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런 새 언약의 직분

고후3:7-18 / 영광스런 새 언약의 직분

한 주간 평안했습니까? 서로 인사합시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한 일 중에서 혹은 맡았던 직책 중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을 만한 일이 있습니까?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오늘은 새 언약과 새 언약의 직분의 영광을 주제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새 언약의 일군이 된 것이 가장 영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6절 보면, 새 언약의 일군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새 언약은 14절에 나오는 구약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구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면 그 의로운 행위에 의해 복을 받고 구원을 얻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새 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그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인정해서 구원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장에는 구약과 비교해서 새 언약의 특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3절 보면, 먹으로 쓴 것과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 돌비에 쓴 것과 심비에 쓴 것 이런 대조적인 구절이 나옵니다. 먹으로 쓴 것과 돌비에 쓴 것은 구약의 율법을 묘사하는 말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과 육의 심비에 한 것은 새 언약의 복음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율법을 내려주실 때 돌비에 직접 써서 모세에게 주셨다고 합니다(출33,34장). 후에 필사자들이 그 율법을 파피루스라는 갈대로 만든 종이에 먹물로 기록해 복사본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이 사본에 기초해 만들어진 것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입니다. 반면에 새 언약은 돌비나 종이에 기록된 문자가 아니라 예수님 그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믿음과 그 믿음으로 얻는 구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한 것이며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심령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계속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동시에 구원의 보증이 되십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는 종교의식과 교리학습이 중시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신앙고백보다 교회가 베푸는 성례전에 참여하고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학습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이르러 루터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구원은 개인의 신앙고백,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된다는 복음을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강조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그 믿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개인적 신앙고백이 중시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라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율법과 복음을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시면 구원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혹 희미하게나마 이해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건 불가능합니다. 말로 믿는다고 하기는 쉽지만 실제 삶 속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성경말씀대로 사는 게 쉽겠습니까? 그 어떤 이유보다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을 겁니다. 이 처럼 새 언약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나 그 어떤 종교적 행습이 아닌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어집니다.

바울 사도는 6절 이후부터 새 언약의 일군이 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일군이 영광스러운 것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강조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겠지만, 바울 사도는 모세가 수행한 의문의 직분의 영광을 언급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새 언약의 직분에는 그 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내려 올 때 모세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주는 빛이 나서 백성들이 그 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합니다(출34:29-35). 잠시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율법을 받아가지고 온 것이 이 정도면 주님을 모시고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에겐 더욱 주님의 임재로 인한 영광이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율법은 결과적으로 정죄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율법을 가르치며 사역하는 일군 또한 정죄하는 수준에서 그치는 반면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로 볼 때 바울은 율법을 전달하고 가르친 모세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자신이 더 영광된 직분을 수행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바을께서 의의 직분의 영광을 언급한 것은 자기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위해 일하는 것이 사람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런 일임을 고린도교우들이 깨닫고 복음과 교회를 위해 살도록 격려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오늘 말씀을 통해 전도하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여러분이 세상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고 영광스런 직분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최근 미북 정상미팅이 전세계적으로 뉴스가 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무력충돌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험악했는데, 미국과 한국과 북한이 양자 혹은 삼자 대화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고 상호 평화협력관계로 나갈 수 있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 동안 북한이 비핵화 결의를 여러 번 어겼는데도 한국과 미국에서 다시 기대하는 것은 이것이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패자는 물론 승자에게도 파괴하고 죽이는 일을 수행하고 대화를 살리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우리도 대화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끝으로 17절에 주는 영이시며 주의 영이 계신 곳엔 자유함이 있다는 말씀을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는 말은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듣는 사람 가운데 역사하여 예수님의 대속을 믿게 도와주시고 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무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 내려가 노예로 전락해 자유를 잃고 억압과 고통속에 살았습니다. 그걸 불쌍하게 여기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애굽에서 벗어나 가나안에 가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유인이 아닙니다. 영적 차원에서 보면 죄를 짓고 죄의 권세에 속박되어 사단에게 지배 받는 종의 신분입니다. 불신자들은 영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정신세계를 보면, 영적으로 사단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인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재앙을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죄책감에 눌려 있고 귀신을 겁내고 지옥 갈까 두려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예수 믿고 거듭나면 성령께서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과 자유를 얻게 해주십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욕망은 무엇보다 강한 구속입니다. 자유함을 위해 욕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충동적 성적 욕망, 도박, 마약, 지배욕구, 쇼핑중독, 탐식, 등 이런 욕망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잘못된 습관이나 통제력 부족한 의지문제이지만, 일부는 죄로 인한 악령의 역사도 관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최근 미투운동으로 드러난 것처럼 참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죄의 종노릇 해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동적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