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로마서9:14-18

지난 시간에 로마서 6,7,8장을 통해 죄에서 승리하는 3가지 원리를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첫째는 옛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죄의 세력이 무력화됩니다. 둘째는 율법아래서 교회생활하지 말고 은혜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율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거듭난 후에도 우리 육신엔 여전히 악한 성품이 남아 있고 때때로 죄를 범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정죄가 없습니다. 셋째는 성령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거듭난 직후에 그리스도인은 영적 어린 아이 수준입니다. 자기 힘으로 육신의 욕망과 세상의 유혹과 사단의 공격을 이겨내기는 부족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세가지 원리를 잘 기억하기 바랍니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에는 선택과 구원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로마서 9장을 본문으로 은혜의 선택에 대해 말씀하겠습니다. 9장에서 바울은 선택에 입각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조하면서 구원의 교리를 설명했습니다. 오늘 설교는 다음 세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이 메시야 예수님을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무효가 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을 통해 성취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은 인간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바울의 토기장이 비유는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언약의 성취에 대해 살펴봅시다. 바울 사도는 1절부터 5절까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이방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할 당시에 대부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울에는 큰 슬픔이고 고통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목회하면서 정작 자기 자녀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방황하고 있다면 얼마나 맘이 아프겠습니까? 청년 여러분이 나중에 결혼해서 자녀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요? 큰 슬픔이고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자기 민족을 가족의 사랑으로 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다음 구절에 그 심정이 잘 드러나있습니다. 3절에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 구원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은 저주를 받아 버림당한다 해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나 목자들은 바울의 이런 마음을 본받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기적인 인간이 남을 위해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나서 성령이 함께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체험한 심정에서 나오는 마음입니다.

유대인들은 조상을 언급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명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선택받은 이유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장과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3),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그 다음 사무엘하 7장 11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전한 언약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1-12,16)

위 언약의 내용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영원토록 복을 주어 그 후손들을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세주 예수님을 거절하여 버림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믿음에 실패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이 폐지된 것인가? 다시 말해 무효가 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은 그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내용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며, 너로 복의 근원이 되어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대로 아브라함의 이름은 가나안 땅에서 애굽까지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듣고 복을 내리셨으며 430년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한 민족을 이루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의 연단을 거쳐 가나안을 정복해 명실상부한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왕으로 즉위한 후 하나님은 다윗왕에게 네 집과 네 나라를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에도 다윗왕과 맺은 계약은 다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폐기된 것인가? 아니면 나중에 성취될 것인가? 나중에라면 어떤 방식으로 성취될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의 설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언약은 이제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영적인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본래 자기 조상들이 받은 언약인데 이방인들의 것이 되었다고 샘내는 일부 유대인들이 미래에 반성하며 예수믿고 은혜의 통치에 들어오게 됨으로서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언약은 유대인들을 통해서도 성취될 것이라 봤습니다.

이스라엘사람이라는 말은 야곱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32장 28절을 보면, 하나님은 밤새 천사와 씨름한 야곱에게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줬습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하나님과 다투다’는 뜻이지만, 그 말 속에는 하나님과 겨뤄 죽지 않고 살아남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야곱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생활하다 돌아온 후엔 주로 유다지파가 중심이 되어 유대인으로 불렸고 이방인과 구별하는 의미에서 유대인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제는 두번째 주제인 은혜와 주권적 선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의 특징을 찾았습니다. 바울은 먼저 7절에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는 말씀에 주목했습니다. 이삭의 후손만 아브라함의 언약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외에도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한 몸종 하갈의 소생이라 육체를 통해 낳은 육신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육체적으로 생산의 능력이 끝났을 때 하나님의 언약의 결과로 얻은 영적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후손만 언약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언약을 계승할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는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에서와 야곱 사이의 선택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와 또 달랐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같았습니다. 인간적 조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형제는 출생전에 서로 다른 운명이 정해졌습니다. 형이 동생을 섬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상속권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이지 육체적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에서 입장에선 억울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선택에서 인간적 조건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무계나 모계나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적 조건에서 우선권을 찾는다면 출생순서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의 선택에서 장자권을 인정치 아니하시고 동생 야곱을 이삭의 후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것도 출생전 모태에 있을 때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동생을 선택하심으로써 선택의 기준이 하나님의 주권적 뜻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이 은혜 받아 예수 믿어 구원 얻고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긍휼히 여기거나 불쌍히 여기시는 것도 그 사람이 간구하는 마음 상태나 노력이나 수고의 정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선택이 하나님 마음에 달렸다고 하니까 인간이 또 하나님께 항의성 질문을 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절재적 주권으로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라면 바로처럼 하나님을 거역하고 분순종했더라도 하나님이 그렇게 강팍하게 만드신 것이니 어찌 잘못했다고 책망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강팍케 만드신다면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19-21절)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 바울은 피조물인 인간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 대드는 것은 주제 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토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제한적으로 조심스럽게 해석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으로 선택하시면서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선택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구원으로 선택해주신 것은 맞지만 어떤 사람을 멸망으로 선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단지 구원으로 선택하시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멸망하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악한 성품에서 나오는 강팍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님을 거부한 결과일 뿐입니다. 인간의 범죄나 불순종을 예정의 결과라며 하나님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봅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은 영적 차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육적 이스라엘인 유대인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에게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한 복을 내려주십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얻은 여러분은 아브라함과 다윗이 받은 복을 함께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이면 무엇보다 먼저 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아든, 가난하든, 불구의 몸이든 하나님의 선택받았다는 사실로 감사하며 행복하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