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아버지

눅15:11-32 / 고통받는 아버지(늘푸른교회/4-9-17)

오늘은 교회 절기상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이스라엘 모든 마을에 다니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활동을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라고 불린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으로 들어오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요12:13).

저는 오늘 종려주일에 자녀 때문에 고통받는 아버지를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탕자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는 오늘 말씀은 집 나갔다가 돌아온 작은 아들이나 아버지 곁을 지킨 큰 아들에 관한 무엇을 말하는 것보다 그들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고 어떤 마음인지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비유를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중심인물은 두 아들이 아니고 어떤 사람입니다. 둘 중에 작은 아들이 어느날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 동안 자기 분깃을 달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근동의 가장 중심의 공동체 문화에선 있을 수 없는 일로, ‘아버지 빨리 죽기 바랍니다’ 이런 의미랍니다. 이렇게 무례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요구였지만,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요구를 들어줬습니다.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명기21장 15절 이하를 보면, 재산 분배에 관한 규정이 나오는데, 자식이 둘일 경우 장자인 형은 3분의 2, 동생은 3분의 1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아버지 재산의 3분의 1을 넘겨받은 작은 아들은 며칠이 못돼서 그걸 다 처분하고 멀리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 당시 재산은 주로 토지와 가축 떼였습니다. 그걸 갑자기 처분하려면 헐값에 팔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아버지로부터 자기 몫으로 받았더라도 법적 소유권은 아직 아버지에게 있어서 그걸 처분하려면 아버지 승인이 필요합니다. 작은 아들은 아마도 문서를 위조했거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거짓말을 하고서 소유를 처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쯤에서 작은 아들이 얼마나 불효자식이냐, 못됐냐 단지 그런 사실보다 그런 만큼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자식 때문에 고통 받는 아버지를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의 행동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체면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자신의 체면이 어떻게 되는 것보다 아들의 안부를 더 걱정했습니다. 작은 아들은 돈이 다 떨어져 거지 신세가 될 때까지 온갖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순간부터 하루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왜 아버지 품에서 사랑 받으며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벗어나려고 한 걸까요? 아버지를 떠나 자유롭게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자기를 구속하는 존재로 인식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이유도 마찬가지일겁니다.

키에르케고올의 ‘백합 한 송이와 작은 새 이야기’는 자유에 대한 욕망이 어떻게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옛날 한적한 산 속 시냇가에 백합 한송이가 행복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작은 새 한마리가 백합 곁으로 날아왔습니다. 그 새는 매일같이 날아와 부지런히 재잘거리다 어디론가 날아갔습니다. 어느날 백합의 마음 속에 자기처럼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게 웬지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작은 새가 날아와 백합에게 자기는 매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고 원하는 곳은 어디나 갈 수 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작은 새는 많은 백합들이 모여사는 너무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을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후부터 백합은 자기가 불행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백합은 마치 감옥에 갇혀있는 것처럼 답답했고 정겹던 시냇물소리며 주변의 꽃친구들 모두 초라하고 서글프게 보였습니다.

어느날 백합은 그 속삭이는 작은 새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힘을 모아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작은 새는 백합주변의 흙을 파헤친 후 백합을 입에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백합은 백합들이 모여산다는 그 아름다운 곳을 상상하며 행복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백합은 점점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뿌리가 뽑힌 백합이 점점 시들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심겨진 그곳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도 더 아름다운 들에 핀 한 송이 백합으로 살 수 있었을 터인데, 날아 다니는 새를 부러워하다가 시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작은 아들은 행복이 머나먼 저곳에 있는 게 아닌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집을 나와 고생하며 실패한 끝에 자유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때 누릴 수 있고 행복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의지할 때 얻게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다시 뵈었을 때 품군의 하나로 봐달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지난 허물을 탓하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 기뻐서 잔치를 열어 즐겼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면 철이 든 것입니다. 자기 몫의 재산을 미리 달라고 그걸 처분해 집나갈 때 작은 자식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아버지 체면에 얼마나 손상이 될 지,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 그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눈치 볼 것 없이 맘대로 사는 것 밖엔 아무런 생각이 없던 아들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아버지 곁을 지킨 큰 아들도 작은 아들 못지 않게 잃어버린 아들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31절)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버지는 자기 모든 소유가 다 큰 아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번도 벗들과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 준 적이 없다며(29절) 섭섭한 마음으로 아버지와 동생에 대해 단단히 삐져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 즉 은혜와 사랑을 모른다면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잃어버린 자식 아니겠습니까?

비유에서 큰 아들은 유대인, 작은 아들은 이방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모두 사랑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론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큰 아들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전도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한 주 동안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주 안에서 승리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