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나게 하시는 성령님

요한복음3:1-10

오늘 이 시간엔 성령이 하시는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두번째 출생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영적을 죽었던 사람이 영적으로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죽었다 살았다는 말의 의미는 영이 신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되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은 영적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소경이 앞을 볼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말과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사실 동의어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없습니다. 교회다녀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교회다니는 불신자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구원얻은 게 아니고 천국갈 수도 없습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니고데모는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난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인가 다소 비웃는 듯한 반응처럼 보이는 동시에 니고데모가 거듭난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바람의 특성으로 거듭난 사람을 설명할 때 니고데모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거듭나는  것이 뭔지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거듭나는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나타나는 변화를 인지하고 경험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서 죄를 깨닫고 뉘우치는 마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겠다고 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생깁니다. 생각과 마음에 나타나는 이런 변화는 이전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성령의 존재와 거듭남을 깨닫고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생물학적 출생과 영적 출생을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엔 의문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로 생각되지만, 요즘엔 예수 믿는다고 하면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굳이 구별하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거듭남을 강조하면 오히려 이단이라도 되는 듯 의심스럽게 보기도 한답니다. 저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말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불신자는 허물과 죄로 죽었고 공중권세 잡은 마귀의 영들의 지배를 당하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했습니다(엡2:1). 전에는 우리도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이란 거듭나기 전입니다. 이렇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죄를 깨닫고 예수 믿어 거듭나게 해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행하시는 주권적 역사입니다. 그 주도권은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사람의 믿음입니까, 성령의 역사입니까? 예수 믿어 거듭나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죽은 사람은 의식이 없습니다. 뭘 깨닫고 결심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활동은 살아서 의식이 생겼을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영적인 자각이나 결단을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뭘 안다고 믿겠다 안 믿겠다고 결정하겠습니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게 당연하죠. 살아난 후에야 어떤 결정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 변화의 순서는 거듭나는 중생이 믿음에 선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말할 때는 예수 믿는다고 하는 걸 보니 거듭났구나 그러는 것입니다.

중생에 대한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 사이의 견해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둘 다 은혜에 의한 중생을 주장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인간은 자신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인간을 살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선행하는’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은혜가 우리 마음을 붙잡아 역사하려면 우리가 그 은혜에 협력하고 동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것은 신인협력설 입니다.이런 관점에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도 사람이 동의하지 않으면 거듭나는 역사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인간의 타락에 관한 견해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했다는 사실은 다같이 동의하는데 그 타락한 정도에 대해선 서로 다르게 생각합니다.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해서 구원의 역사에 있어 전적으로 무능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다고 보는 것과 타락하긴 했어도 아직 어느 정도 영적 분별력과 믿음을 결단할 의지가 남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칼빈 같은 개혁자들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중생 후 믿음을 주장했습니다.

에베소서2장 8-9절을 보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구원을 얻는 믿음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은혜 없이 우리 힘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역할은 배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중생이 하나님의 주도권에 의해서 단독적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하면 선택의 교리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현대에도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의한 구원을 믿는 사람들과 선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의 반응에 따라 구원에 이를 수도 있고, 멸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믿기도 합니다.
 
로마서8장 30절에는,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고 하시고 의롭다고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구절의 뜻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미리 정하신 모든 자들이 부름받는 것인지 일부만 부름받는 것인지, 부름받은 모든 자들이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인지, 일부만 부름받아 의롭게 되고 그 중에 일부만 영화롭게 되는 것인지 생각해봅시다. 만일 일부만 부름받고 그 중에 또 일부만 의롭게 되고 그 중에 또 일부만 영화롭게 된다면 이런 상황 속에선 예정이나 소명이 별로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반응에 따라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가이사랴에 주둔하던 백부장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거듭나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고넬료를 구원하기 위해 베드로를 보내 복음을 듣고 구원얻게 해주셨습니다(행10:44). 여러분 모두 거듭난 그리스도인지 한 번 돌아보기 바랍니다. 거듭남의 특징은 마음의 변화입니다. 거듭난 특징이 없다면 거듭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