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자카르), 생각하라(빈), 설명하라(나가드)

신명기 32장 7절-안나실 목자

요즘 '기억'과 관련된 드라마가 자주 방영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 소중한 것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기억’이라는 것입니다. 본 것과 들은 것, 그리고 느낀 것들을 저장해 놓을 수 있는 기억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고 놀라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뇌를 연구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경로를 통해, 또 어떤 방식으로 기억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사용되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또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를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아주 먼 과거로부터 조금 전에 일어난 일까지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억과 관련해 또 하나의 선물은 ‘망각’일 것입니다. 과다기억 증후군처럼 망각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아 본 것, 들은 것, 상처 받은 것 등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는 것을 부러워해야 할 능력이기 전에 어쩌면 도리어 크나큰 불행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적당히 기억하고, 적당히 망각하며 사는 평범한 삶이 은혜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망각해야 할 것들은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것들은 쉽게 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또 잘못된 기억을 사실로 받아들여 오해와 편견 속에서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왜곡시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잘못된 기억, 상처 받은 기억들을 지우개로 지우듯 그렇게 지울 수 없으니 새로운 좋은 기억이 저장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읽게 된 <죽기 전에 한 번은 유대인을 만나라>는 책의 첫 페이지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대화를 방해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당신은 구급차에 실려 있거나 실리게 될 사람을 진심으로 동정할까? 아니면 대화를 방해 받았다는 생각에 다소 짜증이 날까? 비슷한 맥락으로 만일 한밤중에 들려오는 소방차나 경찰차의 다급한 사이렌 소리 때문에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책의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소음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동정이 아니라 짜증인 경우가 많다고 말하면서 유대인 랍비의 가르침을 제안하였습니다. 그것은 소방차 소리가 우리의 평온을 깨뜨릴 때마다 소방차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나 집을 구할 수 있게 빨리 현장에 도착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전에는 사이렌 소리에 불안한 마음이 들거나 혹은 무관심으로 지나쳤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은 다음부터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저의 기억을 새롭게 바꾼 것입니다. 이렇게 좋지 않은 느낌이나 기억 위에 새롭고 좋은 기억을 덮는다면 우리는 훨씬 더 화평하게, 너그럽게 그리고 사랑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신명기 32장은 40여 년의 긴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외친 모세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마치 임종을 앞둔 부모가 자녀들에게 마지막으로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을 유언으로 남기듯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함께 가지 못하는 영적 리더인 모세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설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인한 멸망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노래함으로 후손들에게 범죄의 결과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복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서 이스라엘의 완전한 타락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노래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지만 믿음이 차원에서 그 연대와 삶의 상황은 다를지라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여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43절까지의 노래 중에서 7절의 말씀에 쓰인 동사들이 이 노래의 핵심 포인트라는 생각이 들어 그 단어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7절의 말씀을 다같이 다시 한 번 읽어 볼까요?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1. 옛날을 기억하라.
‘기억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카르’(zakar) 인데 ‘기억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등의 뜻으로 사람의 정신적 활동을 의미합니다. 때로 이 단어가 ‘권고하다’의 뜻으로도 쓰이는데 이는 사람들의 망각을 일깨워 잊어버렸던 사실들을 떠올리고 기억하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자카르’는 단순히 과거의 어떤 사실을 기억하고 암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묵상하고 회상하고, 스스로를 권면하여 일깨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영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모세가 “옛날을 기억하라”고 한 말 속에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과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명령에 따라 오늘날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묵상하고, 회상하고, 스스로를 권면하여 일깨우며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이방의 노예로 고통 당하며 소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을 때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으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며, 그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주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하나님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저와 여러분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부터 택하셔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며, 천국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얻어 생명과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가게 하신 바로 이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며, 우리 주변을 둘러싼 온갖 걱정, 근심, 염려들로부터 자유를 경험케 하는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의 배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무지와 광야에서도 밭의 소산을 먹고 반석에서 꿀과 기름을 얻게 하셨고, 젖과 밀과 포도즙을 풍성히 얻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요하고 윤택해지자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경홀히 여겨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마귀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켜 광야 40년 동안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길고 짧은 문제를 떠나서 우리 역시 삶의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수 없이 배반했고, 경홀히 여겼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는 즉각적으로 징계를 하셨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로 끝까지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들에게 교훈을 주면서 11절에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저희 중에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렇게 거울과 경계로 삼는 것, 이것이 바로 모세가 명령한 옛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징벌과 회복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들이 잘못을 돌이키기 위해 징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의 패역한 행동에 대해 징계하셨습니다. 그들을 완전히 버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10절엔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려고” 징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체벌의 타당성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만 우리가 그 은혜를 거역할 때는 우리가 다시 그 거룩함에 참예하도록 징계를 아끼지 않으신다는 사실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옛날을 기억하라’고 한 것은 단순히 ‘과거에 얽매여 살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옛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삶의 발자취들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미물 같이 하찮은 존재인 나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그의 거룩하심에 동참케 하시려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고비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으며,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잊지 않고 묵상하고 회상함으로써 그 사건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교훈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옛날을 기억해야 할까요? 에스겔서 6장에는 우상 숭배에 빠진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 그 중에 남은 자를 두시겠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9절에 있습니다.
“너희 중 피한 자가 사로잡혀 이방인 중에 있어서 나를 기억하되 그들이 음란한 마음으로 나를 떠나고 음란한 눈으로 우상을 섬겨 나로 근심케 한 것을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 이는 그 모든 가증한 일로 악을 행하였음이라”
또 민수기 15장 40절에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답을 찾았습니까? “기억하고 스스로 한탄하리니”라는 말은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기억’이 참된 회개를 불러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서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옛날’을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억이 우리의 과거의 삶을 회상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떠올리게 할 뿐 아니라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2.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빈’(bin)은 단순한 ‘생각’보다는 ‘분별과 통찰’의 뜻이 훨씬 강한 단어입니다. 이 동사에서 파생된 히브리어 명사는 ‘비나’(binai)와 ‘테부나’(tebuna)으로 ‘이해, 깨달음, 분별, 명철, 지식’ 등으로 번역된 것으로 볼 때 이 단어는 단순히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진리에 대한 깊은 숙고를 통해 분별함으로써 새로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두 가지 방법을 통해 무언인가를 인지합니다.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판단력과 통찰력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릅니다. ‘경험을 통한 깨달음’은 말 그대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등 사물과 환경의 경험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고, ‘판단력과 통찰력을 통한 깨달음’은 주의 깊은 관찰이나 숙고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한 것은 이러한 통찰력으로 연대와 연대를 잘 살피고 숙고하여 그 속에 있는 의미와 차이점들을 잘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에서 영원까지 도도히 흘러가는 하나님의 심오한 뜻과 계획이 역대의 연대, 즉 지나 온 역사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그것을 세밀하게 살펴서 발견하고 깨달아 그 하나님 앞에 바로 서라는 것입니다. 
작년 10월 둘째 주일부터 지난 주까지 목사님을 통해 열왕기서에 기록된 유다 왕들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도니야의 반역과 최후’, ‘하나님을 떠난 르호보암’, ‘아비야의 두 모습’, 안타까운 아사왕’, ‘부귀 영화를 누린 여호사밧’, ‘우상숭배로 망한 여호람’, ‘혼돈의 정국 7년’, ‘요사스는 왜?’, ‘교만으로 넘어진 웃시야’, ‘넘어질 뻔한 히스기야’, ‘요시아의 신앙개혁’ 등 총 11번에 걸쳐 유다의 왕들의 삶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대면하였습니다. 수양회에서 공부 – 사울 왕, 다윗 왕, 압살롬 - 한 것까지 다 합한다면 이스라엘의 왕조 역사는
거의 마스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여러분들 중에는 우리나라 역사도 모르는데 굳이 남의 나라 역사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반문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지역도 잘 모르고 또 이름도 생소한 왕들의 이야기를 하니 그저 귀에 왕왕거리는 소리로만 들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고리타분한 옛날 얘기만 한다고 생각하여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아예 졸거나 했을 것입니다. 또 아니면 - 이건 정말로 바라는 바이지만 - 모세의 명령처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며 말씀을 들은 사람들, 그래서 그 연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얻은 사람들도 혹 한 두 명은 있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 세계에서 최초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느 나라에서 쏘아 올렸습니까?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쏘아 올렸는데 그 이름은 ‘Sputnik 1호’ 입니다. 이에 미국이 받은 과학 기술과 교육 부문의 충격을 일컬어 ‘Sputnik Crisis : 스푸트니크 충격’ 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합니다.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은 새해 국정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세대는 (제2의) ‘Sputnik Moment’을 맞고 있다”
나라 밖으로부터 오는 자극을 내부 혁신의 원동력으로 삼기 위해 ‘Sputnik’를 환기시킨 것입니다. 좋게 말해서 자극이지 사실은 미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입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문제에 매일 직면하여 빠른 시간에 해법을 찾고,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려면 ‘블링크(Blink)’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블링크란 ‘눈 깜박하는 순간’을 말하는 것으로 긴급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결정을 내릴 때 첫 2초 동안 무의식에서 섬광처럼 일어나는 순간적인 판단을 뜻합니다. 우리가 보통 직관, 육감, 혹은 통찰이라고 부르는 능력입니다.
블링크 능력을 또 다른 말로 ‘Deep Smart’라고도 하는데, 이는 비즈니스 경영에서 “복잡하고 상호적인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 시스템을 꿰뚫어보며 신속하고 전문적인 결정을 내리는 능력, 필요에 따라서는 역으로 그 시스템의 개별 요소를 속속들이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교과서에 나오지 않고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해결 능력, 즉 직관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갖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든 상관없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책을 읽되 치열하게, 그리고 아무 거나 읽지 말고 무엇보다 인문 고전을 집중적으로 읽으라고 권면합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 분야의 고전은 천재의 두뇌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인문 고전 독서는 곧 천재와의 대화라는 것입니다. 짧게는 몇 백 년, 길게는 수천 년 된 지혜의 산삼을 먹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쓴 인문 고전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과 내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으로 이 세상의 연대가 시작이고 끝이라면, 아니 조금 더 넓혀서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조상들로 시작해서 여러분의 자녀까지가 이 세상의 연대가 시작이고 끝이라면 굳이 그 세대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분별하여 지혜를 얻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세대를 분별하는 명철과,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명철과 지혜가 바로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흘러온 인간의 역사를 연구하고 깊이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공중 권세 잡은 자, 사단의 세력을 파하는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질문에 설명하라(나가드).
 ‘설명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히브리어 ‘나가드’는 “어떠한 것을 사람 앞에 높이, 눈에 잘 띄게 두다”는 의미입니다. ‘고하다’, ‘공개적으로 선언하다’, ‘고백하다’는 뜻으로 구약성경에서 363회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밝히 알 수 있도록 드러내는 경우, 또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수수께끼나 꿈 등을 알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경우에 사용되었습니다.
 모세가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라 한 것은 신앙의 영적 거장인 아비와 어른들에게 물을 때,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깨닫고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적어도 그 당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사물의 이치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혹은 판단과 통찰을 통해 깨달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학습이 이루어지려면 묻는 학습자와 대답하는 피 학습자, 그리고 그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알지 못하는 영적 어린아이들은 부모들과 공동체 어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아득한 조상 때부터 언약을 맺어 오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어떠한 일들을 행하셨는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물을 수 있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부모들과 영적 어른들은 그들의 어떤 질문에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삶, 즉 역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한 발자취가 풍성할 때 교회의 미래는 매우 밝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어느 한 가지라도 부족하다면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상고해야 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짧은 우리 늘푸른 교회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성경 속 영웅인 ‘아비와 어른들’과 영적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들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구속사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뿐 아니라 앞장 서서 증거하는 영적 지도자가 되겠노라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늘푸른 교회의 미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늘푸른 교회 가족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루 동안 몇 번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립니까? 그렇게 떠올린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분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끼칩니까? 혹 다급한 순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토해 내는 비명처럼 외치고 있진 않습니까?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는 그 동안 쌓아 온 경험과 가진 능력, 그리고 폭을 조금 넓혀서 주변 사람들의 조언만을 기억에서 꺼내어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믿는다고는 하는데 믿음의 향기가 전혀 나지 않는 무색, 무취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의 대선배인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우리 함께 하나님의 은혜의 날들을 기억하며 삽시다. 믿음의 선조들의 삶을 연구하고 살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혜를 구하며 삽시다. 그리고 후손들에게 우리의 믿음을 설명하고 보여줄 수 있는 믿음에 있어서 부요한 사람이 됩시다. 이렇게 사는 자가 사도 바울이 고백하였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