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인가 가나안인가(3/17/19)

민수기9:15-23; 사사기2:10, 21:25 / 광야인가 가나안인가

오늘은 광야 생활과 가나안 생활의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고 그리스도인은 이 둘 사이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야 믿음으로 사는데 도움이 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출애굽 과정을 영적으로 해석하면 출애굽은 사단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광야는 천국을 가기 위해 통과하는 세상이고, 가나안은 목적지 천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여정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줍니다.

애굽의 삶은 고통스런 종살이였습니다. 출애굽기2장 23절 보면,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예수 없이 살 던 청년시절 저도 사는 형편도 힘들고 삶의 의미도 목적도 없어서 죽는게 낫겠다고 한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그 때가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을 갖게 된 시기였습니다.

가나안에 거인들이 산다는 말을 듣고 겁먹어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사들도 있었습니다(민14:3,4). 그래서 돌아갔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바로의 종으로 살다가 죽는 게 전부였을 겁니다. 애굽은 고통과 절망 뿐이고, 광야는 가나안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광야처럼 사는 게 힘들더라도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 게 되는 겁니다.

예수 믿어 힘들다고 생각하는 건 오해입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금 힘든게 다 없어집니까? 성격상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고, 가정문제나 직장 일이나 학업 등 이런 것으로 스트레스 받고 힘든데, 예수 안믿고 교회 안다니는 사람에겐 이런 문제가 없어서 편안하답니까? 예수 믿기 전으로 돌아가면 여러분이 더 편해지겠습니까?

걱정할 일이 많고 불안하고 힘든 세상인데 예수 믿고 사니까 이 만큼 평안한 겁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교회다니는 것 아닙니까? 교회 나와 말씀들으니 위로가 되고 기도하니 마음이 좀 놓이고 그렇잖습니까? 더구나 불신앙의 끝은 지옥이고 믿음의 결국은 구원의 천국이라는 걸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예수 믿기 전이 좋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광야와 가나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갈 때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이 가까웠지만,  그 길로 가다가 블레셋과 전쟁이 벌어지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겁먹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할까봐 하나님은 광야길로 인도하셨다고 합니다(출13:17,18). 광야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가나안으로 가려면 지형상 광야를 통과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은 많은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행군하고 머무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이하를 보면, 성막을 덮었던 구름이 떠오르면 이스라엘 자손이 행군을 시작하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진을 치고 이틀이든 한달이든 일년이든 거기 머물렀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의 행군은 누구도 자기 맘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 인도 아래서 움직였습니다.

광야는 길도 없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갈 수도 없고 안내자만 따라가야 합니다.  사막이 펼쳐진 광야에선 길을 잘 아는 안내자 없이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합니다. 광야의 모래 언덕은 바람이 불어 지형이 수시로 바뀐답니다. 또한 광야에서 한번 들어서면 끝까지 통과하는 게 더 안전하답니다. 힘들다고 중간에 돌아오려고 하다간 길을 잃고 방황하다 죽을 수 있답니다.

구름 인도를 따라 간 것처럼  우리가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산다면 적어도 신앙생활에선 실패할 일이 없습니다. 세상 재물과 성공의 유혹에 넘어가서 자기 맘대로 하다가 실족하고 믿음을 잃고 그런 경우다 대부분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받는 것은 구름으로 인도받는 것보다 더 확실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받으려면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으로만 분별이 되기 때문입니다(고전2:13,14).

광야는 또한 세상 욕심을 내려 놓게 만드는 곳입니다. 광야는 호화로운 집을 짓고 눌러 앉아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고 그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이라 뭘 많이 가질수록 힘듭니다. 양떼를 많이 얻어도 그것들을 어디서 먹입니까? 1년치 양식을 받는다면 무겁게 어떻게 가지고 다니겠습니까? 광야는 천막에서 살면서 일용할 양식만 얻어 먹는 게 최선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선 자기만의 인생계획을 세울 수도 없습니다. 광야를 통과해서 정착한 후라면 몰라도 광야를 통과하는 중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선 야망 같은 것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게 다 부질없다는 걸 광야가 가르쳐주는 곳이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는 꿈을 가지라거나 인생의 계획을 세우라거나 무슨 성공의 비결 같은 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광야에선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처지가 됩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는 차이가 있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에 누구나 다 하나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권세있는 자도 종도 없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먹고 입고 거처하는 곳이 똑같으니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광야는 자기 사업이라는 것도 없기 때문에 성공도 실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가진 게 없기 때문에 빼앗을 것도 빼앗길 것도 없었을 겁니다. 사람의 본성이 의롭게 바뀐 것은 아니니까 신발 짝이나 바지 저고리나 덮고 자는 가축털 담요같은 것을 놓고 다툼은 있었겠지만, 그런 것으로 치부해서 무슨 부자가 되고 그럴 수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달랐습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성취요 축복을 누리는 곳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분배 받은 땅은 각 지파와 가족이 기업으로 삼고 자기 것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다투고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농사와 가축업이 전부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부자도 나오고 가난한 자도 나왔습니다.  지역 유지도 나오고 약자도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지 않습니다. 자연 재난이나 병에 걸려 일할 수 없게 되어 먹고 살기 위해 빗을 진 사람은 갚을 수 없을 때 종으로 팔려가는 일도 생겨났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신부의 높고 낮음의 차별도 생겨났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은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의 소망을 품고 있을 때는 모두 평등했지만, 정작 그 땅에 들어가 살게 되자 불평등하고 불의한 세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약속으로 가나안을 바라보고 살 던 때는 하나님을 찾았던 가나안에 들어가 그걸 손에 넣은 후엔 하나님은 잊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사기2장 10절 보면,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관심이 있었으면 왜 모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가나안에선 부와 권세와 세상의 즐거움이 목적이 되고 그것을 얻는데만 관심이 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 이후의 세대라고 해도 자기들이 살고 있는 땅을 기적같이 주신 하나님을 잊고 살 수가 있는 겁니까? 저는 몰라서 잊은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 관심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들처럼 세상의 재물과 권세와 성공에만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사는 것 자체가 복받은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재물과 권세를 가져야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이 바뀐 겁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생각해봐야 할 게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얻은 것 자체가 복받은 것인데, 그렇게 생각안하고 세상 재물과 성공에 몰두하며 얻은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살고 얻지 못한 사람은 실패자처럼 낙담하고 그런 걸 반성해야 합니다. 또한 이 세상을 광야로 보고 살 것인가, 아니면 가나안으로 보고 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세상을 광야로 보고 살 때와 가나안으로 보고 살 때 삶의 방향과 목적이 많이 달라집니다.

천국을 바라보며 세상의 욕심을 내려 놓고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광야의 삶을 지향하게 될 겁니다.  반면에 세상의 부와 성공을 추구하며 꿈과 야망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가나안을 지향하는 삶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가나안의 삶의 방식을 강조해왔습니다.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올라 권세를 갖는 것이 성공하고 복받은 인생의 표징입니다. 언제부턴가 교회도 이것을 더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돈 많고 높은 자리에 있는 교인들이 교회에서도 대접받고 행세를 하고 교인들이 많이 모이고 큰 교회당을 짓은 목사들이 성공한 목사로 대우받고 있습니다.

가나안을 지향하는 삶을 살게 되면 세상적으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영적으로는 실패자가 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세계 그 어느 민족보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복을 받은 그들이 실패로 끝났겠습니까? 그들이 특별히 부족한 사람들이라 그랬겠습니까? 아닙니다. 유대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라는 걸 역사가 증명하잖습니까? 그들이 실패한 것은 가나안을 지향할 때는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실패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성공에 연연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며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재물과 지위를 성공과 축복의 기준으로 삼게 되면 우리들 대부분은 실패한 인생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그 동안 어떻게 교회를 섬겨왔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상관없이 작은 교회 목회자는 실패까지는 아니더라도 성공한 목사는 아닌 것으로 평가될 겁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고 있습니까? 아직 까진 성공했다고 느낍니까? 아니면 실패자가 아닌지 우울합니까?  30,40대는 평가하기 이르지만, 더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감정은 어디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이런 것 세상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의 부와 성공으로 유혹해놓고는 결국 실패자의 감정에 빠져 절망하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마귀에게 속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승리자로 살려면 돈과 권세와 세상의 지위와는 상관없이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와 바울이 무슨 재물이나 세상의 지위나 권세를 가졌습니까? 재물과 세상의 권세를 기준으로 하면 네로 황제나 헤롯왕이나 대제사장같은 자들이 성공한 사람이고 예수님, 베드로, 바울은 실패자입니다. 그분들이 세상적으로 가진 게 뭐가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머리둘 집 한 칸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툭하면 붙잡혀 옥에 들어가 메를 맞고  조롱당하고 그렇게 살았습니까?

천국을 향해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가나안이 아닌 광야의 삶을 모델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부와 성공을 추구하며 자기 맘대로 살려는 자아가 통제되고 주님의 말씀과 성령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이렇게 찬양한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삶에선 이게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성공을 추구하는 가나안의 삶이라면 더욱 어려울 겁니다. 이 세상을 천국가기 위해 통과하는 광야로 알고 살아야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춰집니다.

광야를 통과하면서 가나안에서 누릴 복을 지금 누리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천국을 향해 가면서 천국에서 약속하신 복을 지금 누리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복은 이 세상 보다는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것들입니다.  광야에선 재물이든좋은 집이든 주시더라도 그게 다 짐이 될 뿐이지 그걸 누릴 수도 없습니다.  많은 재물과 높은 자리와 권세를 갖게 되면 신앙생활을 어렵게 만들고 시시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여기 저기 보자는 사람도 많고 할 일도 많아지는데 주일이라고 교회 나와 예배드리고 또 교회에서 봉사할 그런 시간이 나겠습니까?

광야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그런 환경일 때 우리는 신앙생활을 더 잘 합니다. 하나님을 더 잘 의지하고 살게 해준다면  불편과 고난도 감사하며 감당합시다. 예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가진 재물과 세상의 성공을 부러워하며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다는 말은 해선 안됩니다. 마귀가 주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마귀는 재물과 권세로 속여서  지옥으로 데려가려는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부자는 사는 동안 매일 잔치를 벌이고 호의호식하며 인생을 즐겼습니다. 나사로는 그런 부자의 문 앞에서 구걸하듯 얻어먹고 살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둘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자는 죽어 음부의 고통 속에 들어갔고, 거지로 산 나사로는 죽어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생각해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