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르려면 십자가를 져라

누가복음 9:23


지난 주는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따르려면 먼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고 십자가를 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정하는 게 아닙니다.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든지, 십자가를 지는 게 힘들어 포기하든지 두 길 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의 내용이 너무 분명해서 다른 해석의 여지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십자가를 지든지 주님 따르는 것을 포기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지금은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지만, 십자가는 그 전에 로마제국의 형틀이었습니다. 로마 당국은 사형에 해당하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기독교 이전에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했습니다. 그 당시엔 이 끔찍한 십자가를 목걸이나 귀걸이로 걸고 다니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인류구속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오실 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있어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이뤄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라도 인류 구속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대해 할 수 있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든지, 십자가를 회피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을 둘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으면 주님을 따라가기 쉬워집니다. 오늘은 이점을 분명히 하기 원합니다. 뚱뚱한 몸으로 달리기를 하면 힘듭니다. 다이어트를 해서 몸이 가벼워지면 달리기가 훨씬 쉽습니다. 십자가에서 옛 사람의 욕망을 죽여야 주님을 따르기가 쉬워집니다.

Walter J. Chantry [부러진 십자가]라는 책에서 크리스쳔이라면 누구나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하지만 오늘의 크리스쳔들은 십자가 목걸이는 걸고 다닐지언정 그의 가슴에는 십자가가 없거나 그나마 품고 있는 십자가 마져 부러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부인 없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챈트리는 자기부정을 십자가의 핵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십자가를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교회에도 십자가 지는 것보다 천국의 영광이나 마음의 평안, 만사 형통의 복을 얻기 원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목사님들도 교인들의 그런 심리에 맞춰 듣기 좋은 말씀을 전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현대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 속에는 십자가가 부러져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A.W. Tozer(1897-1963)는 [철저한 십자가]에서 “새 십자가를 버리고 옛 십자가를 지라”고 말합니다. 그는 오늘날 복음주의 진영에는 새 십자가가 스며들었다고 지적합니다. 옛날의 십자가는 세상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새 십자가는 세상과 친구가 되려고 한답니다. 옛 십자가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했는데 새 십자가는 육신의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새 십자가를 전하는 전도자들은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옛날의 삶을 버려야 한다”고 교인들에게 불쾌한 요구는 하지 않습니다. 새 십자가는 이기주의자에게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와서 주 안에서 자랑하십시오”라고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 사명인 동시에 고난과 수치와 죽음이었습니다. Passion이라는 말이 지금은 주로  ‘열정’의 뜻으로 쓰이지만 전에는 ‘견딜 수 없는 고난’을 의미했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The Passion of Christ라고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고난과 수치와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수치와 죽음을 겁내면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남의 손에 의해 갑자기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거기서 자기 인생은 끝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와 세상이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을 파괴시킵니다.

십자가는 반성이 아니라 회개를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죄를 덮어주고 옹호하는 게 아니고 들춰내 죽음을 강요합니다. 십자가는 타협이 아니라 완전한 굴복을 요구합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체면 따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만 드러냅니다. 십자가는 잠시 기절하다 살아나는 것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확인사살까지 감행합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죽음을 의심하고 부정하려는 음모를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은 십자가의 죽음 너머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부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환란과 핍박과 순교였지, 세상 영광은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제자들은 거의 모두 순교를 당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역시 환란과 핍박 속에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거나 산 속에 숨어지내야 했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산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고난과 박해와 죽음을 당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과 질병과 위협과 박해와 죽음 속에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오늘의 메시지가 너무 심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그 동안 십자가와 상관없이 너무 세상에 안주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주님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고난과 수치와 죽음을 요구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이렇게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노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 지는 것을 외면하지 말고 그 앞에서 결단하고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 주님을 따라 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기 싫어서 소위 ‘새 십자가’로 변질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그렇게 하기로 묵시적 동의를 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그걸 잘했다고 용인하실 리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말씀은 사도바울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검인도장을 찍은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거짓된 화평을 거부합니다.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잘못을 눈감고 그냥 패스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화평을 주러 온 줄 아느냐 아니다 검을 주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검이기 때문에 때때로 가족과 친구를 갈라놓고 심하면 원수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관심사가 달라지기 때문에 이전처럼 한통속으로 잘 지내지 못합니다. 나머지 가족이나 친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물론 이전보다 더 깊은 유대관계 속에 지낼 수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진 갈등과 불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화평을 주신다거나, 분란을 피하기 위해 잘못을 따지지 말고 그냥 덮어주고 필요하면 적당히 타협하는 게 좋다는 그런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엔 없는데 오늘날 목사들의 설교, 목자들의 생각 속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옛 십자가를 버리고 새 십자가를 취한 결과입니다. 스스로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족들과 친구들과 교인들과 양들과 사이 좋게 지내기 위해 십자가의 복음을 쉽게 양보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빛과 어둠의 화합과 공존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사단의 술수입니다. 사단은 종교지도자들을 앞세워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가족이든 교회든 긴장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 말씀을 들어봅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는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3대 2로 편을 먹고 싸울 것이고 부자간에도 다투고 모녀 사이에도 다투고, 고부간에도 분쟁할 것이라(눅12:51-5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따르기 위해서라면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라도 미워해야 제자로 살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눅14:26,27). 우리 교회에 다니다 한국에 돌아간 어떤 형제는 믿지 않는 아버지가 맘에 들어하지 않아 결혼하려는 자매가 선교단체에서 일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정이든 교회든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만이 최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최우선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분쟁하고 다툴 때 바울은 그들을 지적해서 책망했습니다. 음주와 음행의 문제가 있을 때 당사자들의 체면을 고려해 침묵한 게 아니라 공개적으로 책망하고 듣지 않을 때는 이방인처럼 대하며 교제를 중지할 것도 요구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이런 문제가 발생해도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의 거룩함보다 잘못한 사람의 인격이나 체면을 생각해 침묵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잘못하고 책망들을 때 반성하는 대신에 무시당했다고 항변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교회 문화가 만들어낸 병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세 가지를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로 십자가에 목 박힌 사람은 뒤를 돌아볼 수 없습니다. 뒤에서 세상 유혹의 소리가 들려온다고 해도 목을 돌릴 수 없습니다. 둘째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옛날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편하게 살겠다고 발버둥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자신만의 미래 계획이라는 걸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더라도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앞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이 계신 그 곳만 바라보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둘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 게 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했고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으로 세상에 사는 동안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사회에서 장래가 촉망되고 잘나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받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한 미래의 계획은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길이 열리는 데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바울을 본받기 바랍니다. 본받는다고 바울처럼 독신으로 평생 선교하며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자기 십자가를 진 것처럼 여러분도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나의 십자가, 즉 나의 사명은 무엇인지 먼저 깨닫도록 기도해야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고집과 교만과 비열함과 분노와 심술궃음과 색욕과 다툼 같은 옛 사람의 속성은 십자가 죽음으로 소멸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랄 수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문제가 있는데, 더 큰 교회로 가려는 것, 헌금이 적게 나온다고 불평하는 것, 큰 고기들만 돌보려고 하는 것, 기도는 적게 하고 말을 많이 하는 것, 경건의 능력대신 학위를 자랑하는 것, 교인들의 영적 건강보다 교회당 건물을 챙기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화를 내는 것, 이런 걸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저도 해당사항이 있어서 바울 처럼 매일 세번 나를 쳐서 복종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가 없을 줄로 압니다. 우선 나 자신부터 돌아보고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자라서 여러분 들으라고 말씀했지만, 적용의 단계에선 내코가 석자라 다른 사람 비난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워 얼굴 들지 못하겠다 싶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챙기는 것보다 교회의 양적 성장에 더 마음을 쓰는 것을 반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면서도 화가 나는 내 모습에 나도 실망합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보다 교인들의 헌금에 더 의존적인 태도를 회개합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을 따르기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옵션이 아닙니다. 제가 밴을 구입할 때 AWD(4륜구동)로 하면 5천불을 더 지불해야 했습니다. 집과 교회를 주로 다니며 사용하기 때문에 5천불을 더 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없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엔진은 없으면 안되죠. 그래서 엔진을 옵션으로 하는 차는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엔진과 같이 핵심 요소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십지가를 지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옵션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결단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