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잠언 22장 6절 - 안나실목자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 중에 어린이 날이 있고, 어버이 날이 있고, 스승의 날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목회자의 날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해진 그 날 하루 잘 해서 나머지 364일을 면제받자는 것이 아니라 매 년 매일을 사랑하고 감사해야 하지만 365일 사랑하고 감사한 것을 이 날 하루 더 많이 표현하자는 의도에서 정해진 것입니다.

오늘을 어린이 주일로 지내는 것은 그들을 예배의 중심에 두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들에게 기대하시는 마땅히 가르쳐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려고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먼저는 우리가 허망한 것을 찾아 헤매지 않을 것이고, 나아가 현재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인생에서 중요하고도 바른 길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먼저 우리가 두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현 상태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기상이변으로 하늘이 흔들리고, 지진으로 땅과 바다가 흔들리고,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국가간에 사람간에 관계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의 혼란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8세기 르네상스 이후 시대의 사조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전환되면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되찾은 듯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의 인권을 중시했던 인본주의는 도리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병폐를 낳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얼마 전 TV에서 ‘악성 댓글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아이가 이웃에 사는 40대 아저씨에 의해 성폭행 당한 이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벼운 것을 본 부모가 참다 못해 하소연하는 글을 올렸고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는데 그 내용이 과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피해자를 향해서는 “부럽다”, “좋겠다”,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하라”는 내용이 많았고, 그 가해자에 대해서는 “한 번의 실수로 그 인생을 매장해서는 안 된다”, “용서와 이해가 필요하다” 등등의 글들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더 존중하자고 합니다. 각자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내세워 가치 판단을 어렵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의 발달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수준에 까지 이르러 이제는 화성 이주인 모집 광고를 낼 정도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여행으로 생명을 담보로 4명을 뽑는데 400명이 신청을 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세기를 개척하고픈 열망에 사로잡혔거나 이 땅에서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그 무언가를 찾아 떠나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첨단 과학 기술 발달은 계속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등장시키는 혁명을 세차게 진행시켜 우리가 삶의 영원한 원칙으로 삼았던 것들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예컨대, 가정과 결혼에 대한 시대의 흐름이 그렇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성인이 되어 부부의 연을 맺고, 가정을 이루고, 또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 웬만하면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가면서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가정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다양한 양태의 결혼과 가정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결혼의 적령기라는 용어가 무색할 정도로 나이 들어 결혼하는 사람들, 한 사람은 싫증이 나니 쉽게 남편이나 아내를 바꾸며 결혼을 아무 때나 몇 번씩 하는 사람들,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서로 좋을 때까지만 동거하는 사람들, 일정 기간 살아 보고 결혼을 생각해 보겠다는 계약 동거하는 사람들, 1:1의 남녀 결합이 아니라 1:2, 2:1, 2;3, 3:2 등 서로의 묵인 아래 배우자 외에 애인을 따로 두고 사는 사람들, 남편이나 아내가 없이 혼자서 자녀를 키우며 사는 1인 1세대 가정, 심지어는 동성의 결합이 겉으로 드러나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정도로 오히려 그들을 인정하자는 흐름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 가운데서 우리가 겪고 있는 혹은 앞으로 겪게 될 가치 혼란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봅시다. 먼저 우리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가치 혼란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무엇이 진실인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가? 교과서에 쓰여진 지식들은 참인가 거짓인가? 신문에 나면 모두 진실인가? 어떤 절대자가 말하면 그것은 진실인가? 내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은 진실된 삶인가 거짓된 삶인가? 어떤 정치인이 당적을 옮기면서 자신은 유권자의 뜻에 따라 당적을 옮겼다고 하는데 그것은 참인가 거짓인가? 그 유권자의 뜻은 참인가 거짓인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살면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인 판단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아주 사소한 예를 한 번 들어 보지요.

자동차를 운전하는 아버지는 늘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 좀 봐! 우리가 이렇게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는데 중간에서 끼여 드니! 참, 나, 저런 사람들은 모조리 적발해서 한 1년쯤 운전 면허를 정지시켜야 돼! 우리 나라는 법이 너무 물러터져서 사람들이 법 무서운 줄을 모른단 말이야!”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번에는 아버지도 오른쪽 바깥 차선을 달려가다가 좌회전을 하려는지 급히 좌회전 차로 맨 앞으로 끼여 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그렇게 하면 위험하잖아요! 뒤에 있는 사람들이 욕할 거예요.” “야! 뭐가 위험해. 다 내가 보고 있는데… 욕하긴 어떤 놈이 욕하냐? 내가 좌회전 깜박이 등을 켰으면 양보를 해줘야지!” 아버지의 행동은 옳은가 그른가?

미에 대한 기준은 어떠합니까? 참으로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 것은 무엇인가? 근사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본래의 모습,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일 때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저 여자가 아름답다, 저 사람 참 근사하다고 할 때 그 여자나 그 사람의 원형은 어떤 모습이어야만 하는가? 아름다움에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인가?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처럼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이 개인의 생각과 느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아름답고 추한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음식은 어떻습니까? 누굴 만나서 식사라도 하려고 하면 어떤 음식점에서 만나야 하는지 고민입니다. 그래서 간혹 “넌 무얼 먹을래?’ 하고 되묻기도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어떤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입니다.

자신의 적성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책상에 앉아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도무지 성적이 오르질 않으면 별별 생각을 다하지요. 지능 지수가 떨어지나? 기초지식이 모자라나? 공부 방법이 잘못 되었나? 아무리 해도 안되니 이게 내 팔자인가? 학교에서 실시한 적성 검사에 따라 전공을 정했는데 공부는 재미가 없으니 도대체 나에게 맞는 적성이란 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새롭게 개발할 수 있는 것인가?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을 해서는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하길 잘 했나? 지금이라도 미련을 갖고 다른 분야의 공부를 시작해 보아야 하나? 이 일로 내 평생을 이렇게 보내야 하나? 내 삶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가치의 혼란은 자신의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일어납니다. 부모와 나는 어떤 관계인가? 어떠한 관계여야 하는가? 나와 친구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친구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친구와 가까워진다는 것, 사귄다는 것은 무엇인가? 혈연으로 맺은 부자의 관계, 우정으로 맺은 친구와의 관계, 엄마와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가 어떤 경우는 나와 인간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느낌이 들지만 또 어떤 경우는 원수 같은 관계가 된 것 같이 느껴질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자녀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글을 언제부터 가르쳐야 하나? 누구네 아이는 3살 때 벌써 한글을 뗐다고 하는데 우리 아이는 5살 인데도 ㄱㄴㄷㄹ 도 모르니 바보인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플룻, 기타, 드럼, 성악, 그림, 서예, 컴퓨터, 태권도, 발레, 수영, 글짓기, 웅변, 요가… 무엇부터 가르쳐야 남들 보다 앞설 수 있을까? 내 아이가 자라서 남들보다 좋은 직장을 잡고, 남들보다 먼저 높은 직급에 오르고, 집도, 차도, 남보다 빨리 장만하고, 해외 여행도 남보다 많이 다니고, 골프도 남보다 잘 치고…별의별 일에서 항상 남들과 경쟁하며 살아가야 하니 과연 이웃을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과거에는 모든 것이 부족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곤하다 보니 공동 소유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공동 소유를 어떻게 함께 소유하며 이용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또 그렇게 함께 어울리다 보니 자연히 상호 우호적인 관계가 발전하고 리더쉽이 개발되었으며, 자신의 재능이나 취미가 무엇인지 저절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모든 것이 풍요로워 저마다 자기만의 것을 소유하게 되었고, 자신이 원할 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그냥 누릴 수 있어서 함께 소유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엔 저마다 자기 소유를 위해 끊임없이 경쟁적으로 살아갑니다. 그전에는 궁핍을 면하기 위해서 경쟁했는데 이제는 더 좋은 것, 더 값비싼 것, 더 독특한 것을 얻기 위해서 경쟁하며 살아 갑니다.

물론 경쟁이 가치 개념상 꼭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선의의 경쟁을 통해 개인의 성취 동기를 강화시켜주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승리하는 소수에게는 큰 기쁨을 주지만 패배하는 다수에게는 씻을 수 없는 큰 상처, 즉 자기 모멸감, 포기, 열등, 분노, 좌절 등의 감정을 갖게 함으로써 그 많은 사람들의 삶 자체를 괴멸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가치 혼란을 겪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 얼마나 경쟁을 해야 하고, 얼마나 협동하여야 하는가? 어떤 일에서 나는 누구와 어느 정도로 경쟁하여야 되는가? 이 일은 경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가 아닌가? 도대체 경쟁은 왜 하는가? 경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경쟁의 반대는 협동인가? 경쟁을 안 하면 우리는 서로 협동할 수 있는가?

가족 관계의 변화는 어떻습니까? 과거 대가족 제도에서는 위 아래 관계에 대한 문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물려준 가풍이나 전통은 다시 아버지의 의해 아들과 딸들에게 전해졌고, 이러한 문화 전승은 한 가정에서만 아니라 그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서도 이루어져 장유유서의 미덕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위는 아래를 사랑하고 감싸고 타이르고 가르치고, 또 아래는 위를 존경하고 따르고 경청하는 질서가 유지된 것입니다. 동네의 모든 어른들이 내 부모요, 동네의 형들은 내 형이고, 동네의 동생들은 모두 내 동생으로 여기는 공동체의 삶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면서 핵가족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1세대, 2세대, 3세대 간의 틈새가 벌어졌습니다. 틈새라는 말보다 단절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직 관계에서 오는 허전함을 수평 관계에서 찾으려고 ‘끼리끼리’ 모입니다. 생각, 취미, 학력, 직장, 지역, 병역, 나이 등을 매개체로 관계를 맺으려 애써 보지만 결국은 그저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식의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일과의 관계에서는 어떻습니까? 뭐든지 한 가지만 전문적으로 잘 알고 잘 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랬다가는 자신의 전문 분야 외에서는 왕따 당하기 안성맞춤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스펙 쌓기에 그렇게 돈과 시간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전문성도 갖추어야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보편성도 갖추어야 합니다.

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생각은 어떠합니까? 파괴나 혁명이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시간과 공간 개념은 매우 정교해졌습니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의 차이로 올림픽의 역사는 새로 쓰여지고, 나라들은 한 치의 오차가 없어야 하는 정밀 타격의 무기를 대단한 자랑거리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서 시간적으로 지금 당장의 삶과 아울러 미래의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얼마나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하는가? 전 세계가 하나로 되어 가는 추세에 공간적으로 내부 지향적이면서도 외부로 향할 수 있는 사고 체계를 어떻게 가질 것인가? 더욱 더 심각해져 가고 있는 환경 문제, 인구 문제, 무역 문제, 산업 문제 속에 우리는 얼마만큼 동참해야 하며,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얼마만큼 추구할 수 있을까?

휴! 한숨이 저절로 나지요? 조금만 관심을 가져 보니 우리는 엄청난 혼란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 가운데 있다는 자체 만으로 스트레스입니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아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저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덧 인생의 시간은 별로 한 것 없이 다 지나가 버리고 인생의 마지막에 대한 생각이 들 때쯤에 비로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여태껏 흔들이는 벽에다가 인생이라는 사다리를 걸쳐 놓았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이렇게 혼란스럽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타임머신을 만들어서 과거든 미래든 이러한 혼란이 없는 곳으로 갈 수 있는 날만 손꼽아 기다려야 할까요? 마치 화성 이주인 모집 광고에 응했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한다고 하는 믿음의 사람인 우리들은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이런 가치 혼란의 바다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비바람과 맞서서 영원히 변치 않는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의 배를 항해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자녀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래서 지금 자녀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또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누구네는 이렇게 하고 누구네는 저렇게 하니 우리도 뭐라도 좀 해야 한다고 조바심을 내며 부화뇌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자녀들 뒤치닥거리 하느라 지쳐서 내 인생은 무엇인가 하고 비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치원에 보낼 때까지만 내 자유와 삶을 양보하리라고 힘든 순간마다 스스로 위로하고 다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부모 된, 그리고 부모가 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가치 기준이 다원화 되어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변하지 않고 변할 수 없는 사람이 마땅히 행할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요?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경외’란 ‘거룩한 두려움’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러러 보고 존중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그 분의 말씀을 우리 삶의 가치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솔로몬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 지라……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로다”(왕상3:4-12)

이렇게 지혜로운 솔로몬이 나이 들어 인생을 뒤돌아보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헛된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혜서인 잠언과 전도서에서 거듭 거듭 강조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지혜를 얻기 위해 잠언과 전도서를 읽으신다면 솔로몬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를 지혜로운 사람으로 키우길 원하신다면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는 삶으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입니다. ‘공경’은 항상 높이 받들어 대하는 태도입니다. 부모가 공경 받을 만한 태도를 보여 주지 않아도 부모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공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공경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1-3)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곧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바라 보고 부모에게 공경의 태도를 취하면 감정도 따라 옵니다.

셋째는 정직한 마음입니다. ‘정직’은 ‘숨김없이 행동하는 것’, ‘잘못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사26:7)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 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 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101:7)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6:16-19)
정직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세상에는 거짓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물론 ‘거짓의 아비’(요8:44)인 사단이 정해진 기간 동안 이 세상의 권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가 아니더라도 사람들 사이에는 정직함과 거짓과 부정직함에 큰 오해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 생각할 때 정직하지 못한 것들 그리고, 거짓말이나 부정직한 것을 마치 재능처럼 생각하는 것이고, 또 마치 우리가 거짓 되는 것을 큰 이득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기심과 명예욕과 체면 때문입니다. 또 현재만 생각하는 찰나주의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거짓의 피해를 모르는, 아니 정직함이 주는 유익을 모르는 무지함 때문입니다.
정직이 회복될 때 최고의 행복을 경험하게 되고, 진정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고, 비로소 진정한 성공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윗처럼 이렇게 기도합시다.
“하나님이여 내 속한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넷째는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모세의 법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어느 계명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제일 중요한 계명이다. 그 다음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이 두 계명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나님 사랑은 제쳐 놓고서라도 서로 사랑하는 삶이 중심이 되고 있지 못합니다. 도리어 그 자리에 이기심과 탐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반증이라고 하듯 신문, 잡지, 일반 서적들이 다루는 주제를 살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최고가 되려고’ 애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한테 돌아올 것은 무엇인가?” “딴 사람이 하기 전에 먼저 뛰어 들라” “인생이란 한 번 왔다 한 번 가는 것이니 지금 마음껏 즐겨라”
나이 많은 사도 요한이 그의 교회 성도들에게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당시 성격이 불 같았던 자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랑에 관한 말씀을 많이 쓴 것을 보면 요한에게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맞먹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계명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이 아는 한 인생의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라는 커다란 보따리 안에 다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2:31;13:13)

 사랑하는 늘푸른 교회 부모 된 그리고 앞으로 부모가 될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의 둘째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반역을 꾀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경은 다윗의 자녀 교육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저는 …… 채용이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왕상1:6)
잠언 13장 24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자녀들을 잘 키웁시다. 세상의 가치관에 좌우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의 기준이 되도록 부모가 교회가 합력하여 잘 키워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 되도록 도와 줍시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