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성경: 요한3:16-21
제목: 죄인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오늘은 구원의 출발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죄인이 구원 얻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까? 죄인이 회개하기 때문입니까? 성경엔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사랑도 강조되고, 인간의 회개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엔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인이 구원얻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사도행전2장 38절 보면, 베드로는 회개를 강조한 것처럼 보입니다. 

죄를 말하자면 선악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이브는 소위 ‘선악과’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지혜를 얻어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꼬득이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는 금지령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아담의 죄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류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아담과 같은 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로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된다는 것은 연좌제처럼 부당하게 보입니다. 緣坐制란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그 범죄의 연대책임을 지우는 제도인데, 조선시대엔 모반 같은 대역죄를 지으면 당사자는 물론 사돈의 8촌까지 처형을 당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나라에서 연좌제가 없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은 바울에 따르면 첫 사람 아담이 단순히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세상에 출생하진 않은 아담 안에 있는 그의 후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됩니다(롬5:12-18).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부르는데, 4세기 서방카톨릭의 4대교부였던 아우구스티노스(354-430)가 처음 사용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 죄를 짓기 때문에 이 원죄로만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인생을 통해 아담의 죄가 후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을 받아주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분풀이로 동생 아벨을 들판으로 데려가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범죄 후 아담과 이브의 가정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처음 계획한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할 게 없는 환경 속에서 아담과 이브가 서로 사랑하며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반대였습니다. 부부의 신뢰도 깨졌고 두 자식도 잃어버렸고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기다리는 인생은 매일 힘든 노동과 외로움과 의미 없는 일상의 반복이었습니다. 

얼마나 망가졌는지 상상해보세요. 하나님과 아담의 친밀한 관계가 깨졌습니다. 내 살과 뼈라고 고백한 아담의 이브에 대한 사랑은 이제 잘못한 책임을 전가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족할 것이 없던 환경대신 종일토록 고된 노동을 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저 너머에 있는 죽음을 생각하며 언젠간 흙으로 돌아갈 운명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허망하기는 오늘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이런 불행을 잊고 살려고 돈 벌고, 좋은 집과 자동차와 물건들을 사들이고,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며 정신 없이 살고 있지만 이런 모든 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역사적 측면에서 봐도 지금이 과거 어느 시대보다 부부, 가정, 부모와 자녀, 친구관계 등이 쉽게 망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말이 되지 않는 이 원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이게 되었고 갈라디아 5장 19절 이하에서 소위 ‘육체의 일’ 이라고 부르는 부도덕한 욕망을 따라 방탕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기주의, 교만, 성적인 부도덕성, 재물의 탐욕 등은 죄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죄악이 관영하고 방탕하다는 것은 말 안해도 알 겁니다. 죄로 하나님을 찾던 영혼은 죽은 것처럼 되었고 마음은 부패하여 부도덕한 육체적 욕망을 따라 쾌락을 추구하며  이전엔 사회적으로 죄악이었던 것도 개인적 취향이라고 눈을 감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 신앙과 불신앙을 선택할 자유가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은 오랜 논쟁거리였습니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죄인은 하나님을 알 수 있더라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롬1:28).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죄로 타락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거입니다. 프랑스 출신으로 제네바에서 활동한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빈은 인간이 전적으로 완전하타락하여(total depravity)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주석에서 칼빈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 구원의 출발점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아래 놓여 있다는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사는 길은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이 보기에 인간은 너무 심하게 타락해서 자기가 먼저 죄를 깨닫고 잘못을 고백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럴 마음이 없다고 보는 게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먼저 회개하여 구원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구원 얻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했기 때문이며 양심을 청결하게 했기 때문입니까? 

칼빈은 죄인이 먼저 회개하고 잘못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조건을 충족하여 구원 얻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을 여전히 사랑하여 구원의 길을 만드신 후 깨닫고 믿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믿음을 얻기 전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 하나님께서 예수 믿기 전에도 날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 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천국 갈 때까지 교회 생활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처음 계획하신 그런 관계로 발전해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7-19절에서 이 점을 잘 설명했습니다: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 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개역개정판) 

신앙생활의 수준은 주님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것과 비례합니다.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역사가 있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특성은 청년 여러분이 이성을 사랑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좀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된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긍휼, 자비에 따라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는 이유나 근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야겠다고 정하신 까닭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원인을 찾는다면 그건 하나님의 인자하심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다거나 양심적이었다거나 선하게 사는 사람이었다거나 뭐 우리 쪽에서 다른 사람보다 뭔가 나은 점이라도 있어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이런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회개나 선행을 조건으로 구원이 배풀어진 게 아니고 사랑하니 봐 준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구원의 근거로 하나님의 사랑 외에 인간 편에서 그 어떤 이유도 찾으려고 시도해선 안됩니다. 그런 시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공로로 바꾸려는 어리석은 행위가 되고, 다른 편으로는 구원에 대해 의심이 들 때 구원의 확증을 위해 마치 뭔가를 해야 할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런 오해가 같은 죄에 대해 여러 번 회개하게 만들며 불신앙에 빠지게 합니다.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의 사랑보다 인간의 회개에 초점을 두어 바라보면 감사와 평안이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보면서 100% 자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절반 쯤은 늘 의심의 먹구름을 드리워져 있습니다. 특히 간통, 간음, 등 성적으로 부도덕한 죄를 지은 경우, 더나가 살인이나 상해나 남에게 큰 피해를 주는 죄를 지은 적이 있는 경우엔 거듭 회개하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구원은 얼마나 반성했느냐 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의 형벌이 동시에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주셨다(롬5:8 )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회개나 믿음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죄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인간의 구원은 회개나 믿음보다 앞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출발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의 문제를 바라볼 때 아직 내가 부족해서 안 된다는 이런 생각은 오해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구원의 근거를 나에게서 찾으려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회개가 불충분해서 아직 확신이 안 선다고 생각하고 더 믿어보려고 애쓰고 과거의 기억을 다 동원해 못다한 회개를 하려고 하면 구원의 확신도 평안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간이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허물을 덮어두고 예수 믿어 구원 얻도록 해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강조한 분은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정의했습니다(요일4:8). 그사랑이 죄인된 우리를 구원하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죄의 형벌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후에 철저하게 하게 됩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재물이나 성공이나 욕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의 죄에서 우리를 지켜줍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혈육의 가족과 하나님의 가족 모두 사랑하기 바랍니다.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교우 여러분, 서로 화해하고 화목하기 바랍니다. 어떤 이유로 멀어진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는 결단을 하기 바랍니다. 교회 안 밖으로 불편한 사람이 있는 경우엔 이번 기회에 먼저 화해를 청하며 사랑을 실천하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면 죄와 감정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