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는 믿음을 자라게 한다

출애굽기 32-33장 - 안나실목자

해마다 봄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졸업하고 떠나거나, 학업을 위해 다른 주로 가거나, 또 취업이 안되어 갈 수 밖에 없는 형제 자매들이 늘 있어 왔기 때문입니다. 가야만 하는 지체들의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겠지만 떠나 보내야 하는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힘든 마음 때문에 사실은 더욱 기도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들이 생명 있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할텐데… 이들이 어디를 가든, 어떤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할텐데… 이들이 새롭게 만나게 될 교회에 유익을 끼치고 섬기는 일꾼으로 살아가야 할텐데… 이런 저런 생각과 아쉬움에 더욱 기도하게 됩니다.

애타 하는 마음에 울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부르짖고, 이런 사역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달라고 매달리고… 아마도 목자로 섬기는 형제 자매들은 조금씩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기도도 하기에 부족한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애간장이 다 녹을 정도로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함으로 얻는 것도 많습니다. 우선은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됩니다. 알수록 그 영혼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내내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을 때는 마치 내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매우 기쁩니다.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됩니다. 더 이상 자신의 문제나 다른 사람의 문제가 문제로 여겨지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기회로 여기게 됩니다. 매 순간 기도하니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어 이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사람, 강인한 기도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 보는 안목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은 오직 기도하는 자만이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은혜요 복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 보아 알지어다”(시34:8).

오늘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시 받고 있는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32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 올라 가서 늦게 내려 오자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을 할 당시 애굽에 내려진 10가지 재앙들과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분명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모세가 자리를 비우자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아론을 앞세워 눈에 보이는 신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아론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금장식품을 녹여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금송아지를 향하여 애굽에서 탈출하게 해준 너희들의 신이라고 말하자 백성들은 춤추며 노래했습니다. 모세를 통해 경험했던 그 엄청난 하나님은 그 순간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금 덩어리를 보고 기뻐 날뛰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한 일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7절에 모세더러 백성들이 부패하였으니 얼른 산을 내려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 상황을 한 번 살펴 봅시다. 모세가 백성들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는 출애굽의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늘 들어 왔던 터라 이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반 강제적으로 그들의 지도자가 된 것에 대한 약간의 한탄과 아울러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들을 지도하는 스트레스를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에겐 지금이 힘든 모든 상황을 빠져 나올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어쩌면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 보세요. 하나님.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지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처음부터 제가 안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뭐가 아쉬우셔서 이 어리석은 백성들 때문에 속상해 하십니까? 이 참에 확 멸해 버리시고 말 잘 듣는 백성들이 어디 있나 딴 데서 찾아 보시고 이들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스트레스 받지 마십시오. 저도 이 노년에 이들 때문에 마음 편히 자지 못하고 이렇게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습니다.”

혹시 목자된 우리는 모세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까요?
“목사님, 언제 제가 목자 시켜달라고 했습니까? 억지로 시키시고는 양들이 교회도 안 나오고 제 멋대로 사는 것을 왜 저의 책임처럼 말씀하십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지요.  그러니 이제 제적명부에서 제하고 순한 양들을 다시 찾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도 학교에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크니 그들로 인한 스트레스는 더 이상 받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모세는 백성들의 죄가 마치 자신의 죄인 양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32장 11-1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따끔하게 혼을 좀 내달라고 기도하여도 비난을 받지 않았을 터인데 도리어 모세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용서해 달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매우 지혜롭게 백성들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범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진멸하면 그것은 온 땅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능력과 그 이름에 손상이 가는 것일 뿐 아니라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스스로의 약속을 변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해 달라고 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는 민수기 23장 19절의 말씀 대로 모세는 말씀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14절에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기도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금방 뜻을 바꾸시려면 처음부터 진멸하신다고 하지 마시지 하나님 체면 안 서시게 이랬다 저랬다 하십니까?’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또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또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분이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죄는 결코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스스로 정하신 질서를 스스로는 변개치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가 용서를 구할 때 그 마음을 돌이키실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비슷한 예를 들어 볼까요? 어떤 아버지에게 말 안 듣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몇 번이고 타이르고 매도 들었지만 거듭 거듭 잘못을 해서 화가 단단히 난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기 위해 규칙을 정했습니다. 한 번만 더 나쁜 짓을 하면 매를 100대 맞아야 한다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거의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의 매의 숫자를 말했으니 이 번에는 아들의 나쁜 행동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또 다시 죄를 짓는 아들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매를 들었습니다. 한 대, 두 대,….열 대, 열 다섯 대…아프다고 소리지르며 고통스러워 하는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눈물 어린 목소리로 크게 말합니다. “빨리 잘못했다고 빌어. 다시는 안 하겠으니 용서해 달라고 해!!!” 아들의 버릇을 고치기는 해야 하나 매를 맞는 아들을 보고 가슴 아파하지 않는 아버지는 없기에 빨리 용서를 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버지가 정한 규칙이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용서를 구하면 매를 멈출 수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매의 속도를 늦추면서까지 아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기를 기다립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속성에 기대어 기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모세는 산을 내려와 백성들의 범죄 현장을 목격하고는 19절에 대노하여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진 두 돌 판을 던져 깨뜨리고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불 살라 부수어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어리석은 백성들을 주도하한 자신의 형 아론을 향하여 심하게 질책하였습니다. 이에 아론은 21-22절에서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을 변명하였습니다. 첫째는 백성들이 악하고, 둘째는 그들이 요구했고, 셋째는 금 고리를 불에 던졌더니 금송아지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가 타당하지는 않았지만 악한 그들의 거센 항의를 뿌리칠 수 없었고, 또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에 정성을 다하지도, 주도하지도 않았으니 자신은 책임질 만한 그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죄는 인정하지만 그 심각성은 깨닫고 있는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모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래, 이 백성들은 어리석고 연약한 것을 나도 아니 어쩌겠나, 내가 없는 동안 잠시나마 그들을 위로해 주어 잘 했다’라고 칭찬했습니까? 아닙니다. 백성들이 무지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네가 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고 도리어 백성들이 어리석은 일을 하도록 부추겼다고 책망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론이 행한 일이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론이 누구입니까? 모세의 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라는 명령을 내리실 때 모세의 대변자로 세우신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 역시 모세를 통하여 일하신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론에게 더 화를 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하나님 편에 서서 그 사건에 가담하지 아니한 레위 자손들을 명하여 범죄한 자들을 치게 하였는데 그 날에 죽은 수가 삼천 명 가량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하지만 범죄 현장을 목격했을 때 모세는 노를 발하였습니다. 이들이 지은 죄가 얼마나 심각하며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범죄 현장을 정리하긴 했지만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31-32절에 보면 모세는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기대어 기도했던 처음과는 달리 이 번에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기꺼이 용서해 주실 마음이 계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돌 판에 새겨 주신 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들을 위하여 우상을 새겨 그것에 절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질투하시므로 그 계명을 범하면 자손 3-4대에 이르기까지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이 두 계명을 동시에 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속성을 들어 잠시 그 뜻을 돌이키시게 하긴 했지만 그들이 지은 죄가 너무나 중한 것이라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마음에 다시 기도해야만 했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죽을 죄를 지었지만 그만큼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기도한 모세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의 진노를 거두기는 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갈 때 함께 하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33장 3절에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 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굳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범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모세는 알았기에 33장 15-16절에 또 다시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 하였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저도 가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곳까지 인도하시고 이 땅에 늘푸른 교회를 세우도록 하셨는데 우리 가운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가 없다면 불신자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또 신자들이 어떻게 교회를 든든히 세워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지하고 연약하니 불쌍히 여기셔서 이 땅에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듯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들을 나타내시옵소서”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17절에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이때 모세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응답의 확증을 구하였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 것 같습니까? 계속해서 약속과 확증을 구하는 모세에게 대하여 왜 나를 못 믿느냐고 화를 내셨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가 거듭 거듭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주의 영광도 보게 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33:19, 22)

초자연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마치 친구와 이야기 함과 같이 자연인인 모세와 나누시는 이 흥미진진한 대화!!!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모습입니까?

모세는 어떤 인물입니까? 처음부터 신앙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숙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그를 사용하시겠다고 하셨을 때 그는 따지고, 묻고, 핑계 대고, 거절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는 순간까지도 모세는 ‘그것 보십시오. 내가 안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출 5:22)라고 푸념을 늘어 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4장을 기점으로 모세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을 탈출하여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뒤로는 애굽의 병사들이 추적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막자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왜 우리를 끌고 나왔느냐? 애굽에서 종으로 살아 가도록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 광야까지 끌고 와 우리 모두를 죽일 작정이냐?’ 

이런 상황 속에서 모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백성들의 숱한 불평 속에서도 모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조급해 하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중보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입니다. 어쩌면 갈수록 더 높아지는 산일지도 모릅니다. 처음 등산 하는 사람은 뒷동산도 오르기 힘들지만 자주 여러 번 오르다 보면 그 보다 훨씬 높은 산도 쉽게 오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 주어진 산을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믿음으로 오르다 보면 그 다음 높은 산 또 그 다음의 더 높은 산은 처음에 올랐던 산보다 더 낮은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가운데 직면하는 인생의 문제와 역경과 고난 속에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함으로써 믿음이 성장하여 태산도 뒷동산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에서 그 이상의 차원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자연의 지배를 받는 우리가 자연을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엄청난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 시간에 우리는 주로 무엇을 말합니까? 그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성은 하나님과 친밀한 정도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 늘푸른 교회의 영성은 중보 기도자가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늘푸른 교우 여러분
믿음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우리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합시다. 이왕에 신앙의 삶을 살기로 결단했으니 영통하는 사람으로 차원이 다른 삶을 한 번 살아 봅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종말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이 세상과 또 그 가운데서 주의 사역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을 위해서, 우리의 지체들을 위해서, 불신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강인한 사람이 됩시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쉬지 못하시게 합시다. 그렇게 해서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체험함으로 누리는 복이 어떠한지, 또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얼마나 멀쩡하게 살아계신 지를 간증하며 선포하는 늘푸른 교회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