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손해를 보는 것

요한일서4:7-21

한 주간 잘 지냈습니까? 지난 주말은 Thanksgiving Day가 있는 휴일이라 가족과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지냈을 것입니다. 덧 없는 인생이니 수고해서 얻은 것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즐겁게 살면서, 하나님의 당부도 생각해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도 챙기며 삽시다.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을 주제로 여러분께 주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이 뭔지, 사랑을 베풀며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닫고 생활 속에서 사랑으로 사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αγαπη사랑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가페 사랑은 조건 없이, 계산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손해 보면서 베풀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람들끼리는 이런 사랑을 찾아보기 어렵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경우가 그래도 아가페 사랑에 가깝긴 하지만, 부모의 자식사랑에도 이기적인 마음이 다소 개입됩니다. 자식 잘 되면 자기에게도 유익하고 또 자랑거리도 되고 그래서 자식들에게 투자하고 그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고백은 물론 복음을 깨달은 이후에 나오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복음을 깨닫고 예수 믿어 구원 얻은 분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고백하는데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암에 걸려 죽음의 공포 속에 살면서도 병원비가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어떤 병원장이 딱한 소식을 듣고 그를 데려다가 무료로 수술 받게 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환자는 병원장이 자기에게 베푼 사랑을 알겠죠. 예수 믿어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면 이렇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걸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곧 하나님의 희생이었습니다. 희생은 세상의 셈법으로 표현하면 ‘손해’라는 말과 같습니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냥 감사하다고 받는 게 전부지만, 주는 사람의 입장에선 손해보고 수고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는 손해와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고통과 손해를 감수하셨는지 헤아리는 마음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받는 자의 입장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주는 것을 그냥 감사하게 받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주는 자의 입장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냥 감사하다고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희생시키는 고통스런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못에 박혀 죽어가는 자식이 “아버지여 왜 아들을 버리십니까?” 이런 절규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우리는 주로 받는 자의 입장에서 사랑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랑을 먼저 베푸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에서 사랑을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사랑을 받고 느낀 경우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을 말하는 것 만큼 사랑의 수고와 손해를 감당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까? 받는 자의 입장입니까? 주는 자의 입장입니까? 가능한 몇 사람이라도 주는 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교회에서 목장에서 우리 서로 사랑함으로 손해를 봅시다. 요한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7절)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11절)고 합니다. ‘이같이’는 하나님의 희생과 손해를 가리킵니다. 교회에서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는 것도 이같이 희생과 손해가 요구되는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의 수고와 물질의 손해를 감당합시다. 그냥 말로만 끝내면 여름 가문 하늘에 비 없는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약2:16) 고 묻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길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듯이 수고와 손해를 감당해야 합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도 말로 끝나면 춥고 배고픈 사람에겐 큰 위안이 되지 못합니다. 그 몸에 쓸 것이 함께 주어져야 진정한 사랑의 위로가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사랑을 주는 자는 수고하고 손해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장을 보면,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의 생활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물건을 서로 나눠 쓰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고 합니다(2:44,45). 그 때 바나바는 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팔아 교회에 헌금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물건과 재물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 아끼던 물건과 재산을 내 놓는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를 위해 손해 보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에선 따뜻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차원에서든 개인차원에서든 하나님처럼, 초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처럼 사랑을 베풀기 위해 손해 보는 것을 즐겁게 감당한다면 어떤 변화가 생겨나겠습니까? 늘푸른교회에서 진정한 공동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받는 자도 주는 자도 함께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역사가 일어나는 법이지만 죽은 믿음에선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생명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싹이고 마지막이 열매입니다. 열매를 맺기 원하면 먼저 생명부터 살려야 합니다.

지난 주 감사절도 보내고 이제 12월 한 달을 남겨두고 또 성탄절을 맞이하는 이 연말엔 선행을 베푼 사람들의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는 시즌이기도 합니다. 숨어서 자비를 베푼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론될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죠.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마음에 담아 가고 싶은 말씀은 사랑을 말로만 베풀지 말고 각자 수준에서 물질의 나눔까지 이어지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예루살렘교인들처럼 손해 볼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웃의 개념을 바꿔주셨습니다.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0:29,37).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아니더라도, 개인적 친분이 전혀 없더라도 곤경에 처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알고 있다면 그는 여러분이 자비를 베풀어줘야 할 이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교회에서 형제나 자매의 필요에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최후심판을 암시하는 비유의 말씀에서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것을 예수님께 자비를 베푼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5:40). 형제의 필요를 외면하는 것은 곧 주님을 외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굶고 헐벗으며 이웃을 도우라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으면 그 중에 얼마라도 곤경에 처한 형제와 자매를 돕자는 것입니다. 어려운 교우들을 돕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랑의 수고입니다.

제가 손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사실은 손해가 아닙니다. 왜냐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주님을 따라가는 길인데 어떻게 손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통장에 잔고가 하나도 없어서 줄 수 없는 것보다 얼마라도 줄 수 있다면 더 복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지금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풀면 나중에 나와 내 자녀들이 어려울 때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입니다. 손해보다 저축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마6:20). 교우 여러분,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적극 활용하기 바랍니다. 그것이 영생을 준비하며 복 받고 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