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세우자

느헤미야5:6-13

지난 주 에버렛에서 교단지역컨퍼런스가 있었는데, 둘째날 저녁 아이스브레이크 시간에 100사람에게 왜 교회가냐고 물어보고 그 대답을 맞추는 게임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사람들이 주일에 교회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첫번째가 worship이었습니다. 둘째는? 한번 맞춰보세요! fellowship이었습니다. 그 다음 세번째는 preaching이었습니다. 이어서 leaving home, lunch였습니다. 요즘은 말씀듣는 것보다 worship이 대세같은데 찬양팀은 모든 교우들이 함께 은혜받을 수 있도록 곡 선정이나 준비에 더욱 힘써서 보람있는 사역을 하기 바랍니다.

제가 지난 주 심방하면서 느낀 건데 설교를 나혼자 열심히 준비해서 열변을 토한다고 효과가 있는게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재밌게 보던 드라마도 앞에서 몇 번 보지 못하고 중간부터 보면 내용연결이 안돼서 재미가 없잖습니까? 드라마도 그런데 설교는 어떻겠습니까? 요즘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설교하는데 느헤미야가 누군지, 어떤 시대 사람인지, 그 때 유다의 정치적 형편이 어떠했는지, 대충이라도 이스라엘과 파사제국의 역사와 아닥사스다왕이 누군지 이런 걸 모르고 설교를 듣고 있으면 내용연결이 안되는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흥미가 떨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설교에 은혜받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함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역사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주엔 성벽공사를 반대하는 외부의 반대세력과 그에 대한 느헤미야의 대처방법에 대해 주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정의를 세우자’는 제목으로 5장에서 언급되어 있는 내부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시대나 불평등과 억압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대부분 정치적인 권력의 억압과 경제적 착취에서 비롯됩니다. 왕과 귀족이 있던 옛날 사회에선 주로 권력과 신분 때문에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로 나뉘었습니다. 민주화가 진행된 오늘날엔 신분적 차별은 많이 해소되었는데, 지금은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그런 사회가 되었습니다. 정치나 경제에서 분배의 정의가 저의 일차적 관심은 아니지만 본문5장에 경제적 착취로 생긴 불평과 원망의 문제가 대두되어 있기에 오늘은 정의를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하버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책도 한 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인터넷에 동영상 강의를 시청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산발랏총독이 중심이 된 외부 반대세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의 지도아래 유다백성들은 성벽공사에 전념해 성벽전체를 연결시키고 높이도 절반쯤  쌓았습니다. 느헤미야와 유다백성들은 외부의 위협과 공격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대처해왔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1절을 봅시다. “때에 백성이 그 아내와 함게 크게 부르짓어 그 형제 유다 사람을 원망하는데…”(느5;1). 유다 사람들끼리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당장 먹고 살 식량이 없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2절). 어떤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가진 걸 모두 저당잡혔습니다(3절). 먹고 살기도 힘든데 세금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4절). 빚을 내 세금을 내고 그 빛을 갚지 못해 자녀들이 종으로 팔려가는 상황까지 몰렸습니다(5절).

이처럼 성벽공사에 참여한 백성 중에는 엄청난 경제적 압박을 받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형편이 넉넉해서 성벽공사를 한 것은 아닙니다. 일부 부유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어려운 형편에도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성벽공사에 참여했지만, 성벽을 먹고 살 수는 없었습니다. 성벽 일 때문에 이 전보다 농사에 소홀할 수 밖에 없어 소출도 적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이 부담해야 할 세금은 더 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빚을 내 세금을 납부하고 그걸 제 때 갚지 못해 자녀들이 종으로 팔려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부 귀족들은 성벽 재건에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고리대금으로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느3:5;5:5).

백성들의 원성을 들고 자초지종을 알아본 느헤미야는 귀족과 관리들을 불러 크게 화를 내며 책망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동족을 괴롭혔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7절에 ‘취리’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취리는 이득을 취했다는 말인데, 아마 급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이득을 취하면서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자식을 팔아서라도 갚도록 위협한 것 같습니다. 일부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성벽건축은 무관심하고 오히려 이런 기회를 이용해 가난한 사람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으로 재물을 모았습니다. 이런 정황을 알게 되자 느헤미야는 분노가 터져 나왔습니다. 성벽 건축하느라 저렇게 애쓰고 있는 동포를 상대로 이미 가질 만큼 가진 귀족과 관리들이 동정을 못할 만큼 어찌 착취를 한단 말인가?

지도자는 가능한 화를 안내는 게 좋습니다. 그렇지만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는 것을 보고 진노하셨습니다(신9:8). 예수님께서도 성전에서 동전을 바꿔주며 희생의 제물을 파는 사람들이 폭리를 취하며 성전을 욕되게 할 때 화를 내며 상을 둘러 엎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사람들을 몰아내셨다고 합니다(마태21:12-17).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여행 도중에 도망간 마가 요한의 합류문제를 놓고 의견이 달라 서로 심하게 다투기도 했습니다(행15:36이하). 느헤미야도 불의한 상황을 보고 화가 났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위험을 무릎썼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들을 위해 싸우는 것은 의로운 일이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가 유다 총독으로서 행정권을 가지고 있다곤 하더라도 토착세력인 귀족이나 관리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유리한 일이 아닙니다. 힘있는 자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지지도 얻고 또 후원도 받고 그럴 게 아닙니까? 선거때는 국민들 편에서 이야기 하던 사람들이 당선되고 나면 교묘하게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을 대변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을 대변한다고 돌아오는 게 뭐 있겠습니까? 이래서 세상은 별로 바뀌질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자기 이익이나 안전만 생각하는 그런 총독이었다면 억울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을 달래는 척하면서 뒤로는 귀족이나 관리들의 이익을 봐줬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느헤미야는 단호한 태도로 귀족과 관리들의 횡포에 맞섰습니다.

상식과 양심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나 문제를 보고 무엇이 옳으냐 누가 잘못한 것이냐 이런 걸 판단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처신해야 나에게 유익할까 이런 걸 더 따지기 때문에 정의를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귀족이나 관리가 가난한 백성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해서 착취하는 것은 누가 봐도 잘못된 것입니다. 최근에 일부 저축은행이 편법 탈법으로 부당대출해주다 자기 자본을 다 까먹고 퇴출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경영진이 그게 잘못인줄 몰라서 그렇겠습니까?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감독기관이나 검찰이 철저하게 수사하고 법적 처벌과 함께 배상의 책임까지 확실하게 물어 잘못한 은행장이나 간부들을 쪽박차게 만들어 아웃시켜야 합니다. 그런 짓하다가 걸리면 인생 끝장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이런 사람들이 얼마 후에 다시 요직에 기용되거나 자리를 옮겨다니며 더 부자가 돼있습니다. 요즘 월가의 데모도 분통이 터지는 사람들의 항변아닙니까? 이래서는 정의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저지르는 비리는 서민들보다 더 엄격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말만 Noblesse Oblige를 외쳐 봐야 효과가 없습니다.

화가 가라앉은 후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깊게 생각하고 마음 속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먼저 파렴치한 귀족과 관리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잘못을 자백받은 후 대회를 소집해 공개적으로 책임추궁을 했습니다(7절). 이런 사람들일수록 간교해서 앞에서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돌아서서는 온갖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는데 선수들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이 딴 소리 못하게 회중앞에서 잘못을 시인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고리대금업에 연류된 귀족이나 관리들은 느헤미야에게 온 갖 변명을 하고 뇌물성 타협안을 제시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단호한 태도로 억울한 백성들에게 정의를 세우는데 힘썼습니다. 다음 대통령은 이런 사람이 나오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귀족들은 느헤미야의 요구에 따라 종으로 삼고 있는 유다 사람들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번에도 느헤미야는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 종을 석방하겠다는 귀족들을 제사장 앞으로 불러내 공개서약을 하게 하고 서약을 어길 경우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했습니다(13절). 남을 비판하고 책망하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사회 구조적인 악을 뿌리 뽑기 위해서 지도자는 사회악을 척결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지도자는 억울한 사람편에 서서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그건 공권력을 위임받은 사람이 해야할 의무입니다. 그것이 공직자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지도자가 정의편에 서서 억울한 사람들을 돌보면 당연히 지지율도 올라갈 겁니다. 교회에서 목사나 목자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한편 10절의 내용은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하면 느헤미야가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곡식을 백성에게 취하여 주나니 우리가 그 이식 받기를 그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단지 솔선수범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포함시킨 것인지, 그 역시 한 때 이자놀이 한 잘못을 고백하고 앞으로 안하겠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이방인의 손에 팔린 형제 유다 사람들을 속량하기 위해 힘을 다했다”(8절)는 느헤미야를 생각하면, 곤란한 동족에게 이자 받고 돈을 빌려주는 일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특히 14절 이하를 보면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해 유다 총독으로서 받아야 할 녹봉까지 포기하고 매일 백여명이 넘는 관리들과 귀빈들을 접대하는데 소요되는 식품비용을 사비로 해결할 정도였으니(14-18) 가난한 백성을 상대로 이자를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이 기대하는 세상은 정의가 물처럼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이라고 외쳤습니다(암5:24).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공의를 구할 뿐 아니라 정의를 세우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당파를 초월해 공의를 세우기 위해 힘쓰는 정치 지도자들을 지지합시다. 우리들도 힘으로 약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고 불의한 재물을 얻기 위해 공의를 깨뜨리는 일을 멀리해야 합니다. 권력과 재물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바랍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또 힘으로 누르고 그러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조금 손해볼 각오를 하고 정의를 세우는데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가 정의를 세우고 공의를 행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