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고난을 내 몸에

골로새서1:24-29                 

오늘은 교회 절기상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Palm Sunday)은 종려나무 잎사귀를 사용한 데서 유래되었습니다(요 12 :13).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 오셨을 때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펴면서 "호산나 다원의 자손이여"하고 환호성 지르던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요12:13;계7:9). 종려주일부터 부활주일 전까지 한 주간은 예수님의 시련과 고난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오늘은 고난을 주제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먼저 본문 24절에서 바울사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이 이상하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까? 구절만 놓고 보면 그리스도께서 당할 고난이 아직도 남아 바울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 남은 고난을 감당하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이미 당한 고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그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바울이 자기 몸으로 고난을 받아 채우겠다는 뜻일까요? 

이 해석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당한 고난만으로 우리 속죄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은 성경의 증거와 맞지 않습니다. 히브리서10장 10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에 충분했다는 뜻입니다. 속죄를 위해 우리 자신이나 혹은 우리를 위해 누가 대신 더 고난을 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속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부족하거나 모자라지 않고 충분합니다. 따라서 속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이 부족해서 우리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이 대신 고난을 보충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어딘가 부족해서 성도들이 속죄를 위해 더 고난을 받아야 하거나 성인들이 받은 고난의 공로를 빌려다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애 동안 주를 위해 받아야 할 고난을 가리킵니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겠다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속죄를 위해 고난을 더 받겠다고 한 것이 아니고 복음의 일꾼으로서 주님을 위해 기쁘게 고난을 받겠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특권처럼 생각했습니다. 복음의 일꾼으로 택함 받아 주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뻐한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에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는 동시에 주님을 위해 우리들가 받아야 할 고난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24절에서 바울이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겠다고 한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은 후부터 그는 주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들어가고, 매를 맞고, 굶주리고, 돌에 맞아 기절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유대교 배경에서 더 크게 출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을 수학한 엘리트로 벌써 공회원의 지위에 올라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 때문에 유대인 사회에 배신자가 되고 그동안 쌓아놓은 기반이 한 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세상의 성공을 맞바꾼 셈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한 바울에겐 더 이상 세상의 영광은 없습니다. 예수 믿고 난 이후 바울의 인생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종이 된 이후 바울은 권력과 재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고난 받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뭘까요? 자기 주장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인된 자리에서 내려와 종이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데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려면 고통이 따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도 없습니다. 내 할 일이 많은 데 어찌 주님을 따라 다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처음부터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배척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권력자들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이 증명되었다는 말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도 언급하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리고 어기는 사람은 붙잡아 감옥에 넣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전파하는 것은 곧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억압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극약처방으로 예수를 부인하도록 강요한 후 끝까지 버티는 사람은 사자우리에 던져 죽였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기까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수 많은 성도들이 붙잡혀 죽음을 당하거나 산속 동굴 지하묘지가 있던 곳으로 피신해 살아야 했습니다.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고난과 죽음 뿐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시대 성도들은 오직 천국의 소망을 잃지 않기 위해 재산을 버리고 생명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했습니다.

우리들이 너무 평안하게 교회 다니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고난의 길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가까이 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고난의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통로가 되기 위해 신혼의 단꿈과 사생활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사생아를 낳았다는 오해와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요셉은 부정한 아내를 얻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을 것입니다. 침례 요한 또한 메시야의 길을 예배하기 위해 광야를 배회하며 미치광이 인생을 살다 참수당했습니다. 스데반도 예수님을 증거하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12제자 모두 이방 각지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당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남은 고난을 자신들의 몸에 채우고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모슬렘 지역에서 선교하다 총에 맞아 죽은 선교사의 이야기, 탈북을 돕다가 강물에 휩쓸려 생사를 알 수 없는 선교사의 이야기, 고아들을 돌보며 평생을 바친 수녀님의 이야기,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섬기며 고난의 길을 걷는 성도들의 이야기,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들의 몸에 채우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성도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투옥되고 사자밥이 되는 상황 속에서 무슨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시대엔 출세하고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예수를 믿어선 안되죠. 세속적인 성공과 재물을 얻는데 예수믿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 예수 믿는 이유는 천국의 소망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원래 기독교는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우리가 너무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너무 세속적인 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난 주간을 앞두고 무슨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별 관심이 없고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하나님께 비는 것은 바람직한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물질의 복을 구하는데 있게 되면 풍요의 신 바알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공경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들어가면 불순해집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어떻게 우리 몸에 채워야 할 것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28절과 29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각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파하고, 각 사람을 권고하고 가르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을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전도에 힘쓰고 목자나 교사로 양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돌보는 수고를 하는 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하더라도 복음을 전하고 양을 돌보는 사역은 고난의 길입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목사님들도 목회를 그만두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답니다. 목자 여러분들도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목자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런 저런 말로 기분이 상하고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책망을 듣기도 하고 또 누가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성장에 대한 부담이 적잖습니다. 그럴 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것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고난을 감당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