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이 곤고한 이유

로마서7: 21-25

오늘은 ‘신앙생활이 곤고한 이유’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이 예수 믿고 거듭나기는 했지만 6장부터 8장에 걸쳐 설명하고 있는 영적 체험,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악한 본성을 통해 역사하는 죄의 세력을 파괴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구원을 성취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번뇌에 빠져 있을 때 고백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21-24).

로마서 7장은 6장의 주제가 계속됩니다. 지난 주일 살펴본 6장 내용이 기억납니까? 바울은 은혜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죽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의 세력이 파괴되어 힘을 쓰지 못하며, 새로 태어난 하나님 자녀에게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아버지의 성품이 이식되고, 성령이 언제나 함께 계시며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부터 6절은 율법으로부터 자유에 대해 서술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율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남편 죽은 여인과 혼인관계를 비유로 들었습니다. 결혼한 여인에게 남편이 먼저 죽어 없으면 결혼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어 재혼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기 때문에 은혜 아래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7절부터 13절은 율법 아래서 살려고 할 때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유대인으로서 율법아래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 바울은 율법 그 자체는 죄가 아니고 거룩한 것이지만 죄가 율법을 활동 근거지로 삼고 역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서는 더욱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은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에 죄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악한 본성은 평소에 가만 있다가도 율법에 의해 자극을 받으면 활성화됩니다. 예를 들어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 놓으면서 ‘이거 열어 보면 안돼’ 그러면 궁금해서 꼭 열어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이 가진 좋은 걸 보면 가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자동차나 요트나 명품 가방이나 다이어반지나 이런 걸 보면 갖고 싶죠. 저는 멋진 교회당 보면 갖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좋은 걸 갖고 싶은 마음이 죕니까? 죄라는 생각이 안 듭니다. 그런데 ‘네 이웃이 가진 것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이 있으니까 죄가 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죄가 더욱 드러나죠.

14절부터 20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했을 때 경험했던 실패와 좌절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6장,8장에 언급한 영적 승리의 공식을 아직 깨닫지 못해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어떻게든 율법을 다 성취하며 살려고 했을 때입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 실제 행동은 반대로 율법을 위반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죄에 빠져 왜 이럴까 고민하다가 깨달은 것은 이 때 죄를 범하는 주체가 거듭난 자아가 아니라 자기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바울은 범죄한 것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죄를 범한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자기 속에 거하는 죄의 본성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이 아니기도 하다는 모순어법으로 표현했습니다. 내 지체가 죄를 범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내 책임은 아니라는 이런 주장은 바울 같이 진심으로 주를 따르려고 애쓴 사람에게는 가능한 말이지만 죄 가운데 사는 것을 즐기면서 변명하려는 사람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치에 근거해서 바울은 21절 이하에서 ‘한 가지 법칙’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 법칙이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실제로는 악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지체 내에 있다고 말한 죄의 법칙을 뜻합니다(Vincent).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음의 법칙과 지체의 법칙이 서로 전투를 벌입니다. 마음의 법칙의 주체는 속사람이며 의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지체의 법칙의 주체는 악한 성품이며 죄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으면 이 둘이 매일 싸워 죽을 지경이라는 겁니다.

22절에 ‘속 사람’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보통 속사람을 거듭난 사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영향을 받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속 사람’은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자아입니다. 이것은 ‘새 사람’(엡4:2)이나 ‘거듭난 사람’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속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도 모든 사람 안에 있으며 거룩한 성령을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만일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겐 ‘속 사람’이 없다면 구약시대에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고 선을 행할 가능성은 오직 속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2,3장에서 언급한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해 알아봅시다. 그 세 종류는 헬라어로 φυσικοs(고전2:14), πνευματικοs(고전2:15), σαρκικουs(νηπια εν Χριστω)(고전3:1)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글성경에 φυσικοs는 ‘육에 속한자’, πνευματικοs는 ‘신령한 자’,  σαρκικουs는 ‘육신에 속한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Πνευματικοs- ‘신령한 자’는 확실히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φυσικοs- ‘육에 속한자’는 혼의 영역인 이성과 감성의 지배를 받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을 의미하고, σαρκικουs는 거듭났지만 율법 아래 악의 본성에 지배를 받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믿고 거듭난 후 일정한 기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 즉 πνευματικοs로 자라지 못하고 영적으로 볼 때 갓난아기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은혜가 아닌 율법 아래 살고 있기 때문에 본래 의도와 달리 악한 본성의 지배를 받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후에도 율법 아래 살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왜나면 우리 지체 속에 악한 본성이 율법의 계명을 이용해 활동하면서 계속 죄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격적인 사람이라도 φυσικοs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자기 힘과 노력으로 죄의 권세를 당해 낼 수 없습니다. 예수 믿고 거듭났더라도 율법 아래 살면 σαρκικουs,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또한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고 구원얻었다고 만족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아래 사는 πνευματικοs 수준으로 자라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믿고 거듭난 직후 자신의 의지나 힘으로 죄를 이겨내려고 애쓰다 실패하고 좌절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기 원했지만 실제 행동이나 삶은 계명을 어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 죄는 때로는 생각 속에서 일어나고 때로는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고 그랬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너무 실망하고 그걸 극복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노력하는 만큼 좌절감도 컸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는 그의 고백이 그걸 잘 보여줍니다. 그는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줄 사람이 없겠느냐고 외쳤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25절 이하에서 말하기를 죄에 물든 우리 본성의 압도적 힘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고 선언합니다. 율법 아래 살면 거듭난 사람도 의를 행하려는 마음의 법과 죄의 지배를 받는 지체의 법이 싸워 하루도 마음이 편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는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분리됨으로써 죄의 세력을 깨뜨리고 그 지배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과거의 죄에서 구원 얻는 근거가 될 뿐 아니라 매일 매일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길입니다. 삶이 곤고하다고 느끼는 분이 계시면 바울 사도처럼 복음의 능력을 맛보고 은혜의 차원에 들어가 평안을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한 주 동안 여러분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며 강건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