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소명과 헌신

창세기6:1-22

지난 주 셋으로 시작되는 언약의 후손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형편이 어떠하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언약의 후손이 되는 게 제일 복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얻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노아의 소명과 사명을 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 시대적 배경부터 살펴봅시다.

6장 1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때는 노아가 살 던 시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5장에 기록된 아담의 족보를 참조해보면, 노아는 아담 창조로부터 1056년이 지났을 때 태어났습니다. 천 년이 흐르는 동안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가 이어져내려오고 그 당시 사람들은 800년, 900년을 살면서 많은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아담을 예로 들면 130세에 셋을 낳고도 800년을 더 살면서 자녀들을 낳았다고 합니다(창5:4). 아담은 9대 후손 라멕이 태어날 때까지 살아있다가 노아가 태어나기 14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담이 살던 세상은 9대가 공존하던 사회였습니다. 아담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은 모두 셋과 항렬이 공급이니 아기 할아버지, 아기 할머니들이 태어나고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땅 위에서 사람들이 번성한 것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라는 축복의 결과였습니다. 지금도 자녀를 얻는 것은 축복이고 기쁜 일이지만 사람이 귀한 그 당시는 더 그랬을 것입니다. 그 당시는 피임이라는 개념도 없을 때니 신체 건강한 부부들은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할아버지 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집집마다 적어도 다섯 여섯 자녀가 넘었습니다. 5,60이 넘으면 출산이 어려울 때도 그랬으니 500살이 넘어도 자식을 낳았다고 하니 자식들을 수십명씩 낳았을 것입니다.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 미모를 우선해서 자기 맘에 드는 여자들을 데려다 아내로 삼았다고 나옵니다. 이것을 5절과 연결시켜 보면 남자들이 이쁜 여자들을 취하는 과정에서도 악한 음모와 다툼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이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지체 놓은 집안의 아들들’(유대랍비들 Onkelos, Symmachus, Aben Ezra), 또는 ‘천사’(Lxx, Josephus, Tertullian, Luther, Baumgarten, Kurtz, Alford), 또는 ‘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Augustin, Calvin, Lange, Keil, Wordsworth) 세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세번째 ‘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로 보는 것이 무난할 듯 보입니다. 다 같은 아담의후손인데 딱히 누굴 지체가 높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고, 지체가 높다고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또 천사라고 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천사와 사람이 혼인해 자식을 낳고 산다는 것도 성경에 근거가 없고 타락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천사가 되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의 딸 역시 ‘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딸들의 아름다움은 '미모'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과 선한 행실, 아름다운 마음씨 등과 같은 내면적 아름다움은 보지 않고 얼굴이나 몸매 같이 외모만 보고 서로 이쁜 여자를 얻으려고 경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좋게 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셋의 후손들도 세속적인 가치관에 오염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형제들이 신앙과 인품 같은 것은 귀하게 봐야지 미모만 따져 교회도 안 다니는 불신자인줄 알면서도 이쁘다고 따라다니며 데이트하고 결혼하고 그러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런 걸 보고 실망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그 이유는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신’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문자는 루아흐인데, 바람, 호흡이라는 뜻으로 문맥상 ‘하나님의 신’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생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죄로 타락한 인간상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들의 날이 일백 이십 년이 된다는 것은 당시 모든 사람들의 수명이 일백 이십 년으로 한정된다는 것보다 120년 후에 대홍수 심판이 일어나 결국 앞으로 120년 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봐야 할 것 입니다. 홍수 후에 태어난 사람들도 3,4백년이 넘게 다 살았습니다. 120년은 심판의 유보이자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은혜의 기간이었습니다(벧후 3:9). 어떤 사람은 왜 예수님이 빨리 안 오시냐고 하는데 더디 오시는 게 은혜입니다.

4절에 네피림은 그냥 히브리어를 음역한 것입니다. 네피림이 누구냐 하는 것은 앞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릅니다. ‘네피림’ 이 단어를 '떨어지다'(fall)란 뜻을 지닌 동사 '나팔'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Hoffman, Delitzsch)은 '네피림'을 하늘로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의 후손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70인역(LXX)은 네피림을 '장부'(丈夫)란 뜻의 '기간테스'로 번역했고, KJV도 70인역을 따라 '용사', '거인'이란 뜻의 'giant'로 번역하여 네피림을 타락한 천사, 또는 천사와 인간의 혼혈족으로 보지 않고, 신체적으로 거인족으로 불릴만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봤습니다. 이들은 거인일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훼방꾼, 무법자, 난폭꾼, 등의 속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아 당시의 '네피림'은 거대한 신체를 지닌 '폭꾼들',  '침략자들' 정도로 보는 될 것입니다(Luther,Calvin,Keil, Murphy).

그 다음 5절부터 8절에는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세상은 죄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항상 악하고 자기 유익을 도모하며 하나님의 질서는 무시하고 깨뜨리며 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것이 한탄스럽다고 하셨습니다.

5절에 죄악으로 번역된 ‘라아’는 “깨뜨리다, 상하게 하다, 쓸모 없게 하다” 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어기거나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악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관영했다는 말이 암시하듯 사람들의 죄악이 실수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죄의 뿌리가 깊게 박혀 있어 죄악이 생활화된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죄악은 타락한 이후 인간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죄성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선택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마음(* ,레브)은 주로 악한 감정과 관련되어 있고, 생각(* , 마하솨바)은 의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바르게 하려면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증오나 분노의 감정에 휘둘릴 때는 마음을 바르게 하기 힘들죠. 감정의 지배아래 있을 때는 의지로 잘 안됩니다. 생각은 비교적 의지로 잘 됩니다. 감정은 잘 안돼도 생각은 의지로 비교적 쉽게 전환됩니다. 의지로 생각을 바꾸고, 생각이 바뀌면 그 다음 감정이 다소 조절되고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노아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타락한 육신의 욕망에 따라 악한 생각을 하고 감정의 지배를 받으며 나쁜 마음으로 품고 악행을 저지르며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에게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한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노아는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엔 노아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의인으로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입는데 있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인가 아니면 인간편에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그 어떤 면이 있어 그런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8절에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언급했지만, 이어 9절에 노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그런 면이 있다고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의인처럼 보여도 다 죄인이라는 차원에선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얻을 수 없다는 말씀에(롬 3:10-12) 동의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인간 측의 적극적인 반응과 노력도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아에게 적용된 ‘의인’,  이쉬 차디크의 '차디크'는 ‘의로운, 공정한’ 뜻으로 곧다, 올바르게 행하다’ 는 뜻을 가진 ‘차닥’에서 온 말로 전혀 무죄하거나 흠 없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래도 경건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어찌 하나님 앞에 완벽하겠습니까? 부족한 면이 있지만,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며 살려고 애쓰는 노아의 노력을  하나님께선 높이 평가하사 '의인'(義)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적 개념의 의인이라기 보다는 상대적 개념이죠.

그 다음 완전한 자, ‘이쉬 타밈’에서 '타밈'은 온전한, 성실한의 뜻을 가지고 있고, ‘완성하다, 완수하다’는 동사 ‘타맘’에서 파생된 단어로 '차디크'와 마찬가지로 한 점 티도 없이 완벽하다거나 전혀 허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 성실히 노력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노아가 '의인', '완전한 자'로 성경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격 혹은 인품이 완벽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한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믿어 구원얻었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우리의 삶의 진보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딤전 4:12, 15).

끝으로 노아의 소명과 사명에 대해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13절에서 22절을 보면, 하나님은 노아에게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 극심해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단계에 이르러 이젠 그들을 멸해야 겠다고 말씀하신 후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어 너와 가족들이 대피하고 각 종 생물들도 암수 한 쌍을 방주에 들여 생명을 보존케 하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이런 지시는 6장 3절의 120년이 되리라는 구절을 참고할 때 홍수 120년 전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만드는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게 닥쳐올 심판을 알리고 죄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권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홍수로 멸하지 않고 120년 후에 그리하신 것은 사실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충분한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방주의 크기와 부피는 대략 길이 137m, 배수량 2만톤으로 평가됩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제작하라고 하실 때는 셈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실 계획을 말씀하실 때는 노아가 480세 때이고 셈은 노아가 502세 때 낳았습니다. 그러니까 홀로 배를 만들기 시작했고 배를 만드는 동안 세 아들을 낳고 또 자식을 결혼시키고 그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100년이 넘게 배를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과 인내를 보여줍니다. 홀로 배를 만드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비움을 꺼리가 되면서도 하나님 명령을 받들어 그 오랜 세월동안 배를 만드는 일에 인생을 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개척교회하는 것처럼 외롭고 힘든 과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힘들고 외롭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방주 만드는 일이 자기 사명이 된 후엔 오히려 그 일을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에게 맡겨주신 것을 영광으로 알고 그 일에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감사하고 즐거워집니다. 교회 일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생각하면 힘들다고 할 수 없죠.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이 한 구절은 노아가 120년 동안 믿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배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심판을 전한 모든 수고를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였다”고 기록되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나가서 방주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사명은 예수 믿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이 앞으로 120년이 걸릴지 그 보다 훨씬 빨리 올지 아니면 훨씬 더 늦어질 지 아직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 말씀을 믿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고 그렇게 사는 것이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