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예수

마1:18-25

오늘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그래서 인류의 역사가 끝나기 전에는 잊지 말고 기념해야 할 사건인 구세주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주일입니다. 우리가 12월 25일을 예수님 탄생일로 정해서 축하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이 태어난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성탄의 의미는 언제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그 사실에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과정부터 살펴봅시다. 예수님 탄생에 대해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예수님 탄생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내용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으로 기록된 내용도 있고 각각 다른 내용도 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와 요셉에게 성령으로 잉태될 것에 대해 알려주는 내용은 두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동방박사의 방문은 마태복음만 기록되어 있고, 천사가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에게 메시야탄생을 알리는 내용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여러 상황을 살펴보고 마리아와 요셉의 믿음과 순종, 성탄의 의미, 그리고 성탄의 의미를 어떻게 삶에 적용할 수 있을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8절에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라는 구절부터 봅시다. 유대 나라 결혼 풍습에 자녀가 어릴 때 부모들이 서로 혼인을 약속하는 것을 정혼이라고 합니다. 양가의 합의로 정혼한 남녀는 15,16세 이후엔 부모의 허락을 받아 동거하거나 결혼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는 정황상 15,6세를 넘긴 것 같고, 아직 동거나 결혼을 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 다음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처녀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누가복음1장 26절 이하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서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라고 말합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당황하는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아기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당황한 중에도 남자를 알지 못하는 자기가 어떻게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수가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성령이 임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어 임신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 아니냐,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논쟁은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을 수 없는 일로 남을 것이고 믿는 사람에겐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뭔들 못하시겠습니까? 추측컨데 천사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마리아 역시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생물학적 관점에선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그렇게 대답합니다. 유대사회에서 정혼한 처녀가 정혼남과 상관없이 임신한 것이 드러났을 때 자신이 어떤 입장에 처하게 될 지 생각했다면 이렇게 쉽게 허락할 일은 아닌데, 마리아는 하나님 뜻에 자신을 내어줬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이 빛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어느날 요셉은 정혼녀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려준 것인지,요셉이 눈치챈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아직 요셉은 마리아가 어떻게 임신했는지 그 비밀은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정혼녀가 임신한 사실을 안 후부터 요셉은 마음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요셉이 제일먼저 느낀 감정은 무엇일까요? 배신감, 분노, 낙심, 연민 등 요셉도 사람이니까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며칠을 두고 고민하던 요셉은 조용히 파혼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르면 정혼녀가 동정을 상실한 것이 드러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잉태하게 된 것인지 경위를 모르는 요셉은 마리아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정혼녀를 보호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요셉의 배려심과 신사도가 빛납니다. 요셉의 인품이 우리보다 한 수 윕니다. 허물은 들춰내지 말고 감춰주는 것이 그리스도인 다운 행동입니다.

마태복음1장 1절 이하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1절 서두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족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족보 기록형식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이런 식으로 부자관계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를 낳고’ 이렇게 표현해야 정상적인 패턴인데,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만 드러나게 표현했습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에게서 낳았다고만 말합니다.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자기와 상관없이 임신한 정혼녀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고민하다가 조용히 파혼하는 것으로 정리하려고 결론을 내린 즈음에 요셉의 꿈에 천사가 찾아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정혼녀 마리아의 임신경위를 해명해주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했습니다. 천사의 설명을 듣고 마리아가 부정한 여인이 아님은 알았다고 해도 자기와 상관없이 임신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임신한 아이라니,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그런 것 아닙니까?  이 아이 때문에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 돌발 상황 앞에 요셉은 겁에 질린 것 같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천사는 요셉에게 아들이 태어날 것과 그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고 말했습니다. 아기 이름을 예수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은 6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바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이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뭐라고 부르든 뭐 대숩니까? 그냥 희망사항인 거죠.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을 담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유사 이래로 사람 숫자만큼 많은 이름이 있었고 있습니다. 그 중 어떤 이름 속에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한다는 의미를 가진 이름은 없습니다. 아니 누구도 그런 이름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인간이 누굴 구원하겠다고 그런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까? 오직 딱 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그 아기만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세주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 믿음으로 구원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자기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하나님의 백성임을 거부하고 사단에 속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죄 용서 받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부터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자기 백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15장을 보면, 어떤 가나안 여인이 병든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자, 예수님은 자녀들이 먹을 떡을 취하여 개를 줄 수는 없다는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여인은 개라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 먹는다고 말하며 그런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믿음을 칭찬하며 이방여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백성 편으로 들어와야 구원의 은혜을 얻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시기 위한 통로로 왜 마리아와 요셉이 선택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시는 데는 위험과 희생을 감수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 오시는 구세주는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은 이미 죄에 물들어 있습니다. 남자의 씨로 태어나서는 죄 없는 구세주가 될 수 없습니다. 해서 죄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남자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믿음과 순종이 이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이제 구원이 자기 백성에게 성취되기 위해선 또 다른 차원에서 믿음과 순종이 필요합니다. 하늘 아래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구원얻지 못하고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사람들은 구원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세상 끝까지 증거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 그들의 인생을 다 바쳐 순종한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의 재물과 시간과 삶을 드려 순종할 때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순종하여 복있는 자들이 된 것처럼, 여러분도 세상을 사는 동안 구원을 이루는 일에 순종하여 복있는 자들의 대열에 참여하기 바랍니다. 목자로 섬기고, 전도하는 일은 복 받는 지름길입니다. 물론 고생하고 수고해야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사생활을 포기하고 위협을 받으며 피신을 다녔습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고통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순종할 때는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보며 자기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 같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은 상상치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기쁨 또한 마리아의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하나 같이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만일 예수님을 믿는 것 말고도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연약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 헤롯 같은 사람의 살해위험에 놓이게 하고 또 온갖 조롱과 수치를 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어가게 그렇게 하셨을까요? 요즘 종교간의 화해를 도모하며 예수 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나, 목사나, 신부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은 괜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할 때, 죄인들을 구하는 방법이 독생자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어야 합니다. 아니면 너무 잔인한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지금 불신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독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든지 간에 자기들이 구원 얻는 길이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한 우리는 위축될 것이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선에 타고 있고 저들은 가라 앉는 배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상의 권세를 잡은 마귀 편에서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며 기세 등등하게 성공의 표상처럼 군림하고 있더라도 그들은 가라앉는 배 위에서 그 사실을 모른 체 연회에 빠져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저들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무슨 자만도 교만도 아닙니다. 가라앉는 배에서 사람을 구출할 때 구조원들이 어떤 자만심으로 대결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죽기 전에 한 명이라도 더 구해 내겠다는 일념 뿐일 것입니다.

세상을 난파선으로 보고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내는 것을 교회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그래서 사랑하시는 곳입니다. 우리가 대적해야 할 것은 세상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죄를 이용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는 악한 사단과 사단의 지배를 받는 세력들입니다. 이런 사단의 궤계를 깨뜨리고 하늘에서 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 이름 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를 믿고 거듭난 새롭게 된 심령으로 복음의 정신에 따라 살아갈 때 개인은 물론 세상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구원 얻게 될 것입니다.

자본주의 탐욕 때문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꿈꾼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성패는 어떤 이념이냐가 아니고 어떤 사람이냐에 있습니다 죄에 물들어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탐욕스런 사람이 권력을 잡고 통치하는 한 불의와 불평등과 권력남용은 사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 안에서만 지배하는 불의한 권력이 섬기는 정의로운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20%정도의 사람들이 80%의 재물을 소유하고 80% 사람들은 20% 재물을 놓고 서로 좀더 갖겠다고 싸우며 절망하고 있습니다. 이게 세상 나라입니다. 이런 세상 바꿔야죠. 어떻게 바꿉니까? 정치로? 혁명으로?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만 희망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예수 믿어 변화 받고, 진심으로 예수를 따르기 시작하고, 진심으로 복음의 정신에 따라 교회를 운영하고,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자기 소임을 다하기 시작하면 먼저 그 공동체 안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나 세상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임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후에 천국 가기만을 기다리는 교회생활을 해선 안됩니다.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정신과 가치를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며 세상을 섬기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묻는 자들에게는 예수님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 사람이면 누가 세종대왕을 부끄러워하고 이순신장군을 부끄러워합니까? 너무도 자랑스런 이름아닙니까? 만일 그분들이 직계 조상이 된다면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죽고 세상엔 없고 더 이상 어떤 영향도 발휘할 수 없는 사람들인데도 왜 그 이름이 자랑스럽습니까? 그 분들이 한 일 때문입니다. 글을 만들어 백성들을 편케 해주고 외침의 위험에서 나라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그 이름이 부끄럽습니까? 자랑스럽습니까? 어떻게 부끄러울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죄에서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분 아닙니까? 지금도 믿는 자는 누구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예수 그 이름은 너무도 위대하고 자랑스런 이름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유일한 희망인, 예수 이 이름을 세상에 다 듣도록 전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이름을 세상에 전파하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고 외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3일 동안 돌아다니며 회개하라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 결과 니느웨는 왕부터 백성까지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했다고 합니다. 굶주림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다일공동체를 운영하는 최일도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서울 청량리 역 근처에서 소외되고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신학대학원 졸업반 때, 춘천으로 가려고 청량리 역에 나왔습니다. 역 마당을 지나갈 무렵, 자기 앞에서 어떤 노인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갈 길이 바빠 다른 사람이 도와주겠지 하고는 그냥 스쳐 지나갔다고 합니다. 일보고 저녁 나절이 되어 다시 청량리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 쓰러졌던 노인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답니다. 최 목사님은 그 노인을 부축해 근처 식당에 가서 식사를 시켰습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의 가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내가 앞으로 목사로서 어떤 사역을 해야 될까? 이렇게 굶주리고 외롭고 힘들게 사는 사람을 위해서 내 인생을 바치자." 그래서 독일로 유학 가려던 꿈도 접고 청량리 역 근처를 자신의 목회지로 삼고는 사역을 하게 되었답니다.

지난 번에 뉴욕 리디머교회의 부하직원의 실수를 대신 담당해준 보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 자기 허물을 대신 짊어 주신 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했는데, 그 결과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아마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 시리즈로 계속 이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자라는 뜻이라고 천사는 말했습니다. C. 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가 세상으로 내려간 것은 죄로 인해 폐허가 된 온 세상을 자신과 함께 들어올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죄인 취급당하며 버림 당한 그런 사람들 곁으로 가셨습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세리들, 창녀들, 변두리 사람들. 솔직이 이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유쾌할 일이 아니죠. 그래서 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지 2천년도 더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시에 재림을 대비하며 살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종말론 교리를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주님을 보기 부끄럽지 않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부분은 복음서를 읽으면서 여러분 각자가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