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령을 품으면

사도행전 3장 - 안나실 목자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의 승천과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명령, 그리고 배반자 유다 대신 맛디아 사도를 뽑는 내용이고, 2장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는 마지막 기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셨고, 그 증거로 각국의 언어로 된 방언이 터졌으며, 이어 베드로가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들어가며 설교하자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고, 초대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어 날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서로 나누어 쓰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내용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3장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치유를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불치병을 앓았던 자가 치유 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치유의 역사가 어떻게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또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3장 1절에 보니 제 9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3시, 6시, 9시인데 오늘날의 시간으로 하면 오전 9시, 낮 12시, 오후 3시입니다. 그러니까 오후 3시쯤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는 습관에 따라 성전에 올라 가다가 미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여서 40여 년 동안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미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쪽에 있는 황금문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였다고 합니다.
 
  2절에 ‘날마다’ 라는 단어로 보아 이 앉은뱅이도 오늘 처음 그 곳에 있게 된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 영화 속에 나오는 거지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동전을 많이 얻을 수 있는 ‘몫’ 이 좋은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을 봅니다. 이 앉은뱅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가족인지, 친구인지, 동네 사람들인지 모르겠지만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동정과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겨 그를 성전 입구에 데려다 놓았을 것이다.그날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걸 하기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불쌍한 표정으로 성전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의 동전을 구했습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의 앞에 섰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오늘 처음 성전에 기도하러 간 것이 아니라 습관에 따라 그 날도 성전에 갔습니다. 여러 번 마주 칠 수 있었는데 ‘오늘’ 이라는 바로 이 날 기도하러 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앉은뱅이인 이 사람을 ‘주목하여’ 보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목했다는 것은 뚫어지게 그만 쳐다 보았다는 것입니다. 늘 그 자리에서, 늘 같은 모습이어서 특별히 눈에 띄지 않았을 텐데 베드로와 요한이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앞에 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성령과 교통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멈추고 이 사람을 보라’ 고 하셨을 것입니다. 기도하러 가는 중이라 하여도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했고, 그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했기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동안, 예배하는 동안만 교통함이 아니고 매일 매 순간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았기에 기도하러 올라 가던 중에 성령과 긴밀한 연합을 이루어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로 사용되었습니다.
 
  기도회에 참석하고, 예배를 드려야만 성령과 동행함을 느끼고 체험하게 된 것이 아니라 늘 동행할 때 성령께서 하려고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기도회에 참석하고 예배를 드릴 때 그것이 곧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일주일에 한 두 번씩 기도회나 예배 모임에 참여한다 해도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도리어 죄책감에 사로 잡혀 용서만 구하다가 또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삶을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과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는 자,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된 자,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어떤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를 원하실 때 그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베드로와 요한이 그랬습니다.
 
  우리를 포함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생각이 분산되어 있고, 삶이 너무 바쁘고,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집중할 시간적 여유나 마음의 여유가 없이 살아갑니다. 남이 나를 상관하는 것이 싫고, 또 내가 남을 상관하는 것이 귀찮아 우린 너무 많이 못 본 척 합니다. 자신의 시간과 재물과 마음을 별로 귀하게 보이지 않는 자에게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더 솔직히 말하면 되돌려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못 본 척 외면 합니다.반대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동정심을 유발 합니다. 마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처럼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주목을 받게 된 앉은뱅이의 나이는 40세로(행4:22)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알 만큼 아는 자였습니다. 소문을 통해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마가 다락방에서의 성령 강림의 오순절 사건을 분명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함으로 삼 천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으며, 그들이 늘 함께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하며, 음식을 나누고, 재물도 서로 나누어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혹여 라도 그 사랑의 나눔이 자신에게 풍성하게 전해질까 ‘우리를 보라’ 고 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기다렸다는 듯이 쳐다 보았을 것입니다.
 
  이런 기대와 달리 베드로와 요한은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신 성령의 권능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앉은뱅이가 원하는 그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 고 하였습니다. 무엇인가 얻을 것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 앉은뱅이 귀에 들려 온 말은 ‘은과 금은 내게 없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앉은뱅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자신을 놀린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았을까요? 예수쟁이들의 리더라 일반 사람들보다 뭔가 달라도 다를 것이라 기대했는데 무척 실망하지 않았을까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다면 영업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갈 길 가기 바라지 않았을까요?

  이때 베드로와 요한이 다시 말했습니다. “네가 기대하는 은이나 동전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이 있는데 그것을 네게 주고 싶다” 아마 앉은뱅이의 귀가 다시 솔깃해졌을 것입니다. “동전이 아니더라도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라도……” 포기하고 낙담했던 마음에 다시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지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에게 무엇인가 하기를 원하신다. 평생을 일어나 걸어 보지 못한 당신을 일어나게 하시려고 하니 믿음으로 우리의 손을 잡고 일어나 걸으라” 고 선포한 것입니다.

  무식하고 배신자였던 베드로,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하고서도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 버렸던 바로 그 베드로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은 내 뱉을 수 있겠습니까? 유창하고 설득력 있는 설교까지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4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어나 보지 못하고 걸어 보지 못한 앉은뱅이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 하는 것은 제 정신으로선 내뱉을 수 없는 말입니다.  참으로 긴장되는 순간입니까? “어쩌다 큰 소리는 쳤는데 결과가 좋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성경 그 어느 곳에서 성령의 권능을 받은 이후로 베드로는 전처럼 소심하고, 무례하고,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담했고, 다른 이의 고통을 아파하며 불쌍히 여겼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의지하는 겸손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바로 이것입니다.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 보다 우선하는 것 그것은 바로 마음의 변화로 인한 말과 행동의 변화인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라 하였습니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입어 더 이상 자신을 정죄하지도 않고, 더 이상 열등감에 빠지지도 않고, 더 이상 소심해 하지도 않는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고, 설교하고, 성령이 주목하게 하심을 따라 주목하는 성령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생수의 강’ 이 흘러 넘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베드로 자신도 이 순간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을 지도 모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밤이 맞도록 수고하여도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여 포기하고 그물을 손질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다시 고기 잡으러 바다로 나가자.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려 보아라.”고 했을 때 자신에게만 집착했다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예수님의 실체를 그는 체험했기에 바로 그 예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이 사람 앉은뱅이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리라 확신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까? 앉은뱅이를 일으키려 하다니…… 성령의 행하게 하심을 따라 행함이 아니라면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앉은뱅이가 “ 이 양반들 보소. 내가 원하는 것은 주지 않고 나 보고 일어나 걸으라고 하네. 미쳤나. 내 꼴이 보이지도 않나.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다리가 오그라져 설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소. 당신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내가 뭔가를 기대했던 것이 잘못이지. 어서 가던 길 가시오. 오늘은 재수가 없네.” 라고 자기 연민에 빠진 반응을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앉은뱅이가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면, 또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오. 당신들의 동정심은 내가 고맙게 받겠소만 앉은뱅이인 내가 어찌 일어날 수 있겠소. 더 이상 힘 빼지 마시고, 웃음거리가 되지 마시고, 나를 두 번 죽이지 마시오” 이렇게 말하며 베드로의 손을 뿌리쳐 버렸다면 그는 그 곳에서 구걸하다가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면서 앉은뱅이가 베드로가 내민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그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기운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가 그 손을 잡아 일으킬 때 뿌리치지 않고 도리어 힘껏 잡아 일어서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겨 일어설 수 있었고, 걷고, 뛰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자신의 살을 몇 번이고 꼬집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10절에 이것을 본 모든 백성이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워’ 했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성령 강림 때도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마음이 요동치고 있을 바로 그 때 베드로는 이 사건과 이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2절에 백성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려고 하자 베드로는 자신들에게 향하는 주목을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 이 앉은뱅이가 나은 것은 자신들의 권능이나 경건이 아니라 유대 백성들이 부인하고 십자가 처형을 했던 바로 그 예수가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니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촉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베드로를 통해 하시려는 일은 앉은뱅이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이 치유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한 병자를 병에서 놓여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구원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주시는 예수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행3:4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주목했고, 행3:12에는 그것을 본 수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습니다. 똑 같이 사람을 주목했지만 주목한 이유는 달랐습니다. 두 사도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하려 하시는 일에 주목했고, 군중들은 두 사도들에 의해 나타나 보여진 능력으로 말미암아 두 사도에게 집중했습니다.

  주어진 상황은 똑 같은데 무엇이 다릅니까? 바로 관점입니다. 두 사도에게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성령의 지배 하에 두었기 때문에 그 앉은뱅이를 여러 거지들 중의 하나, 무심코 던져 주는 동전에 생명을 걸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저 불쌍한 자들 중의 하나라고만 보지 않았습니다. 성전을 그 날 처음 간 것도 아닌데 그곳에 그 앉은뱅이 혼자서만 구걸한 것도 아닌데 바로 그 날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은 성령께서 말씀 하셨기 때문이라 봅니다.
 
“저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라. 저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으니 자신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다. 이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선포해야겠다. 이 자를 통해 나면서부터 깨닫지 못해 영적으로 앉은뱅이 된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 너는 순종하겠느냐? 성전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 네가 앉은뱅이 더러 일어나라고 소리치면 그 사람들이 다 쳐다 볼 것이다. 어떤 이는 웬 미치광이냐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요 근래 예수쟁이들이 뭔 이상한 능력을 받아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데 정말인가 하는 호기심으로 바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너는 할 수 있겠느냐? 내가 시키는 대로 내가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할 수 있겠느냐?”

  그들이 과거의 자신의 모습만 보았다면,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의 권능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두 사도는 서로 이렇게 해보자고 의견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들을 지배하시는 성령께서 하라고 하는 대로 주저함 없이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임하시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과 환경을 바라보는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눈으로 지금 성령께서 어떤 누구를 통해 어떤 일을 하려고 하실까 하며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군중들은 어떻습니까? 두 사도를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과 표적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니 성령을 보지 못하고 사람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도 그러했습니다. 수 없이 많은 이적과 기사를 베풀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가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외적으로 드러난 표적에만 관심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의 자리까지 내 몰고 갔습니다. 이제 두 사도가 자신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시선을 원래 돌려야 할 자리로 옮겨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생명의 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빌어 예언하신 메시야 바로 이 분께 시선을 집중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생명을 얻는 길이고, 악함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교회를 섬기는 자들은 이런 마음과 태도, 생각을 지녀야 합니다.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날 때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릴 수 있는 겸손이 꼭 필요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나면서부터 40여 년간 앉은뱅이로 삶을 살아왔던 한 사람이 성령께 사로잡힌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생애 처음으로 일어나 걷고 뛰고 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또 베드로와 요한은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상황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께 민감하게 반응하였기에 자신들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역사의 현장 가운데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생’이라는 시간을 세상 속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동안 나 외에 다른 사람의 인생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하며 행복한 일입니다. 바로 이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자신으로 인해서 남편이, 아내가, 부모가, 자녀가 그리고 나아가 관계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고 있으면 주변을 돌아 볼 수 없고,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없으니 성령께서 주목하시는 그 어떤 자를 주목하여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 봅시다. 우리 주변에 앉은뱅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전 미문처럼 멋 있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지만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공허하게 살아가는 앉은뱅이들, 자신의 소욕에 따라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영적 앉은뱅이들! 성령은 그들이 더 이상 앉은뱅이로 살기를 원치 않으셔서 바로 우리를 통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십니다.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들을 일어 서게 하려 하십니다. 우리가 그들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는 순종을 통하여 그들의 무너져 내린, 마비가 된 발과 발목에 새 힘을 주어 주 안에서 걷고, 뛰고, 찬양하게 하시려고 합니다. 그것을 깨닫습니까? 그것을 유심히 뚫어져라 주목하여 보고 있습니까? 성령께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시는 즉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를 원하시는 바로 그 사람의 손을 붙잡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늘푸른 가족 여러분,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영적인 안테나를 성령께 맞추며 삽시다. 그래야 성령께서 주목하여 보시는 그 어떤 자에게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그 사람에게 하려고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