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나면 변화된다

빌레몬서 8절~21절

성경엔 하나님을 만난 후 변하여 새 사람 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버림당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다닌지 오래 됐는데도 옛날과 똑같이 엉터리라면 실제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은 변하라고 다그칠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만나면 변화된다’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빛이 비추면 먼지가 보이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야 죄가 보입니다.
여러분이 숨어서 나쁜 짓을 하다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혹시 목사님에게 들켜 수치심에 몸둘바를 몰라 너무 부끄럽게 느낀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눈을 마주쳤을 때 부끄러운 것은 자신의 수치스런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서, 욕망에 빠져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못깨닫다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본능적으로 자신의 수치를 느끼는 거죠. 죄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을 만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이사야6장 1절 이하를 보면, 이사야는 어느날 영의 눈이 열려 천상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본 것은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을 보자마자 이사야가 느낀 것은 “이제 나는 죽었구나” 였습니다. 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죄의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죄인이 하나님을 보면 죽음을 당합니다.

출애굽기 19장 20절 이하를 보면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시내산에 올라 갔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와께 가까이하는 제사장들을 성결케 하고 백성들이 여호와를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일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돌격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도록 예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겁이 난 백성들은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그렇게 모세에게 부탁했습니다.

죄에 물든 세상에서 생각없이 살던 사람들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면 죄의식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과 죄의 거리는 반비례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죄에서 멀어지고 죄와 가까이 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성령님을 체험할 때도 같은 반응이 나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죄악을 멀리하고 죄악을 즐기면 성령이 소멸됩니다. 경험으로 아실 것입니다.

오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만났다면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좀처럼 잘 변하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변한 것같이 보여도 시간이 흐르면 제자리로 돌아가 옛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이 변했다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바꿔말해 하나님을 만났다면 변해야 당연합니다. 성화는 훈련 프로그램을 이수해서 된다기 보다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만난 후부터 새롭게 변하여 믿음의 조상다운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만나기 전에 아브라함도 비열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숭배하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강 저편, 즉 갈대아 우르에 살면서(창11:31)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수24:2). 하나님이 찾아가기 전까지는 아브라함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다른 신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불러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부모를 떠나 지시하는 곳으로 가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고 아버지를 떠나 가나안으로 갔습니다. 이제 자신의 책임하에 하나님을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생활, 교회생활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심해 애굽으로 식량을 찾아 이주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아내 사래의 뛰어난 미모가 걱정되었습니다. 애굽의 불량배들이 아름다운 사래를 차지하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누가 우리 사이를 묻거든 누이라고 대답하라고 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이 왜 그랬는지 아시죠?

사래의 미모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미인이 즐비했던 바로왕궁에서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바로왕이 내시를 보내 사래를 궁으로 데려갔습니다. 대신 오라비 아브람에게는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예물로 주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미리 약조한대로 왕궁에서 사람이 나왔을 때 아브라함도 사래도 서로 오누이 사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살자고 아내를 판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개입해 바로 왕에게 경고해서 사래가 무사히 아브라함 품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브라함은 궁으로 불려가 어찌하여 아내를 누이로 속여 일을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바로에게 추궁당했습니다. 다른 대신들도 다 지켜보는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창12:14-20)

이 때 아브라함은 75세를 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브라함은 이기적이고 비겁하고 간교한 인물로 인생을 마쳤을지 모릅니다. 아내를 위험에 내 몰더라도 살아남겠다는 비열함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그렇죠. 아브라함도 예외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이방 땅에서 우상을 섬기며 노인이 다 됐으니 윤리니 도덕이니 정의감이니 이런의식이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조카 롯이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었을 때는 아브라함답지 않은 반응이 나왔습니다. 이전의 아브라함같으면 모른척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엔 집에서 훈련시킨 사병 318명을 데리고 쫓아가 롯과 함께 사로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했습니다.

롯을 사로잡아간 사람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지역패권을 놓고 시날왕 아므라벨과 동맹한 3개국왕이 소돔왕 베라와 연합한 4개국 왕을 상대로, 4대5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시날왕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과 사람까지 포로로 잡아갈 때 롯도 잡혀갔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가병을 데리고 4개국 연합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사각오로 출전해 롯을 구출해 돌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승전하고 돌아올 때 소돔왕이 직접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애굽 바로 왕앞에 수치를 당한 후 아브라함은 이미 달라져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믿고 새롭게 변화된 사람중엔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에게 재산상 큰 피해를 입히고 도망간 노예로 로마감옥에서 갇혀있던 바울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인물입니다. 추노 드라마를 보면 노예가 얼마나 비참한지 상상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도망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주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전도할 때 회심했다고 합니다.

빌레몬서 10절에 바울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내게 간구하노라”고 말하고 있는 걸 봐서 바울은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나 전도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후 오네시모는 또 무슨 죄를 짓어 감옥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쯤되면 막가는 인생입니다. 노예신분에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혔으니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오네시모는 바울의 말대로 “무익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오네시모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난 후에 놀랍게 변한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선처를 당부한 편지를 보면 오네시모를 얼마나 좋게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실 저는 누구에게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려본 적도 없고 아직은 믿음의 아들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을 두지도 못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심복이라”(11절)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믿음의 아들’, “내 심복”이라고 부른 것은 오네시모가 하나님을 만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사회는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법이었으니 바울은 노예주인인 빌레몬에게 허락을 받아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두고 평생 심복으로 쓰고 싶었습니다. 심복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죠. 여러분은 인생에서 누구에게 심복이라 불려본 적이 있습니까? 심복이라는 말은 다바쳐 충성하고 그 만큼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붙여지는 말입니다. 탈주 노예에 죄수인 오네시모가 바울에게 이렇게 인정받은 것은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을지 짐작가고도 남습니다.

바울은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철저하게 헌신된 만큼 다른 사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 바나바와 전도여행을 떠날 때 마가 요한이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해서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마가 요한을 데려가자는 바나바의 제안을 완강하게 거절하고 갈라서기까지 했던 인물입니다(행15:39). 그런 바울이 오네시모를 심복으로 평생 곁에 두고 싶어했을 정도니 오네시모가 얼마나 충성된 사람으로 변화되었을지 짐작갑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오네시모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진짜로 만난 사람들은 달라집니다. 과거에 얼마나 망가진 사람이었든지 간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세월 속에 새롭게 변화되고 회복됩니다. 아내 치맛자락에 숨어 자기 한 몸 살려고 야비하게 굴던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생명걸고 나서잖습니까? 도망친 노예로 또 무슨 죄를 지었는지 감옥에 들어갔던 오네시모가 예수님을 만난 후엔 하나님 나라의 충성된 일꾼이 되어 바울의 심복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도 달라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달라지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하나님도 포기한 버림당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난 후 어떻게 달라졌는지 자신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변화의 속도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속도가 좀 느리더라도 지속적으로 변화가 보여야 합니다. 제가 처음볼 때보다 여러분 대부분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은(?) 사람도 보입니다. 목사도 목자도 양들도 주님께 갈 때까지 더 거룩하게 변해야 합니다. 괴물이 변하여 보석이 되는 게 기독교신앙입니다. 매일 매일 예수님을 닮는 사람으로 변화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