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든지 죽든지

빌1:12-26 살든지 죽든지

 

오늘은 빌립보서 강해 세번째 시간으로 빌립보서 1장 12절부터 26절까지 살펴보겠습니다. 12절

이하를 보면, 바울 사도는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당한 일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잡혀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이유가 다른 어떤 잘못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잡혀왔다는 사실이 황궁 안의 시위대원 등에게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또한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이 다른 형제들을 담대하고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예상 밖의 반응이었습니다. 바울이 전도하다 감옥에 붙잡혀갔으니까 겁나서 위축될 법한데,

동료 형제들이 더 열심을 낸 것입니다. 감옥에 가는 것을 불사하면서 복음전하는 바울을 통해 참

믿음의 실상을 보고 도전을 받은 것 같습니다. 시련이 올 때 믿음 없는 사람은 겁내서 도망가지만,

천국에 가려는 사람들은 더 열심을 냅니다.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교인들의 반응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15절 이하를 보면, 질투심으로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더 열심히 전도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바울보다 더 명성을 얻으려는 열망으로 전도활동에 참여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 전도 활동하지 못하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도하는 동기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을 기뻐하며 만족했습니다. 바울에겐 사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목회자와 선교사들 사이에도 사심으로 경쟁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사가 되면 대접받고

큰소리치고 그러니까 무리하게 교회당 건축을 하며 분란에 빠지는 사역자들도 있습니다. 교회개척 할

때 거리가 가깝다고 다투기도 합니다. 자신을 높이고 이득을 취하려고 하니까 갈등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선교나 교회개척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인데도 사역자들 사이에 질투와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일할 때도 욕심을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를 바라보는 주변의 작은 교회 목회자의 심정이 어떨 것 같습니까? 바울이라면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기뻐하며 축복해줄 겁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목장사역을 놓고 생각하면 여러분도 쉽게 이해될 겁니다. 어떤 목장이 부흥하면

교회 차원에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목자는 좀 위축될 수 있습니다. 충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중에도 질투심이 생기고 그것이 분쟁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20절은 사역자로서 바울의 고백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려고 애쓴 것입니다. 둘째는 살든지 죽든지

자기 인생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도록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들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일반 그리스도인이든 사역자든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자기 관리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역에선 어느 정도 성공하고도 자기관리에 소홀해서 비난을 받는 사역자들이 적잖습니다.

 

요즘 한국에선 새정부에 기용될 인사청문회를 하고 있습니다. 장관후보자나 장관급 공직후보자로

지명된 사람들을 국회에서 합당한 인물인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 동안 괜찮게 살았다고 생각되어

지명된 사람들인데 속을 들여다보니 대부분 후보자들이 다운 계약으로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거나 자녀 좋은 학교 보내려고 위장 전입했거나 논물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고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공직을 맡기에 적합치 못하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임명되더라도 부끄러운 공직자라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불의한 욕심과 부도덕한 욕망인데, 예를 들면 재물, 성공, 권력, 성욕 같은

것입니다. 돈 욕심 때문에 다운계약으로 세금을 적게 낸 게 청문회에서 드러나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재정 관리 문제가 불거져 목사님과 교인 측이 싸우다가 교회가 나뉘어지는

일도 있고, 횡령했다고 판결을 받고 옥살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인과 이성문제로 비난을 받고

떠나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모두 자기 관리에 실패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21절의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씀은 갈라디아 2장 20절에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나는 죽고 없다는 고백입니다. 죽은 사람이

무슨 세상의 성공과 영광입니까? 죽은 사람에겐 아무런 욕망도 의지도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망과

미련을 버리기 어려운 것은 세상의 욕심에 대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이기는 최선은 주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바울은 두 사이에 끼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여기서 두 사이는 이 세상에 더 머물러 사는

것과 주님 곁으로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세상에 좀더 머무는

것이 빌립보교회에도 유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것은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전5:8)고 주님 곁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주님 곁으로 가고 싶은 열망 그 자체는 가족이나 교회를 덜 소중히 여기기

때문은 아닙니다.

 

저도 가끔 지금 천국에 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제 경우는 세상살이가 힘들어 좀

쉬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 같아 반성을 합니다. 저도 아직은 이 세상에 좀더 남아 있는 것이 교회와

가족들에게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사는 동안엔 그런 인생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천국 가고 싶은 마음이 크더라도 아직은 세상에 더 머물며 가족에게도 교회에도 유익한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인생의 가치와 의미는 주님과 교회, 가족과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될 때 얻게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바울 사도께서 고백한 것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그런 열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한 주 동안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승리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