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대한 일, 기도

요한복음 14:12-14

기독교 서적의 베스트 셀러 목록을 보면 기도에 관한 제목이 참 많이 있습니다. [보좌를 흔드는 기도], [강청 기도의 능력],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 [영으로 하는 기도] 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런 제목들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서라도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애석하게도 우리가 기도에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에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데도 실패한다면 대부분의 이유는 아마도 “기도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중국을 여행하던 사람이 성대한 축제일을 맞은 어느 이교사원을 방문하였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사당 안에 세운 가증스러운 신상을 숭배하고 있었다. 그는 열광적인 신도들의 대부분이 기도문이 쓰여 있거나 인쇄된 종이 쪽지를 가지고 있는 것에 눈길이 끌렸다. 그들은 이 주문들을 조그만 진흙덩이로 싸서 신상 앞에 던졌다. 그는 이런 괴이한 행동을 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만일 작은 진흙덩이가 신상에 찰싹 달라붙으면 그 기도가 반드시 응답을 받고 땅에 떨어지면 신에게 거절당한다는 것이었다.”

기도의 응답 여부를 테스트하는 이러한 방법에 대해 우리는 비아냥거리듯 웃고 넘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직한 마음으로 우리들의 기도 생활을 보면 이와 결코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 기도하라는 구절이 있고, 또 설교 시간에 기도를 해야 된다고 하니 기도를 하긴 해야겠는데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누구에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이교도들이 진흙덩이를 던지듯 마음의 소원을 그냥 툭 던지고는 이루어지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지 라는 마음으로 기도라는 것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그래도 신앙생활을 좀 했다고 하는 분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영적 숨쉬기?” 문장의 끝을 살짝 올리는 것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그저 정답을 맞추고 싶어서 내뱉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나의 영적 호흡입니다. 육신의 호흡이 끊기면 살 수 없듯이 영적으로 숨을 쉬는 행위입니다" 가 아니라 “가끔 국민체조에서 하는 숨쉬기 운동처럼 생각날 때, 하고 싶을 때, 필요할 때 잠깐 하는 운동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님께 요청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에게 뭔가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관심은 생겼는데 그게 도대체 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때 요청하는 태도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다 보니 예수님에게서 이상한 행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찍(새벽 미명에) 어딘가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몰려왔는데도 그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는 기도에 관심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다리셨다는 듯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주문을 외우듯 외우고 있는 바로 마태복음 6장 9-13절에 기록된 주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대로 우리가 기도하고, 이 기도문대로 우리가 믿으며, 이 기도문대로 행하며 산다면 더 이상의 기도가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한 기도입니다.

그 가운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실되고 정직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할 때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영원 속에서 계획하신 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이 우리 눈에 보이게 실현되는 것이 역사이며, 그 뜻과 계획과 목적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려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으로 기도합니다. 마치 인간이 자신의 요구를 하나님께 졸라서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기도에는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여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심부름을 하게 하는 것” 그 이상의 것입니다. 또 거지가 구걸하는 것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구하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그것은 매우 귀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행위가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시도록 설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기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굽혀 우리의 뜻에 맞추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 하나님의 능력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목적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치 보험처럼 기도가 비상사태만을 위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위험에 처했을 때, 질병에 걸렸을 때, 물질적으로 궁핍할 때, 난관에 부딪혔을 때 비로서 기도라는 것을 합니다. 마치 불신자가 얼어 붙은 강 위를 걷다가 얼음이 깨어지는 순간에, 또 탄광 속에 들어간 불신자가 천정이 무너져 내리는 그 순간에 기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기도입니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기도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좀 거창하게 말하면 기도는 성도의 죽었던 영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서 이제 성도가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이 계신 천성을 향해 돌아서는 순간 마귀는 그 살아난 영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그리스도인이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이 세상에서 그 마귀의 공격에 대처하며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구약적인 표현으로는 ‘지성소 안에서의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그들을 알아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고 더 깊이 발견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순수하게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우리의 믿음의 선배인 다윗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시25: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또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미7:7-8)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존재의식 가운데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운데 그를 응시하는 것은 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일은 하나님과 친구처럼 교제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녀가 부모와 항상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부모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부모와 친구처럼 대화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곧 기도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이 기도를 왜곡시킵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믿음의 기도를 할 수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의심으로 가득 차게 만듭니다. 오로지 우리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필요를 구하며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구하는 데만 기도를 사용하게 하여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 사랑하는 아버지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선물을 주는 자보다 선물을 더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마귀는 때때로 그런 기도에 응답해주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라는 강력한 영적 무기가 고작 그런 부질 없는 세상적인 것을 구하는 데만 쓰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모하메드 교인은 그들의 기도에 세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저 차원의 기도는 입술로만 하는 기도이고, 다음은 굳은 결심으로 노력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하늘의 것에 고정시키는 일에 성공할 때이며, 가장 고 차원의 기도는 영혼이 신으로부터 떠날 수 없음을 발견할 때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4:13에서 사도 바울이 표현한 대로 신앙의 최종적인 목표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면 기도도 그 목표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수 없음을 발견하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두 단계의 생각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자각해야 하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기도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도 모른 채 우리는 과연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기도가 때때로 응답이 없고, 무력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나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가까이 하기 원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 묵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17-19에서 교인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경에서 기도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지극히 위대한 영광을 깊이 생각하고 경탄하면서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그의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4).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 앞에 내놓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은혜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기도의 사람들이 보았던 것처럼 온 땅에 주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온 천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우러러 보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현미경은 하나님의 극치의 영광을 찾아 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과 눈이 부시도록 빛난 햇빛 그리고 바다와 하늘에서 뛰어난 영광을 직접 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한히 광대한 우주와 극치 속에 담긴 놀라운 능력에 대하여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보다 그것을 우리의 눈으로 보게 만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어떤 형제가 “우리의 눈 하나만 보아도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어린이 성경 공부 시간에 심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린지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두 개의 심장 중에 한쪽은 나쁜 피를 받아 들여 깨끗이 한 다음에 다른 쪽 심장에 보내어 펌프질을 해서 우리 온 몸에 보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모님! 정말 놀랍지 않아요? 너무 신기해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이 됩니까? 그때 제가 만약 우리 심장이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우리가 명령을 내리고 심장이 그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 외에는 다른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밤에 잠도 잘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모두가 인공 호흡기를 달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웃지 못할 이야기입니다만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그것을 베푸신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왕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전부가 곧 영광입니다. 그의 거룩함이 영광스러우며(출15:11), 그의 이름이 영화로우십니다(신28:58). 그의 행사가 영화로우시며(시111:3), 그의 능력이 영광스러우시고(골1:11), 그의 목소리가 영광스럽습니다(사30:30). 우리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이 바로 지극히 영광스러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젠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서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지나간 삶을 회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에게 가장 부끄러운 부분은 아마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에 사는 동안 기도를 하지 않았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든 진정한 기도가 없었던 것에 너무 놀라서 어쩌면 정신을 잃어버릴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예수님께서 그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역을 앞두고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작별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죽기 직전에 남기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반드시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같은 내용을 7번씩 반복했다면 그 유언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시고 잡히시기 전날 밤에 그 메시지는 선포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4:12-14)

만약 제가 늘푸른 교회를 떠나거나, 혹 죽기 직전에 여러분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면 여러분들은 전혀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를 사랑하고 저를 따랐던 분들 뿐만 아니라 아마 제 자녀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제가 뭐라고 그런 약속을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럼 왜 못 믿습니까? 저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아니 여러분의 아버지가 빌 게이츠라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의 능력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먼저 그들과 가까이 하려고 애를 쓸 것이며,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이 ‘최순실 게이트’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대통령이 이런 약속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권력을 믿고, 대통령의 이름으로 행하다 한 나라의 정국을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권력도 이러한데 하물며 말씀하신 분이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왕이시라면 어떻겠습니까? 이보다 더 확실하고 명백한 말씀이 또 있겠습니까? 어떤 약속이 이보다 더 중요하고 더 크겠습니까? 다른 누가 언제 어디서 이런 엄청난 것을 제시한 적이 있었습니까?

제자들은 이 말씀에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예수님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눈치채셨는지 예수님은 잠시 후 또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7-8)

이 짧은 순간에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세 차례나 선포되었습니다. 도대체 이 말씀이 얼마나 중대하길래 그러셨을까요? 사람 사이에 여러 약속들에 대하여 통념적으로 묵인하고 있는 숫자가 있습니다. ‘3’입니다. 아마도 이 숫자는 성경의 본을 따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 관계에서 뭔가를 허용하고, 용서하고, 부탁함에 있어서 세 번을 한계치로 제시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 구하라고 하셨으면 그것은 단순히 세 번이 아니라 명령의 최대치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다시 당신의 바램을 반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여 함이니라”(요15:16)

이 정도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기 원하시며 또 그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시고 기도가 없이는 아무 일도 성취할 수 없음을 분명하고도 충분하게 말씀하셨다고 보여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후에 또 다시 그 주제를 꺼내어 똑 같은 말씀을 반복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니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16:23-24).

예수님께서 어떤 약속이나 명령을 하셨을 때, 이처럼 강조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여섯 번씩이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실제로 무시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또 한 번 더 강조하셨습니다.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요16:26-27).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잡히시기 전에, 결박 되시기 전에, 채찍을 맞으시기 전에,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이렇게 일곱 번씩이나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부활절을 전후로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을 많이 묵상합니다. 그러나 그에 비해 주께서 일곱 번씩이나 기도하라 하신 말씀에 대하여는 별로 묵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힘과 결실이 우리의 기도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쁨도 기도의 응답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요16:24).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마귀가 이렇게 속삭입니다.  “기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야. 네가 지금 한가하게 기도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네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밤잠 설쳐가며 공부해야 하고, 회사에서 누구보다고 열심히 일을 해야 승진도 할 수 있는 거야. 그리고 인맥이 좋아야 해. 그러니까 회사에서 상사의 눈에 띄게 일을 하고, 그들과 친해지고, 또 주변에 힘 있고 돈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 인맥을 쌓아야 하는 거야.” 이런 마귀의 속삭임에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우리 자신을 내어주고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들어 우리의 기도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보지 못하게 만들어도 우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우리들이 일에 몰두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성경을 성실하게 연구하고, 깊이 있게 묵상한다 해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마귀는 절대로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 “아니야, 난 기도해! 이건 지나친 비약이야. 내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없잖아. 내가 기도하는지 안 하는지 봤어?”라고 하며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곱 번의 명령이며 약속인 말씀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그 증거라 하겠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일을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마귀가 우리들의 수고를 비웃고 우리들의 지혜를 조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두려워 떱니다. 그것도 벌벌 떱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의 사람들의 예가 수두룩합니다. 성경에만 있을까요? 세상 역사 가운데도 넘쳐 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마틴 루터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카톨릭 교회가 떨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영적 대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세계가 한 사람의 교구가 되었습니다. 휘트필드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수 많은 무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조지 뮬러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수천 명의 고아들이 양육을 받았습니다. 존 하이드가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인도의 북부에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기도가 실패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 자신들에게 이렇게 질문해 봅시다.

“나는 진실로 기도는 능력이라고 믿는가? 기도는 지상에서 최대의 능력이라고 확신하는가? 기도가 ‘세상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인다고 믿는가? 정말로 하나님의 기도 명령에 관심이 있는가? 기도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들은 여전히 효력이 있는가?”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예’, 혹은 ‘아니요’, 혹은 ‘글쎄요 잘 모르긴 해도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모두의 질문에 ‘예’ 라고 중얼거렸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기도의 자리에 나아갑시다. 이제까지 기도하지 못했다면 오늘부터 기도의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정합시다. 모든 것은 우리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을 기도의 삶으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불신으로 주님을 놀라게 하지 말고 믿음의 기도로 주님을 놀라게 해 봅시다. 지금까지 기도 응답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해서 기도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그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함께 시작해 봅시다. 물론 저를 포함한 우리들이 누구의 권면을 받아서 설득 되리라고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약속임과 동시에 명령입니다.

  기도하라!

행하라!

가라!

주님의 3대 명령 중에 최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명령이 바로 기도하라!는 것임을 잊지 말고 우리 같이 기도의 자리에 나아갑시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가장 위대한 일은 기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