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로냐 믿음이냐?

로마서3:21-31
제목: 행위로냐 믿음이냐?

사람들은 태어나 의식이 생길 때부터 선행과 상벌을 연결시켜 교육받았습니다. 부모님들조차 말 잘 듣고 바른 행동을 하면 착한 아이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칭찬을 해줍니다. 만일 뭔가 잘못하면 못된 놈 소리를 듣습니다. 집 밖 세상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 따라 평가해줍니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평가는 거의 절대적으로 행동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 영향으로 하나님도 행위를 보고 의인과 죄인으로 구분하신다고 생각하여 선행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세계의 종교들을 보면 기독교외엔 거의 모두가 인간의 선행의 공로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카톨릭교회에도 공로가 구원에 큰 작용을 합니다. 유대교 역시 율법을 준수하는 도덕적인 삶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불교 역시 수도와 고행을 통해 해탈 즉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합니다. 인도의 종교 역시 금욕을 강조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선행을 통해 자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카톨릭의 구원관- 중세 카톨릭교회는 인간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도움이 필요한데 이걸 은혜라고 부르고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일정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나 성자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도 남는 공덕을 쌓았으므로 이 여분의 공덕이 다른 사람의 구원에 사용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면죄부판매의 당위성이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에 근거해 카톨릭사제에게 면죄의 특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면죄는 이미 사함받은 죄로 인해서 받는 일시적 형벌에 대해 교회로부터 면죄받는 것을 말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지만 죄로 인한 상처는 연옥에서 일시적 형벌을 통해서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옥은 믿고 구원받았으나 천국으로 직행하기엔 아직 부족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며 거기서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면죄는 이 연옥의 정화의 과정을 면케 해줍니다. 카톨릭교회는 일곱가지 성례가 은혜의 통로이자 공덕을 쌓는 기회로 봤습니다(성만찬, 침례, 고해성사, 견진례, 혼례, 안수례, 종부성사)

유대교구원관- 유대교는 유대인이든 아니든 구원은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을 믿고 또 도덕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얻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유대교는 기독교에 비해 현세에서의 윤리적 도덕적 행동을 더 강조합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야 구세주로 믿지 않고 훌륭한 윤리 선생으로 쯤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유대백성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화평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를 구원해줄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했습니다.

성경엔 인간이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보시기에 이미 죄인이 되어 있고 죄악된 행동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뉴스 매체엔 매일같이 살인, 사기, 간통, 폭력, 불법, 뇌물, 방탕한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터져나옵니다. 노전대통령은 누구보다 도덕성을 강조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치력은 다소 떨어져도 청렴성은 앞선다고 했지만 꼭 그런 건만도 아니었습니다. 한 때 사제들까지 동성애 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2년 전인가 미국에서 유명한 개신교 목사가 또 파란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속을 다 알기 전까지 겉모습만 보면, 의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부패하여 실수하는 인간은 율법으로는 결코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에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 왜 죄가 되는 지 설명해줍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속에 창조주의 능력과 신성이 드러나 보여지기 때문에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따라서 당연히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무신론자가 되거나 창조주 하나님 외에 다른 종교를 가지고 우상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죄라는 것입니다(롬1:19-23).

이 말씀을 잘 음미해보면 죄의 본질은 창조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세상에서 얼마나 선하게 살고 있느냐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은행을 턴 강도가 지나가다가 구세군 남비에 100불 자선했다고 그 선행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살인죄를 범한 사람이 잠시 노인을 부축해줬다고 상을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어떤 선행을 했더라도 하나님보시기엔 멸망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의 비유를 통해서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낳아 길러준 부모를 부정하는 불효자식이 세상에 나가 자선활동을 한다고 효자로 바뀌는 건 아닙니다. 사람들 눈에 의인처럼 보여도 부모에게는 불효자식일 뿐입니다.

불신자들은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합니다. 알 수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건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런 주장을 펴는 기독교인들이야 말로 정신이 나간 사람아닙니까? 법에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죽음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은 억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믿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살아온 게 죄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성령이 우리 양심으로 더불어 깨우쳐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죄는 또한 부도덕한 행위들입니다. 이 죄악된 행동들은 이미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대표적인 죄악으로 불의, 살인, 사기, 분쟁, 비방, 악행, 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동성애도 타락한 인간의 생활모습 중 하나로 봅니다. 롬1:26-27에, 남녀 관계에 있어서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동성끼리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한다”고 지적합니다. 동성애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 동성에 대해 성적 욕망을 억제할 수 없노라 호소합니다. 그러나 다수의 동성애자들은 문란한 성문화 속에 자신의 선택으로 된 것입니다. 최근 아이오와 주에서 동성애자의 결혼을 합법화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코네티컷주, 매사츠세츠주).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악인데 사람들은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인정해주고 있습니다(32절). 얼마전에 켈리포니아주는 동성결혼합법화를 무효화시켰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선교적 차원에서 동성애자들을 용납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의도와 달리 동성애를 용납하는 결과를 가져올 게 우려됩니다.

출애굽기 20장 이후부터 보면, 10계명을 비롯해서(출20장), 종과 살인에 대한 율례(21장), 손해배상과 인간관계에 대한 율례(22장), 정의와 복지, 절기에 관한 율례(23장)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에는 각종 제사법, 신명기에는 사회관계법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규정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율법조항이 모두 613(248+365)가지라고 하는데 이 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규정한 것입니다. 더나가 예수님은 행동은 물론 마음 속 생각까지 살펴서 음욕이나 증오심을 품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태5:21이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지만 태어난 후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 판단해도 율법으로 온전한 의인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로마서3장 10절에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율법적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톨릭교회와 일부 개신교회 안에도 선행의 공로를 통해 의롭다함을 얻으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의 공적을 쌓은 성인들에게서 남은 공로를 빌려와 의롭다함을 얻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로를 빌려올 수 있는가의 문제는 놔두고 선행의 공로로 구원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성경을 벗어난 주장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로마서의 가르침에 위배되며 그리스도의 대속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듭니다. 본문 28절을 보면 율법의 행위, 즉 공로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데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은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30절).

기독교는 선행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했습니다(벧전2;12). 바울도 디모데에게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고 당부했습니다. 히브리서기자 역시 교인들이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선행을 매우 강조합니다. 구원얻는 공로를 쌓기 위해 선행을 하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을 행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개신교회가 카톨릭교회에 비해 자선활동, 사회사업, 선행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반성할 일입니다. 구원의 공로를 쌓으려고 선행을 강조하고 선행에 힘쓰는 저들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가 더 선행을 힘써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동기를 보는 게 아니라 겉으로 들어난 행동을 보고 그 결과에 주목합니다. 세상사람들은 구원얻기 위한 동기를 선행을 하는지 관심 없습니다. 선행을 주목할 뿐입니다. 교회도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 함께 고아원 운영, 양로원 후원, 도시 빈민자 후원, 외국 노동자의 인권보호활동, 실직자들의 식사제공, 등과 같은 자선활동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금지법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아담과 이브는 지키지 못했습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악을 피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대로 살지 못하자 율법을 범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범법사실을 깨우쳐주는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 때문에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고 네 이웃에게 거짓말로 증거하지 말라는 율법이 있습니다.  오마이 갓! 지저스 크라이스트! 외치며 불리하면 거짓말합니다. 만일 이런 율법이 없다면 그게 죄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지금 불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도 복음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하는 게 죄가 되는 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홀대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 줄 알기에 두려워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처럼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불신자들은 물론 성도들에게도 율법을 들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지 알게 됩니다. 먼저 죄를 깨닫고 나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마음이 생깁니다. 죄로 멸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야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못깨달으니 하나님이 아쉬워 제발 믿어주세요 그런 줄로 생각해서 배짱을 부리는 불신자들도 있는지 모르겠어요. 교인들 중에도 교회 안나오면 자기 손해인데 목사가 손해인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얻는 것은 인간편에서 선행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인간의 선행은 모두 자격미달이라 구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리고 구원얻는 다른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길입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지금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구원얻은 분들은 여러분 행위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고 고민하지 말고 성령께 순종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평안을 누리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살다가 천국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