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생자를 보내주신 아버지의 사랑

요한복음3:16-21

오늘은 성탄감사주일입니다. 축하보다 감사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예수님은 고난 받고 죽으셔야 했으니 감사해야지 축하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담겨 있는 영적인 의미  두 가지를 말씀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희망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4복음서 중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마가와 요한은 그들이 증거하려는 메시지의 특성상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입장에선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시절에 대한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예수님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으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 첫 장에서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마태1장). 그것은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야가 날 것이라는 예언의 성취임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와 누가는 모두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마태1:20;눅1:35).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요셉을 통해 인간의 죄성을 물려받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 없는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숫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해는 논리와 과학의 토대 위에서 가능합니다. 임신은 어떤 형태로든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되었다고 해야 논리적이고 생물학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런데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는 숫처녀가 성령으로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논리와 과학의 토대 위에서는 말이 안되고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마태와 누가의 증거 중에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마태1:21;2:11)라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 위대한 인물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나라를 세운 무수한 왕들, 위대한 철학자들,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자로 소개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는 태어날 예수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주는 첫번째 메시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바랍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돈을 더 많이 들여 병든 강아지를 치료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단지 애완동물이 필요해서 그렇다면 병든 강아지를 치료하느라 돈을 더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병든 강아지는 어떻게 되든 놔두고 새로 강아지를 하나 사면 됩니다. 그런데도 돈을 더 들이며 병든 강아지를 치료해주는 것은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병든 강아지를 불쌍히 여기고, 비 맞고 있는 새를 볼 때 측은하게 여기는 것부터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어린 자녀가 아픈데 돈 아끼려고 그냥 견디게 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사고 쳐 곤경에 처했다고 모른 척 하겠습니까? 악한 인간도 이런데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에 빠져 멸망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구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성탄의 두 번째 메시지는 희망입니다. 죽음이 절망이라면 생명은 희망입니다. 불치병이 치료할 길이 열리면 환자가 희망을 갖지 않겠습니까? 최근 척수 환자에게 줄기세포를 주입했더니 죽었던 신경이 살아나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사례가 보고되어 하반신 불구 환자와 가족들이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글을 봤습니다. 죽어야 할 사람에게 살 길이 열린다면 희망이 생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으면 어떤 죄든 다 용서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모든 인간의 운명이고 죽은 다음에는 또 심판이 있습니다. 이번 계시록 수양회에서 배워잖습니까? 사람이 죽은 후 최후 심판 때가 되면 흰 보좌에 앉은 예수님 앞에 불려가 각자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아 죄인들은 유황 불 못에 던져지는데 그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음행을 하는자, 거짓말 하는자, 술취하는 자, 마술을 하는자, 살인을 하는 자 등은 유황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얻은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끼는 게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사람은 모두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명이 길든 짧든 살 날은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이 들면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청년들도 30년쯤 더 살면 그렇게 될 겁니다. 인생이 참 헛된 거구나 그런 느낌이 듭니다. 뭐가 되겠다고, 뭘 갖겠다고 욕심 내며 그런 게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죽음 앞에 이 모든 게 허망한 겁니다.

요즘 한국에선 50,60대 인생이 서글프다고 한답니다. 자식들과 먹고 산다고 뒤 돌아볼 여유도 없이 지내왔는데 모아 놓은 것도 성취한 것도 없으니 고생했다고 누구에게 알아달라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대게 중년 이후는 왠지 모르게 아쉽고 서럽고 그렇답니다. 그래서 배우자를 원망하고 자녀에게 짜증도 내고 그러죠. 그래도 무슨 소용 있나요. 자식들도 부모 세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세상인데요.
전도서 기자의 말대로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게 인생이죠. 왜 허망하다고 합니까? 죽음 때문입니다. 힘들게 살았고 모아 놓은 게 없더라도 앞으로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더 살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하면 되는데 죽음이 앞을 막고 있으니 그럴 수 없습니다. 100세를 먹은 사람이라도 천 년을 더 산다면 그냥 보이 걸 아닙니까? 사람이 천 년을 산다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될까요? 생각이 젊어지고 희망을 갖겠죠. 인생이 7,80년으로 끝나기 때문에 한 두 번 실패하면 더 이상 기회가 없고, 50을 넘기면 어떤 인생을 살았든 허무함을 느끼게 됩니다.

성공한 인생이라고 다를 게 없습니다. 성공했다고 해도 보통은 4,50대 이후에 가서야 성공의 맛을 좀 보는데 그렇게 한 20년 즐기다 보면 몸이 쇠약해 병들고 또 세상을 떠나야 하니 성공한 인생도 허무함을 느끼고 죽음 앞에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천 년을 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50세에 죽음을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생에서 한 두 번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아직도 900년이 넘게 남았잖습니까?

죄 가운데 오래 사는 거야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죽어야 하는 것과 죽음이 없다는 것은 인생을 전혀 다르게 만들 겁니다. 천 년이 아니라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실패나 고생 없이 영원한 복을 누리면서 말이죠. 지금이라도 상상해보세요. 예수 믿는 분들은 이런 상상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믿고 영생 얻은 것이 얼마나 좋은 복인지도 느껴지죠. 하나님은 우리가 죽음으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도록 해주려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영생의 소망 중에 희망을 가지고 삽시다. 세상 삶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어쩌다 보니 좀 좋은 환경에서 살다가는 사람도 있고 좀 고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힘들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해주니 고난이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성탄을 맞이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영생의 소망이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