사실상 마게도냐의 수도 역할을 하는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 당시에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인과 헬라인 외에도 로마인과 다수의 유대인들이 몰려와 사는 복잡한 도시였고 AD150년 경엔 인구 20만을 헤아리는 도시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는 순박하고 한적한 그런 도시는 아니였습니다.  도시문화는 방탕하고 유혹도 많은데 데살로니가도 그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도 예수 믿기 전에는 그런 세상 문화에 적잖은 영향을 받고 살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을 칭찬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더욱 경건에 힘써야 한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교회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기 위해 경건훈련을 합니다. 제가 늘푸른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교우들에게 QT를 안내하고 금요일에 모였을 땐 QT를 서로 나누며 말씀을 따라 살도록 권장해왔습니다. 상당히 긴 기간 동안 그런 훈련과 나눔을 해왔기 때문에 스스로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금은 그 때처럼 시키지는 않습니다.  QT는 경건한 삶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그 자체로 경건한 삶은 아닙니다. 경건한 삶은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과 교훈을 성령을 의지하며 살아낼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건은 성품 훈련과는 다릅니다. 경건훈련의 목적은 다른 사람 보기에 좋은 사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3절에 하나님의 뜻은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가 이전에도 여러번 설명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거룩한의  히브리어 카도쉬는 잘라낸다는 뜻을 가진 동사 카라트에서 나왔습니다. 히브리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거룩하게 되려면 잘라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과 짝하며 살던 내 삶을 세상으로부터 잘라내야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되고 그래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물들어 살던 습관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마음 만으로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라고 당부한 적이 있습니다(딤전4:6-9). 구원은 우리가 힘쓰지 않아도 은혜와 믿음으로 얻었지만, 경건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 구원얻었다고 해서 옛 사람의 습관과 욕망이 갑자가 다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금연은 완전히 끊어지는 게 아니고 참는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몸에 벤 다른 습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면서는 예배를 드리고 성경 공부를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탄하며 근심하게 만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뻐하신 이유가 뭡니까? 그 때 세상엔 죄악이 두루 퍼져있고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악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을 한탄하며 근심하셨다고 합니다(창6:5,6). 그렇게 타락한 세상에서도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이었다고 합니다(9). 하나님께서 욥을 기뻐하신 이유도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욥1:1). 지금도 군에 몸담고 있으면 얽메여 신앙생활이 쉽지 않을 겁니다. 로마시대엔 더욱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백부장 고넬료는 가장으로서 모든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이끌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합니다(행10:2). 그 결과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호 아래 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바울은 거룩을 강조하면서 음란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이 음란의 문제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데살로니가 상황에서 볼 때 음란이 문제였기 때문일 겁니다. 앞서 데살로니가 도시의 특성을 말할 때, 항구도시 고린도가 그랬던 것처럼 데살로니가도 방탕한 도시문화의 특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패한 인간이 쉽게 빠지는 죄가 성적인 방탕함입니다. 음란은 성인이 되면서 통과의식처럼 빠지기 쉬운 죄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선 성인간에 합의하면 그건 사생활이고 죄가 아니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무엇보다 음행을 피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은 성령께서 우리 몸을 집으로 삼고 거하시는 것입니다. 합의 하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음행은 거룩하신 성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바울은 음란을 버리라고 현재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 중에도 아마 음란에 관련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예수 믿은 후에 음란에 빠진 게 아니고 이방 문화 속에 음행하며 살던 사람이 예수 믿었는데, 아직 이런 잔재를 다 버리지 못했을 겁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 믿으면서 색욕을 따라 살아선 안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6절 보면, 이 일에 분수를 넘어 형제를 해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결혼한 교인들 사이에서도 불륜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남편 있는 여자와 부정한 관계를 갖게 되면 결국 그 남편인 형제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겠습니까? 기혼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혼 청년들도 교제하고 있는 커플을 상대로 대시해선 안됩니다. 그 또한 큰 상처를 주게 될 겁니다. 헤어졌다고 해도 바로 접근해 교제한다고 하지 말고 적어도 3개월 이상은 지난 후에 조심스럽게 다시 시작하는 게 한 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예의고 하나님께 거룩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말씀을 나누고 마치겠습니다. 한 주 동안 말씀 안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