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을 세워주는 교육

삼상 2:26 ; 눅 2:52 - 안나실 목자

  ‘교육’ 하면 대한민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열성이 전 세계적으로 소문나 요즈음은 미국 대통령이 연설에서 언급할 정도입니다.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지배와 6.25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했던 ‘자녀 교육의 열성’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경제 대국으로 성장케 한 원동력이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 시대의 아픔을 겪은 부모들은 자신은 못 배워도 어떻게 해서든 자녀는 배우게 하고 싶고, 자신은 못 가져도 어떻게 해서든 자녀는 갖게 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자녀들을 키워냈습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된 좋은 의도가 도리어 자녀들로 하여금 과정 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 위주의 결과에 집착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자녀들은 극심한 이기주의와 열등감에 사로 잡혀 살게 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문지상과 뉴스에서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의 광기 어린 모습을 하루가 멀다 하며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질병”, 노이로제, 증오, 알코올 중독, 환각제, 폭력 등 그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연령대가 낮아져 이제는 초등학생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이러한 현실이 비단 한국뿐 이겠습니까? 국가를 초월해서 우리가 살아 가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가치관의 체계는 부당하고 불필요해 보입니다. 어린 아이들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고 열등감으로 고통을 겪는 “자기 회의”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진지하게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어린이들이 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지 못하고 자라는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느끼는지, 왜 우리의 가정과 학교가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자존감을 심어 주지 못하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미워하게 만드는 것인지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자들과 소아 정신과 의사들에 의하면 어린 아이들이 3-4세가 되면 자신의 가치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들을 한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누가 나를 필요로 하는가? 사람들은 나를 용납할 것인가? 나를 비웃지는 않을까?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할 의미는 있는 것인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 대답을 찾기 위하여 아이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실패할 때마다,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말을 잘 못할 때마다 자신을 대하는 어른들의 반응을 보며 그 증거들을 수집해 뇌 속에 저장해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린이들이 어른들을 통해서 보는 세상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과연 어떠하길래 꿈과 희망을 키우며 밝게 자라야 할 어린이들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고, 예수님처럼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더욱 사랑스러워져야 할 우리 어린이들이 열등감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이 그토록 어린 아이들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것일까요?
 
1. 미모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인간의 특성 중에서 신체적 매력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결과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면 부모들도 가장 먼저 아기의 신체를 보고 그 가치를 평가합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으면 ‘예쁘다’, ‘잘 생겼다’라고 하고, 그 경계가 애매하면 ‘귀엽다’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모두 미모에 관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좀 더 자라면 아이의 미모에 대한 어른들의 반응은 더욱 차갑고 냉정해집니다. 의도적이진 않지만 어른들은 매력이 없는 아이들보다 귀엽고 예쁜 아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쁜 아기 대회”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쁜 아이들은 자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칭찬과 상을 받게 되어 세상이 자신을 용납하고 따뜻한 곳이라고 보게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인데도 냉대를 당하고 상처를 받게 되어 점점 더 자신을 배척하는 세상에 더 익숙해져 갑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듣고 보게 되는 동화를 한 번 볼까요? 어린이들은 정말 어려서부터 신체적 미모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배우며 자랍니다.

“미운 오리 새끼”---불행한 아기 새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오리들에게 따돌림을 받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이상한 외모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이는 못생긴 아이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못생긴 아기 새 안에는 아름다운 백조의 모습이 숨겨져 있었고, 아기 새는 자라서 성숙한 백조가 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자라서도 여전히 미운 오리로 남아 있는 미운 오리 새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아름다운 백조처럼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참고 기다리지만 결국에는 성인이 되어서도 더 못생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잠자는 미녀”---왜 이 이야기는 “잠자는 추녀” 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만약 공주가 얼굴이 예쁘지 않았다면 왕자는 공주의 입을 맞추며 잠을 깨우려고 하기는커녕 계속 잠을 자도록 내버려 둘 것입니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이 이야기에서 악한 왕비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가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가 가장 고상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데렐라”---신데렐라와 두 의붓 언니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외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신데렐라 책에서 신데렐라는 헤어진 옷을 입고 머리는 빗질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무도회에서 왕자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미모였습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채택한 초등학교 교과서에 3명의 소녀에 대한 동화가 있는데, 그들 중 2명은 아름다운 머리와 예쁜 얼굴을 가진 매력적인 소녀였고 나머지 한 명은 정말 못생긴 소녀였습니다. 매력적인 2명의 소녀는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각각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못생긴 소녀는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했고, 아무도 그녀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결국 동물의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자신의 결점을 극복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성공으로 보이나 실제로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 못생긴 소녀는 자신의 외모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 추방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이 소녀의 신체적 결함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어서 이 글을 읽는 어린이들이 이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친구들을 얼마나 놀려댔을지 생각해 보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왜 우리는 사람들이 노력하여 얻을 수 없는 것, 태어나면서부터 거저 주어진 것을 그렇게 강조해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2. 지능
외적인 미모를 제외하고 어린아이들의 가치를 측정하는데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바로 지능입니다. 미모와 더불어 이 두 요소 중에 한가지만 빠져도 부모들은 열등한 아이를 낳았다는 실망감으로 고통을 받거나, 또는 자신의 못난 특성들이 자녀에게 유전되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첫째 아이의 출생이 가까워지면 부모들은 한결같이 정상적인 평범한 아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평범한 보통 아이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아기들은 생후 1년 동안 신체적인 성장과 발달이 매우 빠르고, 생후 2년째 접어 들면 지적 발달이 놀랍게도 빨라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천재인 것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미운 세 살이 되면서 아이의 고집스런 행동과 말에 힘들어 하면서도 아이가 독립심이 강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내심 자랑하기도 합니다. 유치원에 다니게 될 무렵이면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천재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아이들 역시 이 때부터 다른 영리한 아이들과의 격차가 엄청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지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의 경우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온 세상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교육자들이 고의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의 교과 과정은 지능이 낮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그 자존감을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뜨리고 있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모를까 다니는 이상 숨길 수 없는 사실 앞에 지능이 낮은 아이들은 자신이 바보이며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주로 학습 속도가 느려 배우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이중 언어를 사용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똑바로 배우지 못해 언어의 혼란을 느끼는 경우, 지능은 뛰어난데 훈련이 안되어 잘 하지 못하는 경우,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환경의 영향으로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한 경우, 그리고 또래보다 깨우침이 늦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이들의 수가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하는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배움의 자유를 스스로 찾아가게 하며, 나아가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을 기르는 것’인데 오늘날의 교육의 현장에 놓여진 우리의 아이들은 우정과 사랑과 협력 보다는 도리어 비교 경쟁과 적자 생존을 배워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대구 가스 폭발 사건이 있었을 때, 한 여중생이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정말 무서웠다”고 말했습니다. 엄마는 그 폭발 사고를 말하는 줄 알고 딸을 다독거려 주자, 그 딸은 “엄마, 사고가 무서운 게 아니야. 우리 반에서 일, 이 등 하는 아무개 말이 무서워. 걔가 우리 또래의 중학생이 죽어서 잘됐다는 거야. 입시 경쟁 상대가 그만큼 없어져서 좋다는 거야.”
 
교육의 일선에 있는 한 교사가 쓴 글입니다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어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 보고자 다음 글을 써본다. 부모의 욕심에 망가져 가는 아이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고액 과외에 이 학원, 저 학원 유람 후 결국 공부 포기자로 만드는 현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이의 눈동자는 희미하다. 방과 후 여러 학원을 이미 다녀왔기 때문이다. 이 아이에게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다. 억지로 설명하고 반복시킨다. 학교 성적 100점, 엄마는 또 다른 생각을 한다. 선행을 쭉 빼서 특목고 한 번 시도해 볼까?

밤 12시 그렇지만 이제부터 숙제 시작이다. 물론 초등학생의 경우다. 학원 유람 후 9시에 귀가, 씻고, 밥 먹으면 10시, 인터넷 강의 듣고, 학교 숙제와 학원 숙제를 한다. 그러나 그마저 졸며 혼나기를 반복한다.

아침은 그야말로 등교 전쟁, 방과 후 또 학원… 친구들과 놀고 싶지만 이미 꽉 짜여진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한다. 10분 이라도 어길 시 엄마의 휴대폰이 작동한다.

부모님들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하지만 지금의 방법이 결국은 아이를 불행으로 몰아 놓는 방법이 될 수 있다라고 한다면 어찌 하겠는가? 돈과 시간을 들여 아이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은 부모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부모들은 냉정하게 생각해 볼 게 있다. 내 아이를 위해 얼마만큼 알아 보고 고민을 했는지…”

 ‘에디슨’은 천재적인 발명가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등록된 특허권의 숫자는 무려 1,093건이며, 다른 나라의 특허권까지 합치면 1,500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런 그가 어린 시절에 학교 선생님으로부터는 “바보”, “학교에서 가르칠 가치가 없는 아이” 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에디슨의 엄마는 도리어 “이 아이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문제일 뿐입니다. 앞으로 내가 직접 가르쳐서 어떤 사람이 되는지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당당하게 학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절대로 바보가 아니야. 실망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법대로 에디슨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훗날 에디슨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어머니가 나를 이해하고 믿어 주시지 않았던들 나는 발명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옛날 선생님이 나를 보고 바보라고 했을 때 어머니는 나를 강력히 감싸 주었다”

우리는 에디슨이 남긴 업적만 보고 자녀들이 에디슨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에디슨이 발명품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부모가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쉽게 간과해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에디슨이 백열 전구를 발명하기까지 무려 1,200회가 넘도록 실험을 반복하고 있을 때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10번의 실험만으로도 지쳐 버리지 않았겠습니까? 죽기까지 아들에게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인내했던 어머니가 있었기에 에디슨은 천재 발명왕의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모와 지능 이 외에도 부모나 나이가 더 많은 형제들, 어린 시절의 큰 실수나 피해, 경제적인 어려움, 질병, 문제가 있는 가족 등이 아이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는 요인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문제는 회복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들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있는 그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합니다. 어떤 구체적인 기준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도달한 사람들만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사람, 지능이 높은 사람, 운동 경기를 잘 하는 사람, 예능에서 뛰어난 사람들만 사회에서 인정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도저히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는 다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낙담하게 하고 패배의식과 열등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성을 배워야 하는 시절에 우리 어린이들은 먼저 남들과 비교당함에서 비롯되는 ‘자기 비관’과 ‘왕따’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의 자살 비율이 높은 것은 그 무엇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 자존감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치 체계는 기독교 가치 체계에 정면 대응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존귀히 여기시는 사람의 삶을 파괴하려는 사단의 교묘한 술수이며 사악한 전략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꼭 지켜야만 합니다. 이것을 잃으면 우리 모두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인간의 존엄성마저도 허상이라고 떠들어대는 세상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자존감과 인간의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방패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들 앞에 놓여진 장애물을 담대하게 극복하며 자라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으로 품어 주는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