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

골1:24,25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이고 내일부터 토요일까지는 고난 주간입니다. Palm Sunday는 예수님께서 3년간 공적 활동을 마치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한 주 전에 예루살렘성으로 들어오실 때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고난에 동참하는 삶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난 같은 경우는 겪어보지 않고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아기를 낳아본 엄마들은 산고를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곁에서 그 힘든 과정을 지켜본 남편들은 사실 아기를 낳는 고통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암에 걸려 투병할 때도 그렇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고통 속에 항암제를 맞는 사람과 지켜보는 사람이 같을 수 없습니다.

골수이식수술은 사람을 잠시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수술법이라고 합니다. 환자의 몸 속에 퍼져 있는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먼저 항암제를 투여하는데, 암세포를 죽일만큼의 충분한 항암제는 환자도 죽인답니다. 그래서 미리 환자의 몸에서 골수를 추출해놨다가 다시 이식시켜 환자를 살려낸답니다. 암이 전신에 퍼졌을 경우는 다른 사람의 골수를 이식받습니다.

골수 이식수술을 받은 신은희집사님 간증문을 보니까, 의식이 깨어날 때는 죽음의 길 터널을 벗어나 다시 살아난 느낌이 들었답니다. 깨어나지 못하면 그것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 분이 암선고를 받고 골수 이식수술을 받을 때 39세였는데, 죽음을 넘나들며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은 인생은 오직 주님 뜻대로 다시 빗어지는 순종의 인생을 살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간증을 들을 때 참 은혜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분처럼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걲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암에 걸려 죽음을 넘나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돌아오면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우리도 알만한 것입니다. 안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까?. 아닙니다. 죽음, 고난 이런 것은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 믿은 이후 말 그대로 복음전파를 위해 여러번 죽음의 위험을 넘기고 헐벗고 굶주림과 돌에 맞아 죽음직전까지 가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을 본받아 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교회와 복음전파 위해 수고하는 것을 즐겁게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 주님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하자는 뜻에서 금식도 하고, 요즘은 무슨 미디어금식이란 걸 하기도 합니다. 오락을 금하고 어떤 사람은 육식을 금하고 그럽니다. 저는 이런 것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동기와 목적이 순수하다면 나쁘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좀 유치한 수준입니다. 육신의 욕망을 즐기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구원을 이루기 위한 수고와 희생으로 고난에 동참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우리가 검소하게 살며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육신의 즐거움을 너무 추구하지 말고 절제하며 사는 것은 항상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과 교회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며 사는 것이 고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바울처럼 선교에 전념할 수도 있고, 디모데처럼 교회사역에 힘쓸 수도 있고, 고넬료처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쓸 수도 있고,  스데반, 빌립처럼 개인전도에 힘쓸 수도 있고, 예루살렘교회 일곱집사들처럼 교회에서 위임해준 일을 할 수도 있고, 바나바처럼 자기 재산을 내 놓아 교회를 섬길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한 부분에서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곧 주님의 고난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수고와 희생을 하려면 시간과 재능과 재물을 주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려고 할 때 제일 먼저 희생해야 하는 것이 사적인 시간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있습니다. 교회 일을 하는 만큼 가족과 보내는 시간, 개인적인 취미활동 시간이 줄어들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학생 때는 공부하느라 시간이 항상 부족할 때입니다. 주일에 교회나와 예배드리고 봉사활동하는 사람은 그 시간에 다른 걸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사실 시간이든 생명이든 다 주님의 것이지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재능도 희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엔 재능있는 사람들의 자원봉사가 필요합니다. 목자, 어린이 교사, 찬양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를 위해 자기 재능을 희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찬양팀이나 성가대엔 음악을 전공한 인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개인지도든 학원강사든 하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선 대부분 자비량 봉사입니다. 요즘 힐송 찬양팀이 전국 순회하면서 비싼 입장료를 받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게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찬양할 곳이 없어서 비싼 돈을 주고 그런 댈 가야하나요? 음악회처럼 돈주고 가서 수준높은 찬양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기 바랍니다.

끝으로 교회에는 재물로 주님을 섬기며 수고와 희생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부터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언제나 물질로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 나은 막달라 마리아,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 등은 자기 소유로 주님을 섬겼다고 합니다(눅8:3), 자주장사였던 루디아는 바울의 선교팀을 자기 집에 머물도록 하고 숙식을 제공하며 물질로 도와주었습니다(행16:15). 바나바는 밭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습니다.

2주전 주님의 희생에 매일 감사하며 살면 하나님 앞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 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이 곧 주님의 희생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을 위해 뭔가 수고하고 고난당한다면 그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그래도 주님 위해 뭔가 수고하고 고난당한 게 있어야 부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면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힘들지만 감사할 수 있는 교우들은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