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할 것이 없도록 삽시다.

고전4:1-13 / 자책할 것이 없도록 삽시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자책할 것이 없도록 충성을 다하자는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겠습니다. 주일마다 예배 드리러 와서 기도할 때 자책할 것이 없도록 은혜와 믿음을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과 교회를 섬기며 즐겁게 살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1절에서 자신을 포함해 선교에 동참한 동료들에 대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엔 그리스도의 일군된 것을 자랑스럽고 감사하게 여기는 바울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무시하고 예수 믿는 것을 바보 같은 짓으로 여기는 분위기였지만 바울은 반대로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알아주는 것을 좋게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도 주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요 복음의 일군이라고 알아줄 때 자부심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이 벌고 출세한 걸 자랑하고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분위기에 기죽지 말고 주를 믿고 교회를 섬기며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바랍니다. 문재인 정부에 발탁되어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는 일이 하찮다고 수치스럽게 생각합니까?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사람을 위해 일하는 자들도 자부심이 대단한 데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자부심이 부족해서야 되겠습니까?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겐 권력과 돈과 명예가 주어지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주님을 위해 일한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천년 동안 왕 노릇하게 된답니다(계20:4-6). 하나님께서 언제 거짓말을 하신 것 봤습니까? 민수기23장 19절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하심이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하다, 별볼일 없는 인생이다” 한탄하지 말고 주의 일에 힘씁시다.

2절 보면, 주님은 일을 맡겨준 사람에게는 충성을 기대하십니다. 충성으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토스가 NIV엔 faithful로 번역되었습니다. 충성은 무엇보다 믿을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충성되어 여겨, 다시 말해 믿을만해서 생명을 구하는 복음 전파를 맡겨주셨는데, 세상 일이 바쁘다고 소홀하며 어느 새 내 일이 아닌 것처럼 살아선 안됩니다. 달란트 비유가 우리에게 나중에 예수님이 다시 오셨을 때 맡겨준 것을 가지고 우리가 얼마나 성실하게 잘 남겼는지 결산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결산할 때 칭찬받고 상 받는 일군이 됩시다.

사는 게 바쁜 줄은 저도 압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할 일이 많아집니다. 유치원 가기 전까지는 잘 먹고 놀며 건강하게 자라면 그게 최선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편할 때인데, 그걸 모른 체 그 시절이 지나갑니다. 유치원 거쳐 초.중.고.대학까지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래도 학생 땐 공부만 하면 됐지만, 사회에 진출하고 직장을 갖게 되면 공부보다 더 부담되는 일들을 해야 하고 결혼하면 가정 일도 해야 하고 자녀도 키워야 합니다. 직장 다니며 아이들 양육하는 일이 우선 시간상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님 섬기는 일을 포기하지 말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께서 예수 믿은 후부터 세상을 떠나 주님께 가기 직전까지 어떤 열심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며 주님을 섬겼는지 여러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 일에 시간 쓰고 돈 쓰는 게 손해라는 생각이 듭니까? 다른 교인들은 열심히 안 하는데 나만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유혹을 받습니까? 이것은 마귀의 유혹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잘 이겨내기 바랍니다.

그 다음 4절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께서 자신에 대해 자책할 것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 바울이 무슨 의도로 말씀하신 것인지 잘 분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자책합니까?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에서 대표기도할 때 회개의 차원에서 자책하는 기도를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한 주를 살았는지 알고 있으니까 주님 앞에 기도하려니 양심이 걸려서 누가 뭐라고 안 하는데도 잘못을 고백하고 자책하는 기도를 합니다. 자책한다는 것은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려면 할 수 있는 데 안 한 겁니다. 그래서 양심이 나를 고발해 자책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볼 때 자책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책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면 반사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자책 안 해야지 그래도 자책합니다. 저는 가끔 화를 내고 자책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좀더 참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게 후회가 될 때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는데 잘 될 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자책하게 만드는 게 더 있습니다. 저도 오늘부터 자책할 것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길 바랍니다.

바울은 6절에서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기 자랑이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언급한 것은 고린도교우들에게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할 때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해야 하는지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주의 일을 하는 것으로 어떤 이득이나 지위나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아볼로 역시 누가 시켜서 고린도에 와서 전도하며 고린도교회에서 봉사한 게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원해서 일했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교회를 섬겼다고 어떤 대가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볼로가 어떤 지위를 얻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사도라는 지위는 그 자체로 고난덩어리고 세상적으로 어떤 이득을 가져다 주지도 않았습니다. 사도라고 대우받고 세상 일에 어떤 힘을 갖고 그런 게 전혀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바울은 9절에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두셨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사도의 삶이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거처할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는 만물의 찌끼같았다고 합니다. 오늘날 목사의 삶도 힘들지만 그 당시 사도에 비하면 사치스러울 정도입니다.

자책할 것이 없도록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순종이 중요합니다. 내 생각대로 하지 않고 주님 말씀을 따라 가고 또 성령을 구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의지나 인내가 아니라 은혜로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 발에 부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죄를 용서받은 은혜가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깊게 느끼게 되면 속에서 주님을 위해 살 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러면 순종이 좀더 쉬워질 겁니다. 은혜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은 오래 못갑니다. 또한 주님께 대한 사랑의 힘이 욕심을 이기고 해줍니다. 그렇게 되도록 기도합시다. 순종과 비례해서 자책이 사라질 겁니다. 그러면 마음의 평안과 영혼의 쉼도 얻게 될 겁니다. 한 주 동안 QT하며 말씀을 따라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