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을 기념하는 성찬

고전11:17-34

오늘 설교는 성찬식 말씀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대속의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식은 복음의 고백인 동시에 복음의 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기념하는 식사를 하셨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보내기를 거부하는 바로왕에게 마지막 재앙으로 장자를 치실 어린양을 잡아 피를 문틀에 바른 집은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그냥 패스(pass over)했습니다. 모세의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문틀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 밤의 재앙을 피했는데, 대신 많은 양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양들이 죽음을 당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을 면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엔 양을 잡아 양고기를 나눠먹는 것이 관례였는데 예수님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렇게 준비시켰습니다(22:8).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들고 감사기도를 하신 후에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몸이다 말씀하시며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예수님은 잔을 들고 잔은 피로 세우는 언약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몸과 피라고 하신 것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전까지 가톨릭교회는 성찬에서 떡은 예수님의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걸 화체설이라고 합니다. 루터도 첨엔 화체설을 따르다가 나중에 입장을 바꿔, 떡과 포도주는 물질 그대로 있지만 주님의 몸과 피가 거기에 함께 임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걸 공재설이라고 합니다. 이에 반해 쯔빙글리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다(est)”라는 말을 윤리적-비유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떡과 잔이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몸과 살이 아니라 몸과 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지금 장로교를 중심으로 개혁교회는 대부분 기념설, 혹은 상징적 해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도 성찬식의 떡과 잔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고 믿습니다. 떡과 잔이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거나 적어도 공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성찬을 먹는 것만으로도 구원의 은총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화체설이 유일한 진실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같습니다. 하지만 떡과 잔이 신비롭게 예수님의 육신의 몸과 피가 된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지나친 같습니다. 성만찬은 믿는자들에게 이미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확인하는 증거로서 의미가 있고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인된 우리가 구원을 얻게 것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전에도 말한 것처럼 사단도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한 같습니다. 알았다면 사단이 앞장서서 예수를 죽이려고 했겠습니까? 사단이 인간을 지배하는 근거는 죄입니다. 사단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 죄인된 인간위에 자기 맘대로 왕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사단은 사람들이 계속 죄가운데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자기가  계속 왕노릇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 뜻대로 되게 그냥 가만 있을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을 보내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대표하는 둘째 아담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 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으면 믿음으로 구원얻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믿음의 고백인 동시에 복음의 선포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잔을 먹는 것은  예수님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는 것으로 우리는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몸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은 교회와의 연합이고, 교회와의 연합은 지금  옆에 있는  교우를 안에서  영적인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형제와 자매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살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분쟁과 다툼은 성찬을 나누기 전에 먼저 해소시켜야 합니다. 본문 18,19절에도 분쟁, 파당 이런 말이 나오는데, 1 11절이하에 보면 고린도 교회가 적어도 4 파로 나누어져 다투고 있었다는 것을 있습니다.  교회가 개척된 시간이 흘러 숫적으로도 커지고 그러면 맘이 맞는 사람들끼리 친해지고, 서로 이해관계가 생겨 멀리하고 그런 현상이 생깁니다.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까 누가 옳다거나 잘못이라거나 일이 아니고 서로 자신을 돌아봐 안에서 하나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찬은 안에서 몸된 것을 고백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서로 배척하고 다투면서 성찬을 하는 것은 주님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성찬식은 지금 우리처럼 상징적으로 작은 빵조각과 포도음료 조금으로 나눈 아니고 한끼 식사량이 만큼의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먹은 같습니다. 배분방식도 누가 일일이 다니며 나눠준 아니고 준비해둔 빵과 포도주를 각자 가져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사람들이 많이 갖다 먹고 심지어 취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참여한 사람들은 남은 없어 주의 만찬을 먹을 수가 없게 것입니다. 이걸 보고  바울은 배부르게 먹는 것은 각자 자기 집에서 그렇게 하고 주의 만찬 자리에선 뜻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모든 사람이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있게 적당히 가져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주의 만찬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측면이 있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것은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으니 자기를 살피본 떡과 잔을 마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만찬 전에 회개의 시간을 갖게 하며 주의 죽으심을 묵상하게 합니다. 그런데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고 합당치는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합당한가 아닌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먹고 마시는 방법과 태도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미리 사람이 많이 가져다 포식하고 취하고 나중에 사람은 먹을 것도 없고 그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예수님의 대속을 기념하는 성찬식을 진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