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13장 8-10 - 안나실

 우리 늘푸른 교회를 포함하여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변화되지 않는 두 그룹의 사람들이 발견됩니다. 첫 번째 그룹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열심히 기도하지만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거나 할 수 있는 모든 영적인 훈련을 시도 하지만 결실을 얻지 못하여 결국은 영적인 패배감과 끊임없는 죄의 자백, 그리고 더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진 채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 속에 있는 왜곡된 감정을 억누르거나 자신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함으로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인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자라면서 그 인격에 받은 정서적인 손상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것은 관계에 직접적으로, 또 깊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려서 잦은 구박과 비교 당함 속에서 자란 아이는 자존감이 낮고 열등 의식에 사로 잡혀 자신에 대해서 “나는 좋지 못해” “나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어”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내가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되었어” 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나님이 이런 나를 사랑하시고 나 같은 사람을 용서하실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지나친 완전주의나 지나치게 예민함, 두려움 그리고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태도 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주 전에 목사님을 통해서 우리는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용서하고 평안을 누리자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용서해야만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분명 이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를 잘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들이 늘 불편한데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하려니 진리 안에서 보장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복음 18장 21-35절에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26절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을 진 종이 주인에게 요청합니다. “내게 참으소서. 내가 다 갚으리이다” 종의 요청은 빚의 탕감이 아니라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한을 연장해 달라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연장된 기간 동안 오래 참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인은 빚을 갚는 기간의 연장이 아니라 아예 빚을 없애 주었습니다. 그 종이 도저히 갚은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불쌍히 여겨 그냥 채무 증서를 찢어 버렸습니다. 이제 종에게는 더 이상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더 이상 불안과 초조 속에 지내지 않아도 됩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그야 말로 “FREE” 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에 나타났습니다. 자신이 빚진 액수의 육십만 분의 일 수준 밖에 안 되는 100 데나리온의 빚을 진 친구를 만나자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 협박을 한 것입니다. 사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할 사람이 세상엔 없을 것입니다. 육십억 달러 짜리 복권이 당첨되었는데 일만 달러를 못 받아서 안달이 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입니다. 물론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고자 만들어 내신 비유입니다(1데나리온=노동자 하루 임금=$100 이라면 60억 달러:1만 달러).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궁하신 사랑 때문에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비유에서처럼 일 만 달란트 빚을 진 종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간을 늦춘다고 또 더 많이 일을 한다고 해서 갚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하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졌으니 무엇인가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도 읽고, 기도하고, 선행을 베풀고, 나아가 죄책감을 없애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아 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든지 용서를 한다든지 은혜를 베푸는 것을 못하게 되어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마치 육십억 달러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일만 달러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처럼 말입니다.
 저는 오늘 용서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에 대한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용서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출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여 그 어떤 경우에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 집착이나 이기적인 교만이나 우월적인 태도 그리고 고집스런 억지 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사랑은 에로틱하거나 황홀한 자기 숭배가 아닙니다. 이사야 43장 4절의 말씀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는 피조물로 보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사랑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람의 행위규범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인간 사랑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새 계명’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구약(레19:18)에도 언급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새 계명’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재 강조의 의미도 있겠지만 그 보다 더 예수님 자신이 그 사랑의 동기와 표준이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도 율법의 정신과 본질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 진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율법을 이미 다 이룬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말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롬13:9-10)
사랑에 관한 한 사도 요한의 편지도 빼놓을 수 없지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20-21)
 이 모든 말씀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실천함에 있어서의 핵심은 바로 “네 몸과 같이” “네 자신과 같이”에 있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에게 하듯이 다른 사람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듯이 나와 다른 저 사람도 홀대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심리학의 공통된 내용이며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합니다. 아니 어쩌면 자신과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 위에다 무엇인가를 자꾸 포장하려고 합니다. 마치 별 거 아닌 선물에 겹겹이 쌓인 화려한 포장지처럼 말입니다. 이곳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울만 보면 외모 콤플렉스로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또 이력서를 쓸 때마다 남보다 화려하지 못한 이력 때문에 삶의 회의를 느낀다고 합시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늘 못마땅한 태도로 사람과 사물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좋지 못한 상황들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 내면이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마음의 여유를 가질 못할 것입니다. 도리어 사람들을 기피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깨끗한 피부, 날씬한 몸매, 받쳐주는 의상, 어울리는 헤어 스타일 자신의 이력서를 화려하게 채워줄 있는 스펙 등을 얻기 위해 엄청난 돈과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의 결과는 대부분 실망으로 남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다른 사람들이 더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실망감을 감추려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위로합니다. “내가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내게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그 화장품과 그 옷만 있었더라면…” 또 이렇게 합리화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면이야 그러니 몸은 중요하지 않아” “어쩔 수 없어. 사람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졌는걸. 그러니 알게 뭐야?”
 과연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보다 형편없어 보이는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커녕 자신의 품격이 떨어질까 봐 상대할 가치 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와는 반대로 자신보다 더 낫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경쟁 상대로서가 아니라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겠습니까? 그 사람이 가진 것이 부럽다 못해 시기와 질투로 자신을 채찍질 하든지 아니면 빌 붙어서 아첨을 하든지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라고 말합니다. 날마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자신의 목표를 상향 조정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둘 여유는 성공한 다음에 목표를 이룬 다음에나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나중의 행복을 위해서는 지금 한가하게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되니 가족간의 사랑과 용납도 면제될 수 있는 것이라고 속입니다. 목적을 갖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계발의 이름으로 자신을 학대하고 자신의 전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 자아 실현이라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신 없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지 않는 자에게 건전한 자아상과 자기 사랑의 기술이나 내면 세계의 질서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그것이 바로 자기 사랑의 출발이기 때문입니다. 조건을 비교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존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3:5)
구원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 보여주신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회복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판단 기준처럼 비교해서 더 나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조건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사랑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구원 받은 우리들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움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8-9) 
 사랑하는 늘푸른 교회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택하신 족속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소유며, 긍휼을 얻은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값으로 산 보배롭고 존귀한 자라고 대우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대우를 받은 자가 어찌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자신을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는 게으름 속에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자신의 몸을 해롭게 하는 방탕함에 내버려 두겠습니까? 어찌 자신을 성경을 읽을 시간, 기도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학대할 뿐 아니라 영적 기근으로 허덕이게 하겠습니까?
 기독교의 핵심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들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보여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자신을 사랑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