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손에 붙이셨다

여호수아2:1-7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몽고메리(Bernard L. Montgomery) 장군은 [전쟁의 역사]에서 “인간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전쟁이 역사인 나라입니다. 전쟁으로 나라를 만들고, 전쟁으로 나라를 잃고, 전쟁으로 나라를 되찾고, 전쟁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아래 애굽에서 탈출한 후 40년에 걸쳐 싯딤까지 오는 동안에도 몇 차례 전쟁이 있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탈출한 직후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쳐서 물리쳤고(출17:8), 광야에서 38년을 보낸 후 에돔 변경을 둘러 왕의 대로로 가는 중에 공격해온 가나안족의 성읍을 쳐서 멸망시켰고(민21:3), 왕의 대로로 통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아모리족을 쳐서 아르논강부터 얍복강까지 점령했고(민21:24), 대적하는 바산왕 옥과 그 백성들을 다쳐서 멸망시켰고(민21:36), 또 모압과 동맹하여 바알브올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바알 숭배와 음행에 빠뜨린 미디안(아브라함의 셋째 부인 그두라의 아들,창25:1,2)에게 복수하여 다섯 왕과 남자를 쳐 죽였습니다(민31장).

오늘은 여호수아 2장의 여리고 정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가나안 전쟁이 시작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의 관리들을 불러 삼일 안에 요단을 건너 하나님이 주신 땅을 얻기 위해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알리고 준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모리족을 몰아내고 점령한 요단 동편 땅을 분배 받은 르우벤지파, 갓지파, 므낫세 반지파를 불러 함께 요단을 건너가 함께 싸워 다른 지파들이 땅을 얻은 후에 요단 동편 땅으로 돌아가겠다는 서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두 명의 정탐군을 여리고성으로 보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기 위해 여호수아가 행한 첫번째 조치는 요단을 건너면 첫번째로 만나게 될 여리고성을 치기 위해 정탐꾼을 보낸 일이었습니다. 1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여호수아는 첩보원들을 싯딤에서 여리고로 보냈습니다(지도참고). 그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맞은편 모압평지 싯딤에 모여 있었습니다. 싯딤은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요단강 동쪽 11km 지점으로 지금의 굴벳엘그후렌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모세가 살아 있을 때 이스라엘 남자들이 발람의 계교에 빠져 우상 제사에 참여해 모압 여자들과 간음하다 2만 4천명이 죽었던 바로 그 장소였습니다(민25:9) 

여호수아는 여리고에 정탐군 두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에 따른 것 같습니다. 전에 모세는 가데스바네아에서 각 지파 족장으로 정탐꾼 12명을 선발해 가나안 땅을 탐지하도록 보냈는데 여호수아(에브라임지파)와 갈렙(유다지파) 외에 다른 10지파 대표들은 탐지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그 땅 백성들이 강해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를 꺾고 대업을 그르쳤습니다(민13,14장). 여호수아는 그 때 일을 12지파 대표와 상관없이 믿음과 용기가 있고 믿을 만한 사람 둘을 골라서 아무도 모르게 보냈습니다.

교회에서 일꾼을 뽑을 때 공평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공평하게 하려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유익이나 안전을 더 생각하는 믿음 없는 사람을 일꾼으로 뽑는 것은 나중에 화근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일도 우리 능력으로 버겁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주께서 우리가 이 일을 하기 원하시는가” 먼저 생각하고, 주님의 뜻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모든 것을 드릴 각오로 앞장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을 맡아서 할 수 없다는 사람은 주인에게 유익한 종이 아닙니다. 믿음과 용기를 내서 일하는 종이 됩시다.

여리고에 잠입한 스파이 두명은 기생 라합의 집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탈굼역 성경을 보면 라합은 여관업자로 번역되어 있고,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는 문지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라합은 성문 곁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기생이었을 것입니다. 기생 라합의 집은 이스라엘 스파이가 숨어들기에 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기생집이라 여러 사내들의 출입이 빈번했고 그런 곳은 첩보수집에도 좋은 장소고 위치도 성문 바로 안 성벽 위에 세워진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룻밤도 지나기 전에 꼬리가 잡혔습니다.

본래 통치자들은 정보수집차원에서 비밀요원들을 가동합니다. 아마 여리고는 지금 전쟁 직전의 위기감이 고조된 때라 왕이 여기 저기 비밀요원을 풀어놓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먼저 2절을 읽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이스라엘 스파이가 여리고에 잠입했다는 사실이 첩모망에 걸려 여리고왕에게 즉각 보고되었습니다. 여리고왕도 강 건너에 진을 치고 있는 무리들이 언제 침입해올 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스파이를 체포하기 위해 라합의 집에 특수부대를 보냈습니다. 왕은 라합에게 네 집에 이스라엘 스파이가 잠입했으니 누군지 알아내서 병사들에게 알리고 신병을 넘기라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라합은 그들의 신분을 모르고 손님으로 받은 것이니 스파이만 넘겨주면 아무런 책임도 위험도 없습니다. 그런데 라합은 왕명을 거역하고 스파이를 지붕 위 삼대 더미에 숨겼다가 성벽 위에 있는 창문으로 줄을 내려 도주시켰습니다. 뜻 밖의 행동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라합의 행동은 지탄받을 일이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성 안에 거주하며 여관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자기 나라를 해롭게 하려고 온 스파이인줄 알았으면 신고하고 체포하는데 협조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자기 군사들을 속이고 스파이를 빼돌렸습니다. 라합은 숨겨준 대가로 이스라엘 스파이들에게 나중에 여리고성을 점령했을 때 자기 부모와 형제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나쁘게 보면 나라는 망하든지 말든지 우리 가족은 살고 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라합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매국노요 배신자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엔 믿음의 행동으로 칭송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 31절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할 때 정탐군이 약속한 것처럼 안전을 보장받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개종하고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는데, 보아스는 다윗의 아버지로 메시야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라합은 메시야 가문의 일원이 되는 영광까지 얻었습니다.

세상 일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민족주의 관점에서 보면 매국노인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믿음의 행동이었습니다. 라합이 여리고왕명을 거역하고 이스라엘 스파이를 도피시켜 준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께서 여리고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줄을 알았습니다(9절). 라합은 애굽에서 나올 때 여호와께서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신 일, 아모리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을 듣고 여호와는 하늘과 땅의 여호와라고 믿었습니다(11절).

이방 여인, 그것도 기생의 입에서 이런 믿음의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장에서 그런 기적과 도우심을 체험하고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믿음이 약해져서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의심하고 불평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의 기생이었던 라합은 이런 소식을 들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여호와가 참으로 하늘과 땅을 통틀어서 참 하나님이라고 믿는 마음이 생겨 자기 인생을 그 여호와께 걸었던 것입니다.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어있는 여리고의 백성으로 남는 대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라합은 조국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죄악과 함께 멸망하는 대신 구원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라합의 행동은 믿음의 선택이요 지혜로운 결단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려 놀라지 말라”(9절) 고 하신 말씀을 살펴봤습니다. 겁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겁을 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여호수아라도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알고 보니 두려워 간장이 녹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여리고성 사람들이었습니다. 라합의 고백에 따르면 여호와라는 신을 믿는 한 무리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홍해를 건너 아모리족을 몰아내고 코 앞까지 와서 진을 치고 여리고 땅을 노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리고 사람들은 간담이 녹을 지경이었습니다(9절).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패닉상태에 빠졌던 것입니다.

전쟁에선 공격하는 자들보다 수비하는 자들이 심리적으로 더 두려움을 느끼는 법입니다.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니 항상 긴장하고 대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리고성에는 출애굽과정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이 소문으로 퍼져있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와께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 아모리족의 두 왕 시혼과 옥과 전투를 벌여 전멸시킨 일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영화는 재밌게 볼 수 있을지몰라도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은 두려움에 정신을 잃을 지경입니다. 참전하고 돌아온 미군 병사들 중에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에 시달리는 군인들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시애틀 인근에서도 외상후스트레스 증후군을 앓고 있는 병사가 총기를 나사하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교전 중인 군인들은 항상 죽음의 공포를 느낄 겁니다. 우리 그런 경험이 없어서 그게 얼마나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두려움은 의지로 통제할 수준을 넘어서 정신적 피해를 줍니다.

너희들 때문에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는 라합의 말이 과장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적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스라엘 진영엔 희소식이었습니다. 여리고 전투를 앞에 놓고 두려움에 빠졌던 이스라엘 진영에선 적들이 이렇게 겁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기가 오르고 자신감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옛날 싸움은 주로 대면해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은 겁 먹는 쪽이 패합니다. 그래서 고대 전쟁에서 전략으로 심리전을 많이 썼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여리고성 전투도 심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요약하고 마치겠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땅을 얻기 위해 전쟁을 하러 가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첩보를 수집했습니다. 정탐군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적진에 들어가 정보를 얻어왔습니다. 교회사역은 영적 전투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교회에 주셨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침투해 사단과 싸워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처럼, 정탐꾼처럼, 라합처럼 믿음과 용기있는 사람들이 됩시다.

교회 사역에서, 전도활동에서 겁을 먹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말 겁을 먹고 두려워하는 것은 곧 멸망당 할 사단과 그를 따르는 악한 영들입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아직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멸하러 왔느냐고 겁을 먹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예수님은 이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내서 전도하고 목장사역을 합시다. 그러면 주께서 교회도 가정도 우리 개인의 삶도 승리할 수 있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라합처럼 믿음의 선택을 하여 인생이 바뀌는 해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