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힘

느혜미야 1장 1절 – 4절

 이 말씀을 하게된 이유는 겨울 수양회를 다녀와서 매일 성경책을 하루에 3장씩 보기시작했습니다. 마침 느혜미야서를 읽을 순서였습니다. 다니엘서부터 시작해서 신약 다 읽고 구약 창세기부터 해서 읽다가 이제 느혜미야를 읽을 차례였습니다. 느혜미야서를 1장을 다 읽고난 후  예전에 내가 가졌던 질문이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그 질문은  느혜미야의 금식 그리고 눈물의 기도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예전부터 들었습니다. 그 질문의 해답을 찾지 못한 체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번에 다시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그 질문이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느혜미야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금식하며 울며 기도했습니까? 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어떤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 깨달음은 예전에 제가 경험 했던 것을 연관시켜서 제게 알려 주셨습니다. 아주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참 감사 했습니다. 그리고 기뻤습니다.  혹시 여러분중에서 해답을 아시는분이 계시면 아는체 하지 마시고 잠잠히 계시면 좋겠습니다.  미리 얘기 하면 재미 없잖아요. 말씀을 귀기울여 들으시면 해답을 알게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재자 처럼 내가 너희를 만들었으니 너희는 나를 매일 찬양하고 기도해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 의지를 사용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오늘 교회 갈까 말까, 술한잔 할까 말까, 말씀을 읽을까 말까, 놀러 갈까 아니면 공부를 할까, 어떤 학교를 갈까, 유학을 갈까, 이 자매/형제와 결혼을 할까, 어떤 드라마를 볼까, 어떤 게임을 할까, 미국에서 계속 공부하면서 살까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갈까 등등 이런 선택을 하면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인생이라는 이름 하에 선택의 연속을 사는것 같습니다. 보통 선택을 할때는 여러분 마음에 드는 선택을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을 하기란 참 힘듭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희생해야 하니까요. 희생을 미덕으로 여기며 사는 표본이 있습니다. 그 희생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분도 아마 계실 겁니다. 그 표본은 바로 가족 입니다. 가족이 있으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선택을 못합니다. 가족의 의견을 따릅니다. 주로 아이들의 선택이나 아니면 엄마의 선택을 따릅니다. 아빠의 선택을 따르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그리고 선택을 했으면 그에 따르는 결과에 따라서 후회를 하든지 아니면 잘했구나 라고 생각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면 많은 고민을 했는데도 여러분께서 하신 선택 가운데 혹시 내가 잘못 선택했다 라고 후회 하실 만한 선택을 하신 경험은 없으십니까?  이 전공을 택하지 말고 다른걸 했었어야 했어, 지금 여자 친구나 혹은 남자 친구가 맘에 들지 않아서 헤어지자라고 했는데 괜히 얘기했어, 아니면 내가 유학을 시애틀이 아닌 다른 도시로 갈껄 하며 후회 하지는 않으십니까? 

그 선택에 있어서 사람들이 후회를 할때는 보통 자신이 불이익을 당했을 때 후회를 합니다. 여기서 불이익이란 자신이 기대했던 성과 혹은 최선의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입니다. 그리고 칭찬을 받거나 이익을 얻었을 때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불이익이나 이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제가 돈을 잃거나 누군가에게 맞으면 그게 불이익 입니까? 반대로 돈을 따거나 누굴 때리면 이익 입니까?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면 돌로 맞아서 죽은 스테반 집사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나, 어이없게 돌아가신 사도 요한이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많은 분들, 본문에 나오는 느혜미야는 모두 후회를 했을까요? 후회 했는지 아닌지는 여러분께 맞기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느혜미야도 마찬가지로 선택을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벽을 재건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느혜미야서에 대해서 설교를 하셔서 역사적인 배경은 생략하겠습니다. 본문에 아닥사스다왕이 나옵니다. 이 아닥사스다왕은 페르시아제국 메케네메스 왕조의 다섯번째 왕이었습니다(BC464-423). 그럼 그 당시 느혜미야는 예루살렘에서 살지 않고 페르시아 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던 하나니라고 하는 느헤미야의 형제중 한 명과 두어 사람이 함께 느헤미야를 방문 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그 방문자들에게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어 봅니다. 아마도 편지같은걸로도 교류가 없었나 봅니다. 이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전화기가 없어서 그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면 형을 만난 느혜미야는 반가웠을 겁니다. 반가운 표정을 지은 느혜미야가 물어봅니다. 요즘 예루살렘은 어때? 그럼 방문자들은 아주 슬픈 표정을 지으며 대답합니다. 엄청 힘들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타고 없어. 좀 자세하게 알기를 원해서 제가 사전을 찾아 봤습니다. 환난: 근심과 재난을 통틀어 일컫는 말. 재난의 종류: 지진, 해일, 태풍, 산불, 한파 등등. 능욕: 남을 업신여겨 욕보임. 여자를 강간하여 욕보임. Shame: the painful feeling arising from the consciousness of something dishonorable, improper, ridiculous, etc., done by oneself or another.
요즘 시리아에서 전쟁이 일어 난걸 뉴스로 봤습니다. 큰 건물이 무너져 있는 영상을 봤을 때 예루살렘이 저랬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성경에 통해서, 제가 생각하는 느혜미야, 개인의 삶은 괜찮았으리라 짐작을 해봅니다.  강성한 나라에서 그 나라의 왕의 술 관원이라는 직분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잘먹고 잘살고 있어보입니다.  지금 시대에 비유하면, 느혜미야는 미국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위해 일하면서 잘먹고 잘살고 있었어요. 근데  시리아에 있는 형제 하나니와 친구 두어 명이 왔어요.  그 분들이 지금 시리아에 성이 불타고 흔적도 없고 사람들은 능욕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저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저는 이렇게 했을껏 같습니다. “어 그래? 힘들겠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거 먹고 힘내” 조금 선심을 써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있고 싶으면 더 있어도 돼.” 하지만 느혜미야처럼 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안락함을 뒤로한채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려고 아무런 보수 없이 떠납니다. 이런 선택은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이 선택은 저 뿐만 아니라 가족도 힘들게 하는거니까. 그리고 느혜미야처럼 이렇게 기도를 하지 않겠죠. 저는 몇날 몇일을 울고 슬퍼하고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고 기도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느혜미야는 하나님께 먼저 울면서 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사람은 울며 슬퍼 합니까? 어린이들은 조금만 다치면 울고 슬퍼합니다. 혹시 피라도 나면 대성통곡을 하고 웁니다. 그리고 밴드애이드 붙이면 괜찮아 합니다. 아이들은 피가 멈추는 사실을 모릅니다. 한번 피가 나면 피가 계속 나는 줄 압니다. 반창고를 붙이면 안심하는 이유는 반창고가 피를 멈추게 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마나 아빠가 죽는 꿈이라도 꾸면 자다가도 대성통곡합니다 실제로 죽었는 것 처럼 그리고 무서워 합니다. 그때는 반창고를 붙일 때도 없습니다. 그때는 안아 주고 엄마 아빠는 죽지않는다고 얘기 해야 합니다. 그럼 다 큰 어른은 어떨 때 웁니까? 다큰 어른도 슬플때 웁니다. 하지만 왠만한 슬픔은 참습니다. 여자분들은 워낙 섬세해서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많이들 우시든데요. 하지만  남자는 왠만해서는 잘 울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웁니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하지만 가족과 헤어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여기서 헤어짐은 영원히 이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다 큰 어른이 대성통곡하고 우는 모습을 어머니를 통해 보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7살 정도로 짐작합니다. 저는 이모가 여러 명 있습니다. 그 중에서 큰 이모가 그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엄청 슬퍼 하셨습니다. 여기서 엄청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한달 가량을 밥도 잘 먹지 않으시고 제가 학교 갔다오면 여전히 어머니는 울고 계셨습니다. 근데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이모가 돌아가셔서 그런지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아주 친한 이모 였다면 울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어머니는 자신의 둘도 없는 언니 였기 때문에 아주 슬퍼하셨습니다. 다른 누구의 언니도 아니고 자신의 친 언니였습니다. 그래서 한달 넘게 어떨때는 소리내시면서 밥도 잘 드시지 않고 우셨습니다.  아마 느혜미야가 이랬나 봅니다. 남자인 느혜미야가 얼굴도 모르고 본적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환란과 예루살렘 성의 무너짐이 자신의 형제가 죽은 것 처럼 슬펐나 봅니다. 그래서 느혜미야는 밥도 먹지 않고 슬퍼 울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느혜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것도 아닌데 어떻게 보지도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에게는 수일을 슬프하고, 금식하고, 울고, 그리고 하나님께 저들을 위해 기도 할 수 있었을 까요?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슬픈 마음이, 울음이, 그리고 저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이 생겼으며, 도대체 그런 마음은 뭘까요? 저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하는 마음이 하루 아침에 그 소식을 듣자 마자 생겼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아마도 느혜미야는  자신의 고국을 위해서 매일 매일 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 드리자면 저는 믿지 않는 고모님이 두분 계십니다. 두분다 한국에 계십니다.  절에 자주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느날 제가 기도 할 때 제 고모님들이 생각이 나서 의무적으로 이 두분을 위해서 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하나님을 믿지 않으시니까 믿게 해달라고 형식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한번, 두번, 그리고 세번 할수록 저의 고모님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이 들고 저의 고모들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프게 느껴지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기도 할 때 마다 고모님들을 생각하면 가슴 아팠습니다. 느혜미야도 매일 매일 하나님께 하나님의 백성, 자신의 민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을겁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한번 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자신이 매일 매일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환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느혜미야 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죠, 당연희 기도해야죠. 자신의 친 형제 자매가 고통속에 있는 것 처럼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는 그런 마음이 안 들겠죠. 본적도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을 격고 능욕을 다하니 그 마음에는 내 형제 자매가 고통속에 있으니 느혜미야의 마음은 너무너무 안타까웠을 겁니다. 그 마음에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께 절규하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당시 페르시아에 사는 유일한 이스라엘 사람이 느혜미야였겠습니까? 느혜미야만 페르시아에 사는 유일한 이스라엘 백성이었을까요?  짐작컨데 아닐겁니다. 하지만 느혜미야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수는 있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 사람이 기도한다가 아니고  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예전에 금요일과 주일을 통해서 신앙생활은 은혜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아니죠?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구합니까? 기도로 구하죠. 그럼 기도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한다는 말은 어떻습니까? 말이 안되죠.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자기 주장이 강해집니다. 여러분들도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간절하게 기도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기 바랍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네 목사님께서 작년에 느혜미야에 대해서 설교하신 말씀을 제가 발췌했습니다.

오늘 설교 말씀의 제목은 기도의 힘 입니다. 제목만 보면 기도를 통해서 병 고침을 받고 부자가 되고 그런게 떠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 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까지도 사랑하게 만드는 하나님께서 강조 하시는 사랑을 얘기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기도가 없었다면 느혜미야의 선택도 없었을 것 입니다. 기도의 힘이란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복진형 형제님께서 평신도 사역 첫째주 금요 기도 모임에서 섬김, 사랑 그리고 소망 으로 고린도 전서 12장 후반부 에서 13 장까지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때 집으로 돌아가서도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믿음도 패하고 소망도 패하나 사랑은 남는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네 옆에 있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느냐? 맞습니다. 제 힘으로는 사랑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옆에 앉아 계신 형제 자매분 전혀 모르다가 여기서 처음 만났는데 사랑하십니까? 부끄럽지만 저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잘 않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교회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십시요 라고 기도 해야 합니다.

제가 한가지 가정을 끝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만약 무너진 예루살렘 성이 불탄 성문이 여러분 옆자리에 앉은 형제 자매의 신앙 생활이라면 혹은 신앙 상태 라면 , 지금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의 신앙 생활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저들의 영혼이 환난과 고통속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느혜미야가 리더였으니까 리더만 기도 해야 합니까? 아니죠. 우리 함께 기도 해야죠. 무너졌거나 무너질려고하는 신앙생활을 함께 일으켜야 하지 않을까요? 예전에 나오다가 나오지 못하거나 나오지 않는 형제 자매를 위해서, 혹시 믿지 않는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들을 위해서 매일 매일 형식적으라도 기도 합시다. 기도라는 사랑의 표현 방법으로 함께 우리의 아버지께 알립시다. 그런데 함께 기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많은 방해가 있을것이고 그러면 힘들어 질겁니다. 하지만 포기하지않고 끝까지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요나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자 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들까지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들을 사랑하시나까 저들을 아끼시니까 라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럼 이게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렇게 우리가 합심해서 선을 이룬다면 이게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게 아닐까요? 그런 일이 우리 늘푸른 교회를 통해서 나타난다면 우리가 바로 현재의 느혜미야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