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인도 III: 탄식하는 성령

롬8:26-27

오늘 이 시간은 성령의 인도와 관련하여 네가지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여러분 느낌이나 감정을 따라가지 말고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령이 하시는 일은 정죄하는 게 아니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장래일을 알려줍니다. 끝으로 예언과 선지자의 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기분과 느낌이 아닌 말씀의 약속을 따라야 한다.

롬8장 16절에서 성령은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한다고 배웠습니다. 성령은 우리 몸의 감각과 더불어 활동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느낌이나 기분에 따라가면 실패합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오늘 느낌이 좋다. 뭔가 일어날 것 같다. 육감이란 게 있잖아!” 이러면서 뭔가 좋은 걸 하나님께 기대한다면 한심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무식하단 소리 안 들으려면 그런 말은 하지 맙시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활동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 같은 제스쳐를 취하는 목사님도 본적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도 성령님도 우리 육체의 감각으로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신령한 성도라면 하나님의 임재를 영적으로 감지할 수는 있어도 육체적 느낌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느낌은 몸의 음성인데 어찌 육신의 몸이 영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목회하다보면, 변덕스런 마음과 느낌을 따라가는 걸 영적으로 예민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전에 우리 교회에도 그런 자매가 있었습니다. 기분에 따라 영적 상태가 왔다 갔다 합니다. 기분 좋으면 구원받았다고 감사하고 기분 나쁘면 꼭 예수 안믿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성령이 자기에게 말했다고 해서 들어보면 성경 말씀을 벗어나게 말을 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성령님은 여러분 기분을 좋았다 나뻤다 시애틀 날씨처럼 만들지 않습니다. 기분이 좋고 나쁜 것은 내가 말씀보다 육신의 욕망을 따라가면서 환경의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울증, 조울증이런 건 정신적으로도 병이지만 영적으로도 사단이 틈타기 쉬운 연약함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비결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내 기분이나 감정과 상관 없이 말씀이 시키는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 같습니다. 기도하면 병든자가 나을 것같고 입에서 예언이라도 터져나올 것같습니다. 영적 상태가 산꼭대가입니다. 그럴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반면에 영적 상태가 바닥 아니 골짜기입니다. 사람 만나기도 싫고 교회 가기도 싫습니다. 찬송도 기도도 안나오고 구원의 확신도 흔들립니다. 그럴 때도 신앙생활 잘하는 비결은 느낌이나 감정 따라가지 말고 말씀이 시키는대로 하다보면 회복됩니다.

누구나 골짜기 체험은 다합니다. 저도 자준 아니지만 1년에 한 두 번은 감정과 느낌은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사람에게 실망해서, 영적으로 내가 무기력한 것 같아서, 목회에 열매가 없어보이는 조금한 마음에, 성령께서 협조를 안해주는 것 같아서, 목회 환경이 힘들어서 푸념하면서 골짜기로 들어가 불평하며 다 주님 양들이고 주님 교회니 알아서 하세요. 그런 감정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기도해서 벗어나려고 해도 잘 안됩니다.

이런 상황일 때 우리가 알면 도움이 되는 것은 믿음의 기초를, 비록 어떤 신령하다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예민한 감각’이라고 주장할지라도 [느낌]에 두지 말고, [말씀]에 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끼는 대로 순간 순간 생각이나 마음의 충동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하나님 말씀이 시키는 대로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때때로 내 느낌이나 마음의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감정은 골짜기에 있더라도 내 영은 산 정상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하고 하늘 나라의 소망 중에 하나님의 자녀임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처럼 우리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합니다. 가난에 처하기도 하고 병에 걸리기도 하고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실직하기도 하고 형제, 동서간에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부부가 싸우기도 하고 실연을 당하기도 학업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그래서 감정이 골짜기로 골짜기로 추락할 때 함께 내려가지 말고 “나는 이미 예수 안에서 승리했다!”고 외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최악의 삶의 조건에서도 승리한 인생이고 불신자는 최상의 삶의 조건에서도 실패한 인생입니다. 세상에서 주어지는 삶의 조건과 상관없이 우리 인생은 그리스도안에서 승리하고 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든 못 느끼든 그 느낌에 시달리지 말고 말씀의 약속을 현재 내 것으로 주장하며 사는 게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2절에 ‘바라는 것’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걸 믿음이라 말합니다. 그렇게 산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 예수 믿으면 구원얻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와 상속권을 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느끼는 감각으론 좀 약할지 모르지만 예수 믿는 게 맞다면, 여러분이 하나님 자녀가 되었고 또한 하나님 자녀로서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할 자격이 있고 또 하나님 나라 기업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는 능력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왜냐면 말씀이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2. 성령님은 정죄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고 회복시키는 일을 한다.

성령은 우리 연약함-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수나 범죄한 것 등을 정죄하고 책망하고 내치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하고 동정하고, 변호하고 감싸주고, 회복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분입니다. 마치 우리들 어머니와 같습니다.

[개역개정]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개역개정]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화) 자녀가 잘못했을 때 대개 아버지는 화를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럴 때 어머니는 감싸주며 자식 잘되기를 눈물로 기도합니다.
한 때 죄를 졌다고 해서 벌 받아 내쳐지는 게 아닙니다. 그랬다면 우리 모두는 벌써 다 내쳐졌을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어떤 죄 가운데 있다고 해서 그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고 교회에서 쫓겨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도 죄 가운데 있다고 즉시 그 사람에게서 떠나버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죄를 깨닫고 돌이켜 회복하도록 도와줍니다. 저도 만일 아직 죄가운데 있는 분이 있다면 정죄하고 책망하기 보다 이해하고 용납하고 격려해서 죄를 버리고 주님 앞에서 회복되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면서 주님을 섬기는 일엔 개으른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선 더 의로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자기를 의롭다고 여긴 유대인은 버림받고 몸을 팔며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나 부정축재자라고 비난받던 세리장 삭개오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성령님이 죄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서 책망은 깨우쳐 돌아서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양심이 죄의식, 죄책감을 느껴 정죄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양심도 죄에서 돌아서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과 평안을 얻는 길은 잘못을 숨기고 부인하는 게 아니고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면 실망시키고 창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선자로 사는 것보다 용서받고 사랑 받는 자녀가 되는 게 낫습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예수 믿기 전부터 온전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 죄를 인정하고 돌아서서 새롭게 변한 사람들입니다.

성 어거스틴(354-430)의 회개-서방기독교 신학을 정립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고 396년 히포(Hippo)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386년 그는 개종하기 전 청소년 시절에 탕자처럼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집을 나가 윤락녀와 동거하며 사생아를 낳았고 이단 마니교에 빠져 지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버리지 않고 성령의 감동을 받게 하여 로마서 13장 13절의 말씀을 깨닫고 회심하였습니다. 그는 [참회록]에서 뼈속까지 부패한 자신의 내면과 방탕했던 생활을 철저하게 뉘우치는 글을 남겼습니다.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어머니 모니카의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잘못을 숨기고 변명하고 핑계거리를 찾고 화를 내며 부정하고 힘으로 누르면 양심이 무뎌지고 더욱 그 잘못에 빠져들어 육체의 욕망에 지배당합니다. 사람들은 익숙해져 버리면 그게 잘못된 것인지, 죄가 되는 것인지 개념이 없습니다. 아무리 소매치기나 조폭이라도 죄의식에 고통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계속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청소년들도 학교에서 왕따시키며 친구들을 괴롭혀 자살하게 만들고 나중에 경찰에 가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장난으로 재밌어서 했다”고 말합니다.

우리 시대의 문화가 폭력적 게임, 음란물, 섹시 컨셉, 노출 이런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게 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조차 어느 사이에 이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다들 그러고 살기 때문에 괜찮다고 느낍니다. 성경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죄가 됩니다. 내 양심엔 거리낌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의 양심에 상처를 주면 안하는 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바른 생활입니다.

3.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며 장래 일을 알려준다.

성령님은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그걸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령님은 자기 맘대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생각나게 해주고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줍니다. 성령님은 우리 육신의 귀가 아니라 우리 속 사람의 영에 주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개역개정]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문제는 우리가 이 영의 음성을 듣는데 익숙하지 못하고 아직 영적 수준에 여기에 이르지 못해서 인도받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해 좀더 생각해봅시다. 성경엔 성령께서 마치 우리 귀에 들리는 것처럼 말씀하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전도한 빌립의 경우를 보면, 사도행전 8장 26절에선 주의 사자, 곧 천사가 빌립에게 말을 하고 29절에선 성령이 빌립에게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말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분명 이 둘을 구별해서 기록했습니다. 또 사도행전 13장 2절에도 성령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했습니다. 여기선 성령께서 누군가 입을 통해 예언의 형태로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립의 경우는 동행인이 있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이유는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해 장래 일을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이란 주님이 원하고 계획한 길입니다. 우리 맘대로 살지 않고 주님 계획에 따라 사는 게 진리의 길입니다. 장래 일이란 문자적으로는 종말에 대한 계시의 예언이나 국가의 운명 같은 그런 것보다는 우리 개인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보여주실 것이라는 의미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될 일을 보여준다고 그대로 따르라는 건 아닙니다. 어떤 때는 그대로 순종하라고 알려주고 어떤 때는 미리 대비하라고 보여주고 어떤 때는 피하라고 보여줄 것입니다. 따라서 장래 일을 듣고 어떻게 할 것인지는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장 23절을 보면, 성령께서 바울에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 고 알려줬습니다. 그것을 피하라고 알려줬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바울은 피해가지 않고 도리어 복음 증거하기 위해 죽게 되면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7-13절에 보면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의 띠로 자기 수족을 잡아 매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렇게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성령이 말씀했다고 다시 알려줬습니다. 이 예언을 듣고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걸 모두 만류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위해 결박 받는 것은 물론 죽을 것도 각오했다고 듣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성령이 말씀하시는 걸 들은 사람들에 대한 사례가 나오지만 성령의 음성을 육신의 귀로 들으려고 애쓰는 건 좀 위험합니다. 사실 빌립이나 바울이나 선지자들이나 들으려고 애써서 들은 건 아닙니다. 성령이 주도적으로 뭔가 급하게 전달할 메시지가 있기에 그들에게 말을 한 것이지 빌립도 바울도 성령의 음성을 들어보겠다고 어떤 시도조차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음성을 한 번 듣고 싶어서 음성을 추구하면 마귀가 속여먹을려고 듭니다.

어느 교회 여 성도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부흥강사에게 기도받기를 청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전에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신앙생활을 잘 해온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 듣고 싶어서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틈을 탔습니다. 정말 그녀는 음성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한데 그 음성이 점점 이 여자분을 미치게 만든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들려올 땐 듣게 되겠지만 우리가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냥 성령의 음성을 들어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는 건 위험합니다.

4. 예언 은사와 선지자 직분의 어떤 관계인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노력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생각할 때 예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예언은 선지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의 은사와 선지자의 사역은 분명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예언한다고 그 사람이 선지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예언하기를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이 선지자 되기를 사모하라는 말입니까? 곧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29절에서 "모두 사도가 되겠느냐 모두 선지자가 되겠느냐...?" 물었습니다. 대답은 아니라는 거죠.

그럼 예언은 뭡니까? 고린도전서 14장 3절을 보면, 단순히 예언의 은사는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잘 생각해보면 이 경우는 예언이 설교의 기능에 더 가깝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과 설교는 다릅니다. 예언은 방언처럼 성령의 은사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의 영이 알 수 없는 언어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도 성령이 거하는 속 사람으로부터 나옵니다. 반면에 설교는 설교자가 깨달은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설교하는 중이지 예언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 다음 선지자 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 주된 사역이었습니다. 대부분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소명을 받거나 성령이 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선지자의 직분이 계속되느냐에 대해선 그렇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와 선지자의 직분이 같은 것이면 당연히 계속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예언의 은사가 있다고 곧 선지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따라서 예언은 계속되지만 선지자 직분이 계속된다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선지자가 출현하기 전부터 선지자의 예언이라고 무조건 따라가야 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18장 15절-22절에 모세는 선지자의 예언에 대해 어떻게 해야할 지 지침을 주었습니다. "그 말[예언]이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21절)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모세는 그 예언에 맞는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거나 성취가 없다면 선지가가 지어낸 말이니 무시하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개인 일에 대하여 누구로부터 예언을 받았을 경우는 그것을 판단할 때 여러분 자신 안에 성령으로부터 오는 어떤 증거가 함께 따라와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 영안에 무언가가 없다면 개인적 예언은 못들은 걸로 하는 게 더 좋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당신에게 찾아와 결혼하라고 예언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럼 그 사람과 결혼해줄 겁니까? 그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라면 당신에게도 성령께서 그 사람과 결혼하도록 사인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령께서 누구와 결혼하라고 말씀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누가 예언해줘도 당신 자신이 기도하면서 확신이 없다면 따라가지 말기 바랍니다. 나는 확신이 없는데 예언듣고 신학교가서 선교사 되는 게 맞습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이미 주님을 만나 헌신된 삶을 살고 있는 중에 성령께서 구체적인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개인적 소명과 확신이 없으면 사역이 어려워지면 다들 도망가고 불평하기 쉽습니다.

예언이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차원에서 그치면 참으로 유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언하기를 힘쓰라는 말은 교인들을 권면하고 위로하여 교회를 세우는 데 힘쓰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언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래 일을 알고 싶어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장래일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문제는 그걸 성령님께 맡겨 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필요하면 장래일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해야 할 말씀은 놔두고 장래 일을 알려고 예언받겠다고 몰려다닐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인생의 계획을 예언 위에 세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 위에 건축하기를 꼭 바랍니다. 예언보다 성경이 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언은 성령이 직접 말씀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의 영감아래서 사람의 영이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언의 형태로 나오는 말이 모두 참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14장 29,30,32절에서 말씀했습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사는 잠잠해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

방언, 통역, 예언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을 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우리 영이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방언이나 예언을 말하는 나의 영은 나의 제재를 받고 있기에 내가 시작하고, 하다가 내가 중단할 수도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게 하려고 어떤 소리를 내도록 유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잘못된 것입니다. 저절로 되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방언을 말하려고 하는 건 맞습니다. 방언하는 내 영이 나의 제재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소리를 반복한다고 그게 방언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냥 말로 기도하는 중에 알아들을 수 없는 소기가 튀어나올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하다가 여러분이 멈추고 싶으면 멈춰지고 또 언제라도 방언으로 기도하고 싶으면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성령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사단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은 주님 뜻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반대로 사단은 주님을 거슬려 죄악된 욕망에 따라 살도록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그 마음을 지켜 주님을 따라가는 건 바로 여러분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성령님은 지금 여러분에게 할만큼 다 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안 하시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더 사랑하고 육신의 욕망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할 뿐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는 건 성령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면서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기 시작하면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생각이나 느낌으로 판단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의 약속을 붙잡읍시다.

사도행전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선포하고 아픈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이웃에게 예수님을 전합시다.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