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대로 된다

야고보서3:1-5

뇌 속의 언어중추신경이 다른 모든 신경을 지배한다고 합니다(조용기, 4차원 신앙, p.87,88.)  오래 전 신경학계에서 발견한 사실인데, “뇌 속의 언어 중추가 모든 신경계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언어 중추신경이 신체에 대해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을 통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육체를 조절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환자가 “나는 점점 약해지고 있다”고 계속 말하면 당장 모든 신경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 약해지도록 준비하자 우리의 중앙 전달 센터에서 지시가 왔으니 우리는 약해져야 해” 그래서 그들의 신체적 상태를 약해지게 조절한다는 겁니다. 또 무기력증에 빠져 “그래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면 다른 모든 신경들이 “우리는 아무 능력이 없다고 중추신경조직에서 지시를 받았다. 우리는 어떤 가능한 능력을 계발하는 것도 포기해야 돼. 우리는 이 사람이 무능한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 준비해야 돼”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매우 늙었어. 정말 너무 늙고 피곤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런 식으로 말하면 당장 언어 중추는 영향력을 행사하며 반응을 조절합니다. 신경들은 “네 우리는 늙었습니다. 우리는 무덤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분해될 준비를 합시다” 이렇게 반응한답니다.

어느 신경외과 의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늙고 약해져 쓸모 없다고 생각하며 죽고 싶다고 말하면 세포는 급속도로 노화되고 신경계통에도 이상이 생겨 실제로 죽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의욕을 잃고 반복해서 “나는 이제 끝장 난 사람이야. 더 이상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런 식으로 말하면 모든 신경들이 그 말에 반응하여 비활동적으로 되어 빠른 속도로 그 기능이 약화되어 죽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하는 습관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에 이처럼 힘이 있기 때문에 평소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여러분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쉽게 부정적인 분위기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공할 가능성이 50%, 실패할 가능성이 50%일 때 여러분 마음은 성공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실패할 것 같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합니까? 저는 어떤 상황에서든 의도적으로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기 전에는 쉽게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지금은 부정적인 생각이 들더라도 그 생각을 거부하고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도 세상을 긍정적인 생각과 젊은 마음으로 살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3장 3절을 보니, 혀를 지배하는 사람이 온 몸을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말하는대로 된다는 건 지나친 단정이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사실입니다. “못해요” 이런 말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는 해도 안 된다 이런 말을 달고 다니면 공부는 직장생활이든 사업이든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남보다 못하는 것에 대해 환경이나 부모 탓을 하며 난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합리화시키며 오히려 그걸 편하다고 여기며 주저 앉게 되면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나도 할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말로 시인하면 먼저 말의 영향을 받아 정신과 신체조건이 성공하려는 동기부여를 받아들여 도전정신과 승부욕이 생기고 자신감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안됩니다.

인생이 바뀌려면 사용하는 언어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아침 인사, “안녕하세요?”와 “Good Morning!”의 뜻을 헤아려보면 약간 다른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선조들이 “안녕하세요?” 이런 식으로 아침 문안을 한 것은 하도 크고 작은 변고가 많아서 밤새 어려운 일 없이 편안했느냐고 묻던 게 습관이 돼버린 것입니다. 매일 매일 편하게 지내며 기분 좋아 “좋은 아침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뜻을 헤아려보면 “안녕하세요?” 이런 표현보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런 인사가 더 긍정적입니다. 자녀들이 긍정적으로 밝게 자라길 원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사용하는 언어를 바꿔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은 가능한 안 쓰는 게 좋습니다. “안 돼, 그것도 못해?, 넌 왜 그렇게 생겼니?, 니가 하는 게 그렇지, 바보 아냐? , “이것 밖에 못해 쓸모 있는 것이 하나도 없잖아 등등”

말의 선포는 단지 우리 중추신경에 영향을 주는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말의 선포 속에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귀신이 알아서 도망가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떠나갈 것을 선포해야 그 때 비로소 귀신이 도망갑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입을 다물고 가만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만 믿고 잠잠하고 있으면 귀신은 여러분 가정과 교회 주변에서 떠나가지 않습니다. 귀신을 향해 말해야 순복합니다. 눅10장 17절에 보면 70명의 전도인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했다”고 보고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들린 자들을 향해 귀신이 떠날 것을 말한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기 원하실 때도 누군가 이런 주의 뜻을 입으로 선포하지 않으면 역사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성령께서 알려주셨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 성령님의 임재와 활동을 충만하게 느낄 때라도 우리가 믿고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얻는 사람도 안 생기고 병든 사람이 치료되는 일도 안 생기고 귀신이 쫓겨나는 일도 안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낫기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겨나기를 말해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달라고 구걸하거나 낫게 해달라고 빌기만 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예배 중에 성령님의 임재를 느낄 때 여러분 서로 예수님의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뭘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말씀 선포입니다. 말씀을 선포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믿음이 생기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료될지어다”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병낫기를 간구하는 동시에 질병과 마귀가 떠나가기를 명령해야합니다. 이제부터는 달라고 간청하기만 하지 말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여 병을 고치고 마귀를 몰아냅시다.
말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이런 두려움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저됩니다. 실제로 예수님 이름으로 병낫기를 기도하고 선포해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실패의 경험들이 발목을 잡고 입을 묶어 놓습니다. 그래서 창피당할 각오를 하고 용기를 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마음에 믿음이 생기면 애원하는 대신에 명령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처음엔 “산을 옮겨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믿음이 충만해지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산아 옮겨질지어다”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구하는 기도만 계속하는 건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주신 권세를 사용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 사용하는 사람에겐 영적 세계에서 엄청난 위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를 통해 명령할 수 있습니다. 마귀에게 묶여 있는 자를 풀어 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선포해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몰아내는 건 성경적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베드로와 바울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병자에게든 병이 낫으라고 선포하고 다니면 됩니까?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성경말씀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말씀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레마 곧 선포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먼저 병고침과 귀신을 몰아내는 것과 관련된 성경말씀 두 곳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7장 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그 다음 야보고서5장 14,15,16절,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그런데 병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고 결국 그 병으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도 가끔 머리가 아프고 어깨가 아퍼서 기도할 때 어떤 날은 정말 신기하게 낫는다 싶은 데 어떤 때는 소용없습니다. 조용기 목사님 예로 어떤 자매가 들 것에 들려 사무실에 들어왔습니다. 그 자매가 들어올 때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데 가슴이 요동치는 듯하고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자매 이마에 손을 얹고 “자매님 예수님 이름으로 당신은 나았습니다” 선언했습니다. 정말 그 자매는 하나님의 권능이 임해 낫게 되어 나갔습니다. 나중에 그 자매가 선물을 들고 목사님을 조용히 찾아와서 “목사님 제발 자신이에 대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목사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두 번째 오신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그랬답니다. 조 목사님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저도 하루 세끼 먹고 자는 자매와 똑 같은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랬답니다. 이 자매가 낫게 된 소문을 듣고 어느 여성도가 들 것에 실려 왔습니다. 조 목사님이 이 여인이 낫기를 위해 여러 날 힘을 다해 기도해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믿음을 격려하며 일어서도록 시도했건만 힘 없이 주저 앉으며 절망에 울음을 터뜨리며  “목사님은 편애하시는군요. 지난번 자매는 목사님이 사랑하시니까 나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니신까 병이 낫지 않는 것이죠?”

유명한 강사를 초청해 신유집회를 하고 나면 어떤 사람은 나았다고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왜 나는 고침받지 못하느냐고 항의하기가 일쑤랍니다. 이런 문제로 씨름하며 기도할 때 성령께서 조 목사님께 깨우쳐주신 말씀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말씀과 하나님께서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 마음 속에 믿음을 주시는 말씀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일반적인 말씀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에서 주어지는 개별적인 말씀입니다. 앞에 것은 ‘기록된 말씀’이고 뒤에 것은 ‘선포된 말씀’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나에게 믿음을 주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선포된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포된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이 나에게 주어질 때 그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선포할 때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비가 억수로 오는 날 삼각산 청년수련회에 참석하러 가던 자매들이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간 성경 말씀을 의지하여 넘치는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익사한 사건이 있었다는 걸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물위를 걸었는데 이 믿음 좋은 자매들은 뭐가 문제였습니까? 베드로는 그 순간 물위로 걸어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선포된 말씀을 믿고 물위를 걸어가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청년들에겐 성령께서 강물 속으로 걸어가라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기록된 말씀에 대한 주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강물로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믿는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고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역사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 분별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로 가능합니다.

설교 준비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좋은 글을 많이 있고 좋은 문장으로 만들어 전달하는 연습도 해서 설교하면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포된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게 중요합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제목설교보다 강해설교를 많이 하는 게 좋다고 배웠습니다. 제목설교는 설교자의 주관적 생각이 많이 개입되고 강해설교는 성경말씀을 풀어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전엔 강해 설교를 더 많이 했는데 요즘은 제목설교 혹은 주제 설교를 더 합니다. 그것은 내 설교 일정표보다 성령께서 말씀하기 원하는 걸 더 전하려는 뜻에서 그럽니다. 보통은 교회 전체 방향이나 교인들 필요를 생각하며 설교주제를 정하지만 기도시간이나 QT시간에 어떤 말씀이 주어지면 그 말씀으로 바꿔 설교합니다. 가능한 선포된 말씀을 전달하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왜 오늘 이 말씀을 전해야 하는 부담이 생기는 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지금 그 말씀이 모든 교인들에게 상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설교 후에 “오늘 정말 제게 꼭 필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럴 때가 있습니다. 사실 전 무엇이 그 분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는지 모르지만, 설교를 통해 그 사람은 ‘선포된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포된 말씀, 다시 말해 성령께서 개인적으로 주시는 말씀을 자주 받아야 믿음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 때 ‘기록된 말씀’이 나에게 ‘선포된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선포된 말씀’이 주어질 때 믿고 행동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선포된 말씀이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할 때 왜 어떤 사람은 고침 받고 어떤 사람에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를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아무리 좋아보이는 약속이라도 내가 임으로 뽑아내서 암송하며 믿습니다 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포된 말씀을 받기 위해서는 평소 주님과 바른 관계 속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생활은 아주 중요합니다. 나에게 유익하든 고난이 되든 주님 말씀하실 때 순종할 준비를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주인의 지시를 선택해서 따라가는 사람은 더 이상 주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몇 번 이야기 해서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사람에겐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님도 그렇습니다. 자기 맘대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크고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먼저 기도하며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세요. 그러면 성령께서 주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해주십니다(요16:13). 세상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겠지만(요14:17), 성령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본능적으로 깨닫습니다. 성령님은 지금 우리 가운데 활동하십니다. 방언을 통해 성령의 내주를 경험하고(행2:4), 지식의 은사로 은밀한 일들을 깨닫게 해주며(행5:3,9) 필요하면 말을 걸어오시기도 합니다(행8:2). 사람들에게 묻기 전에 먼저 성령님께 묻고 지시받으며 신앙생활해야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말씀을 자기 필요에 따라 선택해서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준으로는 안됩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주님의 뜻에 따라, 혹은 여러분 개인적인 필요에 대해 개별적으로 주시는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의지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누구보다 성령과 친밀한 관계 속에 하루 하루 살아야 합니다. 예수믿고 거듭날 때 성령이 여러분 심령가운데 들어와 계십니다. 성도는 성령이 살고 계시는 집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머리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들지 말고 여러분 영안에 거하는 성령을 스승 삼아 배우고 지시받으며 살기바랍니다. 이전엔 상상도 못한 놀라운 은혜와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