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후손이 만든 세상

창4:16-24

지난 주엔 창세기 4장 전반부에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가인이 동생을 죽인 사건과 그에 따른 가인이 받은 형벌까지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가인이 죄의 벌로 하나님과 부모로부터 쫓겨나 방랑자가 된 후 하나님 없는 땅에 정착하면서 여러 대로 이어지는 가인 후손들이 만든 세상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밀림을 통과해서 마을로 가려는 여행객은 밀림의 특성을 잘 알아야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습니다. 밀림은 생각보다 위험 요소가 많습니다. 맹수들도 있고, 독을 품은 각종 식물이나 해충들도 있고 늪지도 있기 때문에 잘못하면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밀림에서 해를 당하거나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 정법을 보니 20년된 원주민 안내인도 길을 잃어 목적지를 찾아가지 못하는 걸 봤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밀림이라는 세상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를 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통과해 천국에 도착하기까지 세상의 특징을 잘 알고 위험한 것은 피해가는 게 상책입니다.

자연 만물로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지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사회로서 세상은 주로 하나님을 떠나 독립한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만들어왔습니다. 그 선구자는 가인과 가인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시대마다 주류적인 문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바벨탑 이후 흩어진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혈통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인간 중심적 사회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아벨의 후손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보호를 믿지 못해, 심하게 말하면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해서 스스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며 생존하겠다는 인간의지의 표현입니다. 여기엔 하나님께 영광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인간이 중심이 되고 인간의 힘과 능력이 과시되고 인간 자신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게 목적입니다. 이 세상은 원시시대나 현대나 하나님을 떠나 독립한 가인의 후손들이 만들어 온 세상입니다. 오늘 가인 후손의 이야기는 세상의 특성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자 분노와 시기심이 일어나 동생 아벨을 들로 데려가 죽였습니다(8절) 하나님은 가인에게 아우는 어디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가인에게 잘못을 깨닫고 돌이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왜 아벨을 나에게 와서 찾느냐며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잡아 땠습니다. 죽어도 아니라고 부인하고 보는 게 죄인의 속성이죠. 그러자 하나님은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10절). 이것은 무죄한 자를 피흘리는 죄를 하나님은 모른척 넘어가지 않으신다는 걸 보여줍니다.

살인자가 된 가인에겐 저주가 선언되었습니다(11절). 저주라는 말은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는 행위, 또는 그 결과로 일어나는 재앙이나 불행을 의미합니다. 농사군이었던 가인에게 땅이 더 이상 효력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땅을 의지하고 살 수 없게 되어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땅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도시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도 이곳 저곳 떠돌며 사는 것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인간관계도 어렵죠. 그 당시로서는 고향 땅을 강제로 떠나는 추방은 가혹한 처벌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가인은 자기가 받을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불평하고 낯선 땅에서 해를 당할지 모른다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을 해하는 자는 일곱 배로 벌을 받을 것이라는 표식을 주어 누구든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조치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은 당시 사람이라고 해야 아담과 이브와 가인과 아벨이 전부였는데 누구 있어 가인에게 보복을 한다고 가인은 그런 말을 했을까요? 이 부분은 성경의 난해 구절 가운데 하나인데, 몇 가지 견해를 소개하면, 장차 태어날 아담의 또 다른 후손을 염두에 둔 말이다(Delitzsch), 들짐승을 가리킨다(Josephus), 이미 아담과 하와 사이에 태어난 다른 자녀가 있었을 것이다(Havernick)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인은 고의적인 1급 살인죄를 범했으니 사형에 해당하지만,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생각해 방랑자로 살면서 참회할 기회를 주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인이 집에서 쫓겨날 때 제일 가슴 아픈 사람은 어머니 이브였을 것입니다. 동생을 죽였다고 해도 어머니에겐 아들이 벌을 받아 집에서 쫓겨나는 걸 볼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가인의 악한 행위만 놓고 보면 쫓겨나는 벌이 부족할 정도지만, 어머니 이브에겐 참 안 된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잘 살기 바랍니다.

16절엔 가인이 여호와를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했다고 나옵니다. ‘떠나다’는 말 ‘야차’는 ‘달아나다’, ‘피하다’(렘11:11)는 뜻도 있습니다. 가인은 하니님께 쫓겨나기에 앞서 마음 속으로는 자기가 먼저 하나님을 떠나 멀리가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 ‘거주하다’는 단어 ‘야솽’은 ‘계속 정착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유리하는 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다시 한 곳에 안주하여 살려고 성까지 쌓고 있었습니다(17절).

가인은 하나님께 쫓겨나기 전에 자기가 먼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살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가인으로 상징되는 인간형은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욕망을 위해서는 하나님도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독립해 살려는 사람입니다. 세속적 문화들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 온 것입니다. 고대도시부터 현대 도시에 이르기까지 도시문화는 거의 모두 인간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17절에 가인이 성을 쌓았다고 한 것은 영어 번역을 보면 도시를 건설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그 후손들은 자기들 방식으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이브, 그리고 가인과 아벨이 아무런 문제 없이 에덴 동산에 그냥 살았다면 이런 도시 건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구 수가 계속 증가하면 그 다음엔 어떤 형태로든 인공이 가미된 생활방식이 생겨났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인간이 중심이 되는 그런 도시 문화가 그렇게 빨리 생겨나지는 않았겠죠.

놋 땅으로 이주한 가인은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가졌던 의문 가인과 아벨 외에 또 누가 있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합니다. 가인이 아내와 동침해 에녹을 낳았다고 한 걸 봐서 성경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브가 낳은 딸이 최소한 한 명은 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고 그런 관점에서 가인과 아벨 외에 다른 아들들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선 친족이나 부족간에 결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18절부터 24절까지는 가인부터 시작해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 야발과 유발 / 두발가인과 나아마까지 7대에 걸쳐서 가인이 아들과 손자들을 얻은 기록이 나옵니다. ‘에녹’은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가인이 아들 이름을 ‘시작’이라고 지은 것은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 계보가 시작된 것을 시사합니다. 특히 5대 후손 라멕은 일부일처를 깨뜨리고 자기 욕망에 따라 두 여인을 아내로 둔 첫 케이스입니다. 첫째 부인 아다의 장자 야발은 천막에 살면서 짐승 치는 유목민들의 조상이 되고, 그의 동생 유발은 수금을 켜고 퉁소를 부는 기악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둘째 부인 씰라의 아들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철 연장을 만드는 대장장이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라멕의 아들에게 와서 나름 서로 다른 세속적인 전문직업이 생겨난 걸 볼 수 있습니다. 천막 짜는 기술이든, 목축일이든, 악기를 다루는 재능이든 철 연장을 만드는 기술이든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평가되는 사회가 시작된 겁니다. 이런 사회에선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은 무익한 존재로 취급당합니다. 이런 사회에선 인간이라는 사실 만으로는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인간을 도구적 가치로 평가하는 사회를 만듭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반성하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학적 혹은 철학적 고찰이 없이 그냥 세속적 관점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가치 있는 사람인지 무용한 사람인지 차별합니다. 평생 수고롭게 일했으니 마땅히 쉬면서 대접받아야 부모님들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그런 대접을 받다 보니 자괴감이 들어 이젠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탄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녀들이 지켜야 할 문화는 아닙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지 무슨 일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은 컴퓨터를 잘 다루든지, 음악을 잘 한다고 더 가치있게 평가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는 일로 사람으로 대우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유명인사들은 물건을 만들어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 예컨데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빌게이츠는 컴퓨터 관련 제품(Software)을 만들어 돈을 벌어 세계 1등 부자가 되어 최고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 외에 자동차 만들어 부자된 사람들, 스마트폰 만들어 부자된 사람들, TV만들어 부자된 사람들, 항공기 만들어 부자된 사람 등 모두 그들이 한 일 때문에 대접받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공부하고 일하고 있잖습니까?  이런 곳에서 대개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의 나라니, 옳고 그른 인생이니 뭐 이런 건 없습니다.

기계나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적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무 매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거나 찾을 경우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바꾸려고 들겠죠. 그것이 바로 세속적 축복을 가져다 주는 물질중심의 하나님입니다. 요즘 많은 설교에서 전후 문맥 없이 이렇게 물질로 복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기독교는 물질을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물질 그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것이며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물질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탐욕입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열망하면서 물질은 우상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될 때 물질은 악한 기능을 하게 됩니다. 물질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닌데 인간의 탐욕이 물질을 하나님자리에 올려 놓기 때문에 물질중심의 사회는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선택의 여지 없이 이 물질 중심의 사회 속에 편입됩니다. 물질 중심의 세상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걸 거부하기엔 세상은 너무 강하고 개인은 너무 약하기 때문에 생존의 과정에서 물질 중심의 사회에 적응하거나 약간의 양심을 유지하면서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물질 중심의 가치관 내지 생활방식은 가정과 학교에서 자녀들에게 심어집니다. 이런 사이클을 통해 우리는 물질 중심의 사회에서 탐욕을 정당화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문제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물론 물질중심의 세상과 타협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인들 중에는 그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머잖아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 나라와 물질적 탐욕을 추구하는 세상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물질적 필요에 대해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독립해 살려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시스템 속에서 생존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동차를 만들고 컴퓨터를 보급시키고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를 만듭니다. 사람들은 그걸 구입할 돈을 벌기 위해 또 일합니다. 집이든 자동차든 더 좋은 물건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일하다 늙어갈 것입니다.

뭘 그렇게 따지며 살 게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분도 있겠죠. 이건 따져서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고 참 신앙에 대해 고민할 때 따라오는 생각입니다. 본래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진짜 예수님을 잘 믿고 따라갈 것인가 생각한 것인데,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고 무엇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힘들게 하는가 그런 차원에서 물질중심의 세상이 문제라는 걸 인식하게 되는 겁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하는 지 볼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항상 우리 자신의 몫입니다. 설교자는 더 힘써 자기가 설교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설교를 듣는 분들 또한 듣고 감명받은 것으로 끝나면 자신을 속이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을 때는 설교자를 칭찬할 게 아니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부담을 느껴야 합니다. 감명이란 성령께서 그 말씀대로 살라고 깨우쳐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은 지금보다도 더 물질 중심적인 사회가 될 겁니다. 그 어느 세대보다 여러분은 돈과 물질에 더 얽매여 살 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얽매여 사는 게 보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신앙생활과 물질 중심의 세상에서 한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고 싶은 사회생활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은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용의 미덕을 말하지만, 신앙생활과 사회생활 사이에는 이걸 적용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이냐는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좁고 험해도 생명의 길을 찾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